경성 비밀결사대 04
written by 스페스
초가을, 저녁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유난이 더웠던 올여름의 폭염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꽤 선선해진 날씨였다. 카페 밖으로 나오자, 불야성 같은 도시의 밤이 펼쳐졌다. 이제 막 시작된 혼마찌의 밤은 적당히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과 화려하게 치장한 채 불나방처럼 모여든 무리로 북적였다.
월요일은 카페 스페스가 유일하게 일찍 문을 닫는 날이었다. 운영 시간을 잘못 알고 온 탓에 문 앞에서 아쉽게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나는 전차를 타기 위해 대로를 가로질렀다. 거리는 간판들이 내뿜는 색색의 조명들로 더없이 밝았다. 그러나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도시의 화려한 풍경은 머릿속에서 점점 빛을 잃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라이터 불빛을 따라 흔들리던 붉은 얼굴이었다. 빤히 나를 바라보던 표정이 여전히 눈에 선했다. 수많은 말을 함축한 듯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이윽고 한순간에 불길에 의해 사그라든 편지와 눈을 감고는 가보라고 말하던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재생됐다. 질문에 오롯이 답하지도 못했는데, 허무하리만큼 쉽게 종이를 태워버린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장난칠 것처럼 굴고는.
"으악"
누군가 뒤에서 팔을 확 잡아끌었다.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주한 얼굴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 남자였다. 본정통을 걷는 내내 나를 따라다니던 얼굴. 민윤기가 내 오른팔을 붙잡은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걸음이 빨라."
그가 무릎을 짚은 채 나를 올려다보더니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거칠게 숨을 뱉었다. 그리고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나 뛰는 거 진짜 질색인데.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근데 무슨 일이에요?"
남자가 허리를 펴고는 트렌치코트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흔들었다.
"차로 데려다줄게."
"됐어요."
"나도 데려다주고 싶어서 온 거 아니고요."
"그러니까 됐다고요."
"김남준이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르는데, 말은 맞춰야 될 거 아니야."
민윤기의 입에서 튀어나온 김남준이라는 세 글자에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머뭇거리는 나를 보며 그가 덧붙였다.
"걔 집요하지? 얼굴에 쓰여있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남준이는 집요하다는 말보다는 지독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편이었다. 한차례도 학교 전체에서 1등을 놓쳐 본 적 없었고, 시험 기간이 되면 주변에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공부에 미쳐 살았다. 그러나 남준이가 가장 빠져있던 건 시와 소설을 아우르는 문학이었다. 보통 학교가 파하면 남준이와 나는 가방을 던져두고 동네 서점을 향해 달렸다. 내기라도 한 듯, 책장에 꽂힌 책을 집어들고는 다 읽을 때까지 서로 말을 붙이지 않았다. 서점 바닥에 앉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보다가 집에 가려고 보면, 이미 하늘은 어둑해져 있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은 항상 시인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내 입에서 나온 이야기의 팔할은 김소월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남준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의 이름을 본 따, 나를 월이라 부르고는 했다. 월아. 갑작스레 남준이와의 학창시절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현실이 잔인한 만큼 추억은 아득히 멀었다.
때 마침 멀리서 검은 전차가 경적을 울리며 정거장을 향해 다가왔다. 다급하게 교차로로 내달렸다. 전차를 놓치면 삼십분은 족히 기다려야 할 터였다. 정거장 앞에 멈춰 선 전차에서 승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대부분 혼마치의 밤을 즐기려는 이들이었다. 그 덕에 전차 안은 꽤 여유로운 편이었다. 빈자리에 앉아 맞은편 좌석 뒤로 길게 뚫린 창을 바라보았다. 민윤기를 찾았지만 창문 너머에 있어야 할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쌈닭인 것도 모자라서 고집도 세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미 전차에 탑승한 민윤기가 내 옆자리에 몸을 붙이고는 등을 기댔다. 전차가 덜컹이며 조금씩 속도를 냈다.
"지금 뭐 해요?"
"좀 조용히 가지? 평소에는 절대 안 하는 뜀박질을 했더니 피곤해 죽겠는데."
"내가 어린 애도 아니고, 데려다 달라고 한 적 없잖아요."
"아... 정호석을 진짜."
얼굴을 찌푸린 채 남자가 익숙한 이름을 뱉었다. 누구였더라. 생각 끝에 익숙한 얼굴을 떠올렸다. 아, 카페 스페스의 그 남자.
"스페스 사장님?"
"걔가 호들갑 떨면서 김남준이 너 쫓아갈 거라잖아."
"쫓아오면요."
민윤기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제 머리를 헝클이며 헛웃음을 지었다. 말려올라간 입꼬리에 시선이 고였다. 그는 계속 어이없다는 듯 마른 세수를 하더니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게. 김남준이 쫓아오는 게 뭐라고 내가 이걸 타냐."
그의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전차 안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차체와 선로가 맞부딪히며 내는 마찰음과 창으로 흘러들어오는 도시의 소음뿐이었다. 옆에 앉은 그가 몇 번 헛기침을 했지만 왠지 모르게 쳐다볼 수 없었다. 두 정거장을 지나도록 발끝만 바라보았다. 어색한 기운이 우리 주변을 가득 채웠다. 결국 말을 꺼낸 쪽은 나였다.
"저기."
그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미쓰코시 카페에서 맞선 본 거."
민윤기가 미쓰코시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웃어버리더니 묻지도 않은 얘기들을 했다. 또 그 낮은 목소리에 껄렁한 말투로.
"그날 아부지 말을 제대로 못 들었거든. 그래서 맞선 장소를 착각했어. 솔직히 나도 대화하는 동안 조금 이상하긴 했어. 근데 원래 그 자리에 나오기로 했던 여자도 빨리 혼인을 하고 싶어 했대. 마침 네가 나와서 청혼서를 달라고 하니 딱 맞아 떨어진거지."
"나한테만 예의 없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 말씀도 제대로 안듣나보네요. 민윤기씨는."
"그런가. 안그래도 이제 아버지 말 잘 들으려고. 그랬으면 이 어색한 옷차림 안봤을 거 아니야."
".... 아, 진짜. 또 그 얘기. 근데 그렇게 이상해요?"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찬찬히 내 옷차림을 살펴보더니 입을 다물고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이상한가. 시선을 내려 무릎 근처에서 팔랑거리는 치맛단을 살폈다.
"그렇게 이상해요? 하긴 좀 옷이 어색하긴 하죠."
"별로 안 이상해. 장난친 거야. 방금."
"근데 그날 왜 코르사주 어쩌고 했어요? 그거 진짜 기분 나쁜거 알죠?"
"... 네가 진짜 혼인하자고 할까봐."
"어이가 없네. 그쪽도 내 취향 아니거든요! 진짜 기가 차네."
샐죽하게 답하긴 했지만 그는 말하는 내내 웃는 낯이었다. 평소 인상과는 상반된 모습 때문인지, 웃는 모습이 유독 예뻐보였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그가 물었다.
"혹시 닭띠야?"
"아닌데요."
"아무리 봐도 맞는 것 같은데. 이거 쌈닭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가 없는 느낌인데."
민윤기를 흘겨보자, 그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웃어댔다. 들썩이는 어깨가 더 없이 얄미웠다.
전차가 본정통에서 멀어질수록 창밖의 풍경은 점차 어두워졌다. 대체로 친일파 부호나 일본인들이 사는 본정과는 달리 조선인이 거주하는 지역들은 도로도 전기사정도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드문드문 놓인 가로등마저도 몇몇은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한참을 내달리던 전차가 점점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끼익 소리를 내며 종로상회 앞 정거장에 멈췄다. 이미 밖은 새카맣게 어둠이 내렸다. 전차에서 내리는 이는 민윤기와 나, 둘 뿐이었다. 파직 거리며 깜빡이는 가로등 하나가 정거장 앞을 외롭게 비추고 있었다.
"조심히 들어가."
한 문장을 남기고, 그가 외투를 여미며 반대편 정거장으로 걸었다.
"저기요."
"또 왜."
남자가 피곤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나를 쳐다봤다.
"이 동네에 불빛이라고는 달랑 이거 하나예요."
점차 점멸하는 가로등으로 시선을 던진 민윤기가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별말 없이 나와 걸음을 함께 했다. 종로상회 옆으로 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을 무렵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그와 내가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탕」
우리를 멈춰 세운 것은 골목을 울리는 총성이었다.
이윽고 연이은 한 발의 총성이 골목을 휘몰아쳤다.
* * *
늦은 밤의 종로 의원은 고요했다. 당직인 석진과 간호사 한 명을 제외하면 병원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입원 환자 네댓 명이 다였다. 간호사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당직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석진의 배려였다. 여섯시 이후로는 따로 접수를 받지 않았지만 간혹 다급함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방문하고는 했다. 꿋꿋하게 진료시간을 준수하는 몇몇 의사들과는 달리, 석진은 밤늦은 시간도 개의치 않고 환자를 받았다. 처음에는 석진과 당직을 서겠다고 자처했던 간호사들도 서서히 그와 한 조가 되기를 꺼려했다. 피곤하다는 이유에서 였다.
진료실 책상에 앉아 문진표를 넘기던 석진이 흘끗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 초침이 정확히 숫자 3를 가리킬 무렵, 팔에 깁스를 한 환자 하나가 조심스레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모습이 어딘가 의문스러웠다. 걸어들어오는 남자를 흘끗 본 석진이 다시 한 번 시계로 눈을 돌리더니 말했다.
"15초야. 정확히 10시 30분 15초. 15초 늦었어. 너."
환자가 석진을 향해 못 말린다는 듯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석진은 문진표의 빈칸을 마저 작성하면서 환자용 의자에 앉은 남자를 향해 말했다.
"안 불편해?"
석진이 눈짓으로 남자의 팔을 가리키자, 남자가 시선을 내려 제 팔에 놓인 깁스모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반대편 손으로 힘을 주어 왼팔에 감긴 석고 깁스를 빼냈다.
"어쭈, 의사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빼?"
"이거 할 때마다 불편해죽겠어. 멀쩡한 팔에 가짜 깁스라니. 눈 속임도 한두 번이지. 다음엔 감기로 하자. 기침 연기는 자신 있어."
남자가 입가에 놓인 마스크를 턱밑으로 내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외투안주머니에서 흑백 사진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석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사진으로 옮겨갔다. 사진 속 소년이 손으로 브이를 그린 채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석진이 눈을 가늘게 뜨자, 순간 그의 표정을 잡아낸 남자가 말했다.
"다음 타케트. 아니 정확히는 다음 타케트를 위해 먼저 포섭해야 하는 애.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이야."
석진이 턱을 매만지며 사진을 뚫어져라 보았다. 소년의 얼굴이 앳돼 보였다.
"누구?"
"조선 방직 공장 친아들."
석진은 조선방직공장이라는 단어를 듣고는 사진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의문에 가득 찬 얼굴로 자신 앞에 앉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방직 공장? 그럼 다음 타케트가 조선방직공장 사장이야?"
"아직 거기까진 나도 들은 바 없어. 사견을 덧붙이자면 나는 타케트는 아닐 것 같다에 한 표. 뭐 확실하지는 않지만."
"왜 아닐 것 같은데?"
"조선 천지에 널린 게 일본 놈들이야. 그 방직공장 사장보다 더한 놈이 한 둘이 아닌데 굳이 소모전 할 필요 있어? 아직 표적이 될 만큼 우선순위는 아니야."
"그런가."
진료실에 앉은 남자가 기지개를 켜고는 다시 팔에 석고판을 끼우려 하자 석진이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석진이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웃느라 벌게진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갑자기 오른쪽이 부러졌냐?"
"아 맞다, 왼팔이었지."
남자가 반대편 팔에 제대로 가짜 깁스 모형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는 몇 번 왼팔을 돌려보더니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석진이 물었다.
"... 근데 왜 직접 안 하고."
"경우의 수는 많을수록 좋아. 막 다른 길은 위험하니까."
"그러던지. 얘 포섭할 단원이 정해지면 알려줄게."
석진이 검지로 사진 속 소년을 툭툭 치며 말했다. 옷매무새를 정리한 남자가 움켜쥔 진료실 문고리를 놓고는 방향을 틀어 석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니, 알려주지 마. 모른 척, 못 본 척하는 연기는 젬병이니까. 단원 얼굴 알아봤자 임무수행에 하등 도움이 안 돼. 그럼 김석진 간바리마쇼."
"저걸 확."
석진이 장난스럽게 문을 향해 볼펜을 던졌다. 남자가 날아든 볼펜을 한 손으로 잡아채고 깁스 한 팔을 흔들며 장난스레 외쳤다. 간바떼!
그때였다.
「탕」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는 희미하나 분명 총성이었다. 남자와 석진 모두 웃음기를 거두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냐."
"그러게. 또 무슨 일 났나보네."
"지금 가도 괜찮겠냐?"
"총소리 한 두번 들어? 그저 저 탄환에 죽어나간 놈이 적어도 우리 쪽은 아니길 바라야지."
남자가 일부러 웃는 얼굴을 하고는 진료실을 나섰다. 석진은 의자에 기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다시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응시했다. 사진 속 소년이 유독 해맑아 보였다. 한참이나 소년의 얼굴을 보던 석진이 사진 뒷면을 펼쳤다. 조그맣게 연필로 적힌 글씨에 시선이 멈췄다.
'김태형. 금월 20일 제물포항.'
김태형. 김태형이라. 석진이 두어 번 적힌 이름을 되뇌고는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살폈다.
사진 속 주인공의 입국 날짜까지 한 주가 남았다.
* * *
"... 들었죠?"
정신이 혼미해졌다. 분명히 총성이었다. 한 발자국도 더 내딛을 수 없었다. 나를 훑어본 남자의 낯이 자못 심각해졌다. 경성에 사는 동안 꽤 자주 총소리를 들었지만 그럼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특히 총격전 끝에 둘째 오빠가 세상을 떠난 후로 총소리에 대한 공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파리하게 빛을 내는 가로등 밑에 서서 숨을 고르는 사이, 주변은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누구일까. 누가 누구에게. 대체 어떤 연유로. 사상자가 있었을까. 오발탄이었을까. 수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심박수가 평소와 같아지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 곁에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서 있던 민윤기가 내 안색을 살피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괜찮겠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천천히 골목으로 향했다. 유일하게 빛을 내던 가로등도 멀어지고, 캄캄한 길을 비추는 거라고는 마작관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뿐이었다. 골목 끝에 위치한 오래된 마작관은 이 동네의 터줏대감으로 유일하게 늦은 밤까지 성행했다.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걷고 있을 무렵, 갑자기 남자가 멈춰 서서 내 팔을 잡아끌었다.
"발자국 소리."
그의 말대로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어둠 사이로 누군가 뛰어오는 듯했다. 그가 내 팔을 붙잡고 길 옆으로 난 정미소 골목으로 향했다. 골목길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만큼 심장은 다시 터질 듯 뛰어댔다. 발소리에 맞춰 불규칙적으로 내는 거친 숨소리가 꽤 가까워졌다. 그와 나는 나란히 정미소 담벼락에 붙어 숨을 죽인 채 골목길을 곁눈질했다.
숨소리가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내 팔목을 잡은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더 이상 가까울 수 없을 만큼 발걸음 소리가 커졌을 때.
시야에 들어온 건
복면을 쓴 한 남자였다.
모자를 눌러쓴 채 부상당한 어깨를 붙잡고 있는 남자. 뛸 때마다 흔들리는 헤진 외투 자락. 그리고 손끝에 쥔 총.
짧은 순간, 마치 시간을 늘려놓은 듯 남자의 모습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졌다. 독립운동가. 아니면 친일파. 찰나의 순간 생각을 끝내고 총을 든 남자를 향해 달려가자, 내 손목을 잡고 있는 민윤기의 눈이 커졌다.
"미쳤어?"
붙잡힌 손목을 빼내고 골목길로 뛰어나가 복면을 쓴 남자를 붙잡았다. 그가 화들짝 놀라 내 얼굴에 총을 겨누었다. 눌러 쓴 모자와 복면 사이로 살짝 드러난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쪽으로."
이윽고 잠시 멈칫한 남자가 총을 내리고는 순순히 나를 따라 움직였다. 민윤기가 복면을 쓴 남자와 정미소를 향해 뛰어오는 나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정미소 우측 반지하로 만들어진 창고는 오래토록 비어있었다. 칠흑같은 어둠에 갇혀 눈앞으로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철제 계단을 내려가는 데만 한참 애를 먹었다. 복면을 쓴 남자도 숨을 고른 채, 나를 따라 지하 창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때 갑작스레 주변이 밝아졌다. 뒤따라 온 민윤기가 라이터를 켠 탓이다. 창고 바닥에 주저앉은 남자가 부상당한 반대편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복면과 모자 사이로 드러난 눈을 숨기려는 것 같았다. 그의 외투 위로 흘러나온 피가 옷을 붉게 물들였다. 그제야 괴로운 듯 신음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깐만 있어봐요."
그에게 다가가 외투를 어깨 뒤로 넘기자 피로 젖어버린 하얀 셔츠가 드러났다.
"아까 스쳤나 봐요."
처음으로 듣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총알이 스친 상처 위로 쉴새없이 피가 솟아났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치맛단을 양손으로 잡아당기자, 밑단이 북 찢어졌다. 철제 계단에 앉아 라이터 불빛을 비추던 민윤기가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와서 좀 비춰줘요."
민윤기가 한 손에 라이터를 든 채로 계단을 걸어내려와 부상당한 남자 가까이로 빛을 비추었다. 스쳤다고 하기에는 꽤 깊게 찢어진 듯했다. 천을 환부에 둘둘 감자 복면을 쓴 남자가 고통을 참아내는 듯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때 또 한 발의 총성이 창고 안을 울렸다. 남자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사가세!(쫓아가)」
낯선 일본어와 흙바닥을 뛰는 거친 발소리가 뒤엉켰다. 천으로 매듭을 짓자마자 남자가 감아놓은 팔을 움직여 보더니 손에 들린 총을 장전했다. 민윤기와 내가 놀란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며 말했다.
"친구일거예요. 죽어도 같이 죽기로 했어요."
"지금 나가는 건 위험해요."
그가 대답 대신 외투에 힘겹게 팔을 넣고 출구를 향해 걸었다. 민윤기가 아무 말 없이 그가 계단에 오를 수 있도록 팔을 붙잡아 주었다. 남자가 홀연히 떠나고 철제문이 삐걱거리며 닫혔다. 계단을 내려온 민윤기가 내 곁으로 다가와 제 손에 든 라이터를 넘겼다. 잠깐 들고 있어 봐. 그리고는 트렌치코트를 벗어 내 치마 위에 던지듯 덮었다.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내 옆에 털석 주저앉았다.
"살았을까요?"
"글쎄."
"살았겠죠? 죽을 각오했으니까."
"죽을 각오 한 사람은 정말 죽는 거야."
라이터 불빛이 점점 희미해졌다. 사그라드는 불빛 사이로 비친 남자의 표정이 꽤나 슬퍼 보였다. 그리고 불빛이 거의 명멸할 즈음 남자가 어둠 속에서 물었다.
"당신 동생도 죽을 각오 했었나? 편지 속 동생말이야."
갑작스레 정국이가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졌다. 글쎄. 정국이는 정말 죽음을 각오 했을까. 새카만 어둠속에서 죽어도 같이 죽기로 했다는 복면 쓴 남자의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살았으면. 죽을 각오를 했더라도, 살아있어 주길.
From. 스페스 |
안녕하세요. 스페스에요. 일단 3화를 올리고 너무 오랜만에 글을 들고 온지라 조마조마 했는데, 기쁘게 맞아주셔서 감사해요. 독방에 올라온 추천글에 감동하고, 애정가득 담아 적어주신 댓글 하나하나, 몇 번이고 곱씹어 읽었답니다. 늘 마음은 빨리 오고 싶은데, 생각도 손도 느리네요.
앞으로 전부 5포인트를 부과할 예정입니다. 마음같아서는 그냥 다 공개하고 싶은데, 실제로 제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님들이 몇 분이나 계신지 궁금해서 그러하니 양해바랍니다.
+암호닉은 계속 받습니다.
암호닉 (가나다순)
감자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설 명절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