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피코]해를 품은 달 00
「지호야, 너 엄마 아빠 돌아가셨다며…. 안 됐다.」
「우지호오…괜찮아…?」
악몽같았다. 이제는 누가 좀 깨워줬으면 좋겠는데, 이 깊은 악몽의 수렁에 빠져버린 나를 흔들어 깨워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깨고 나면 말갛게 사라지는 악몽 따위가 아니였다.
열두 살. 부유와 풍족과는 거리가 먼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단 한번도 나를 이런 가정에 보낸 신을 원망한다거나 불만을 가져 본 적은 일절 없었다.
치킨, 피자처럼 값비싼 음식은 아주 가끔 사먹는 것으로 만족했으며, 친구들이 허구한 날 갖고 싶다고 징징대는 미니카 3단 변신세트 같은 고가의 장난감이나 메이커 옷 따위는 애초에 눈에 담지도 않았다.
그냥 엄마, 아빠, 할머니, 형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식구가 좁은 집 안에서 서로의 살을 비비고 부대끼며 정답게 사는 것으로 나는 행복했다.
그들과 함께라면 맛있는 것을 먹지 않아도 좋았고, 최신형 장난감이 없어도 즐거웠고, 메이커 옷을 입지 않아도 기뻤다.
그런데 왜…?
그러지 않아도 가진 것 뿐이라곤 이 네 사람 뿐이던 내게 왜…. 한 분으로도 벅찰 것 같은데 어떻게 두 분 씩이나 뺏어 갈 수 있는 것일까.
신은 열두 살 된 어린 나의 어디가 그렇게 미웠고, 괴롭혀주고 싶었던 것일까.
「애들아…」
「으응…?」
「왜일까…?」
「뭐가아…?」
「…왜…왜…」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누가…누가 좀 알려줘.
뒷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목 너머로 구겨 넣은 채 쿵, 책상 위로 머리를 박으며 기절하듯 쓰러졌다.
애들아…할머니…형…그리고 엄마, 아빠…. 세상이 언제부터 이렇게 짙은 회색이였어…?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쉬는 것은 코가 먼저였어, 입이 먼저였어…?
부모가 천적에게 죽어 없어진 어린 새끼 짐승의 처지가 되버린 나는 자꾸만, 자꾸만 내가 가지고 있는 사소한 것들 조차 잃어갔다.
「…꺄아악!!」
「지호야! 우지호, 정신차려!」
부모님의 장례식을 마치고 간만에 학교에 나온 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이것저것 묻던 반 친구들의 비명소리와, 어디론가 급히 뛰어나가는 몇몇의 아득한 발소리를 들으며 눈물에 젖어 먹먹한 정신을 스르륵 놓았다.
▒▒▒
슬픔은 느낄 수 있는 데까지 느껴 더이상 그 감각이 미미한데, 머릿속을 터뜨릴 것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의문점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무게를 더해만 갔다.
이 의문점에 더듬거리지 않고 명쾌하게 답을 내려 줄 사람이 필요했다. 무언가에 머리가 힘껏 내려쳐져 도무지 자리를 잡을 틈이 없는 엄청난 크기의 생각을 하나하나 다듬어 줄 그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놓아버린 정신과 함께 시간의 절벽 밑으로 추락한 나는, 떨어지면서 뭉툭하게 튀어나온 바위에 아무렇게나 부딪힌 팔 다리를 절며 절벽 밑의 알 수 없는 샛길을 따라 끝없이 걸었다.
다친 곳이 너무나 아파 고꾸라 질 때마다 내가 갇힌 이 곳 세상의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내 머리 바로 위까지 주저앉았고, 차라리 주저앉는 하늘에 온몸이 깔려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떻게든 쥐고있던 숨을 놓으려 할 즈음엔, 샛길을 막 따라 걸을 때부터 저 멀리 작게 빛나던 하늘색 빛이 반짝, 그 크기를 더하는 통에 쉽사리 그러지도 못했다.
그래, 죽더라도 저 빛에게 물어보고 죽자.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길의 끝에서 반짝거리는 저 하늘색 빛이 이 의문점의 하나부터 열까지 차곡차곡 정리해 줄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 것은 무의식 중의 의식이였다.
윗옷을 찢어 상처가 난 곳에 질끈 동여매고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그러다 가끔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구르듯 넘어질때면 아까처럼 숨을 놓을 생각보다는 피어오르는 장례식 향의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던 할머니와 아무것도 모른채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고 따라 울던 다섯살의 시간에 멈춰있는 내 어린 형을 떠올렸다.
「하아…우윽…하아, 하아…하… …」
…우지호, 정신 똑바로 차리자. 너마저 없으면 늙은 할머니와 장애인 형은…더이상 살아 갈 수 없어.
할머니와 형 생각에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차츰 접어들기 시작했고 가슴 속을 회색빛으로 거칠게 맴돌던 숨이 생생한 파란빛을 되찾아가며 부드럽게 내 온몸을 어루만졌다.
내 숨을 파란빛으로 돌려놓은 남겨진 가족을 향한 일말의 책임감은 너무나도 괴롭던 몸의 아픔까지 점차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할머니와 어린 형이 회색의 짐이 되어 열두 살의 내 등에 얹혔지만, 나는 그들을 위해 기꺼이 내 허리를 굽혔다.
그들은 짐이기도 했지만 내 온몸을 감싸주는 하얗고 포근한 담요이기도 했다. 설령 그들이 칙칙한 회색 담요일지라도 떨쳐낼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다.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가벼운 발걸음으로 점점 길의 막바지에 접어들수록, 동그란 줄 알았던 하늘색 빛은 어딘가 낯익은 네모난 모양새로 길어졌다.
그 낯익은 하늘색 빛의 정체를 기억속에서 찾아 냈을 때, 회색과 적색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웅장한 시간의 절벽이 환상처럼 바람에 휘날려 사라졌고, 그것이 사라진 빈 자리에 추억처럼 차오른 것은ㅡ초록색 지붕의 낡고 작은 버스정류장이였다.
▒▒▒
반짝이던 하늘색 빛은 버스였다. 4년 전, 내게 있어서 처음이 마지막이였던 하늘색 300번 버스.
그리고 그 버스의 자동문에 기대 서있는 사람은…, 낡은 나무의자에 앉아 버스를 구경하던 내게 무섭게 호통치시던 버스기사 아저씨….
「아저씨…?」
「…그래, 어서와라.」
「…아저씨!!!」
한 달음에 달려가 아저씨의 품에 폭 안겼다.
다짜고짜 안긴 내 뒷통수를 말없이 쓸어주시는 아저씨의 손길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아저씨의 빛바랜 버스 기사복을 두 손 가득 쥐고 상처투성이가 된 얼굴을 비비던 나는 꾹꾹 참았던 눈물을 엉엉 터뜨리고 말았다.
아무것도 없는 이 곳에서 낯익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인 내겐 너무나도 감격스러운 일이였다.
「아저씨, 아저씨 나요…나 너무 힘들고 아파요. 나…우리 엄마 아빠가…흐으으…우리 엄마 아빠…끄으으…」
「말하지 않아도 된다. 다 알고 왔으니까.」
다 알고 왔다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 아저씨의 품에 묻고있던 고개를 들어 아저씨를 올려다 보았다.
당황함과 놀라움으로 자꾸만 어긋나는 초점에 제일 먼저 맺힌 것은 잔뜩 먹구름이 낀 얼굴로 날 내려다보는 아저씨의 눈이였고, 그 다음은 아저씨의 눈 속에 비친 소나기가 내리는 내 얼굴이였다.
아저씨 다 알고 왔다고 하셨죠.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게 일어난 일을 알고 왔다고 하신거 맞죠.
그러면, 그러면 있잖아요.
「그러면…내게 왜 이런일이 일어났는지도 알고 계세요?」
「…」
「다 알고 왔다고 했잖아요! 알려주세요, 아저씨…나는 정말 모르겠어요. 나 엄마 아빠가 돈을 많이 못 벌어오시는 것도, 우리집이 가난한 것도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부모님께 '사줘', 라고 말할 때 '사주셨으면 좋겠지만 안 사주셔도 되요.' 라고 말했구요, 반찬이 콩나물무침에 김 뿐이여도 맛있게 먹었어요. 내가 사랑하는건 내게 무언가를 해주는 엄마 아빠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지 날 향해 웃어주시는 엄마 아빠였으니까요.
맛있는 거 안 먹어도 좋아요. 엄마가 장 보러 갈 때 들고가시는 포스트 잍에 몰래 스팸을 적어두는 짓도 안 할게요. 미니카 3단 변신세트도 나는 필요 없어요.
친구들 입고다니는 팔만원 십만원 하는 메이커 옷도 정말 필요 없어요. 엄마 아빠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저씨… 누가, 왜 내게서 엄마 아빠를 뺏어간 거에요? 왜요? 대체 왜!!」
기사복 끝자락을 부들거리는 손으로 꽉 말아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내 어깨를 가만히 쓸어내리시던 아저씨가 천천히 한 쪽 무릎을 굽혀 눈을 맞춰왔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혼란스러운 듯 이리저리 흔들리는 아저씨의 눈이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그건, 네가 달이기 때문이야.」
ㅡ너… …달이구나. 빛을 잃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달.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였다.
「해가 가까워지고 있어…점점 가까워지는 해의 열을 이기지 못한 네 주변의 겉표면이 녹아 내린거야.」
「그럼 나 달 안 할래요. 달 같은 거 하기 싫어요…」
「그건 네가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을 조심해.」
「흐으…」
「해의 따뜻함에 휩싸이지 말아라. 이미 겉표면은 녹아 내렸고, 다음은 너 자신이야.」
「…몰라요…달 안 할거에요. 달 안하게 해주세요, 아저씨…」
해와 달.
그 어쩔 수 없는 관계.
「…신이시여. 부디, 부디 이 어린 달이 해를 품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달 안 할 거라니까요, 나…달 싫어요…진짜 싫어…」
「밤하늘의 파수꾼으로써 비나이다. 이 아이에게 달을 지키는 밤안개를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그 주위에 은은히 피어오르는 밤안개.
팅팅 부은 눈에서 끝없이 흘러 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어디선가 나타나 내 머리 위를 빙빙 맴도는 은빛 아지랑이를 눈으로 좇다가 까무룩, 아저씨의 품으로 무너져 내렸다.
「오늘 나와 있었던 일은 네가 눈을 뜨는 순간 모두 없던 일이 될거야. 네가 정신을 잃었을 동안 꾼 수많은 꿈 중에 하나로 남을거다.」
온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얗고 포근한 커다란 날개가 날 감싸안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솟구쳐 오르는 기분좋은 환상이 감은 눈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이제, 눈을 뜨거라.」
▒▒▒
…
으음…. 여기는…어디지…?
「할머니…?」
「…」
「할머니이…」
「… …지, 지호야! 어이구, 내 강아지…드디어 눈을 떴구나…할미가 미안하다…할미가 미안해…일주일 만에 학교에 보내는 것이 아니였는디…」
「우와- 할머니, 지호가 눈을 떴어. 지호 네 밤 동안 쿨쿨 잠만 잤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았어. 내 동생 지호…」
할머니…우리 태운이 형…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병원 특유의 주사기 냄새가 났다….
그럼 밤하늘에 폭 안긴 상처투성이 달과 그 주위를 맴돌던 은색 밤안개는….
…꿈…, 다 꿈이였나봐.
? 뭐지? 가면 갈수록 더더욱 똥글이 되는 것 같은 이 느낌은? |
아무래도 프롤~01 or 02 까지는 지코의 과거가 다뤄질 듯 해요. 점점 더 어두워질 것 같아요.! 지금은 지코가 어린애여서 전체적으로 예쁘고 애기같은 표현을 쓰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되네요...^^...잠깐 눈물 좀 닦고....흡...! 근데 이거 생각보다 일이 크게 벌려지네요...하...뭔가 현실과 비현실을 자연스럽고 아련하게 오가는...막 그런 현실적이면서 동화같은 스토리를 쓰고 싶었는데... 이건 뭐지...똥이다...똥 투척....! 아! 그리고 피오가 해일지 다른 멤버가 해일지는...아무도 몰라요...작가도 모른다능........ㅋㅋㅋ;; 달은 확실히 지코입니다. |
* 암호닉 :)
쵸코/이불/달/솜사탕/낙서/루팡/오이/쌀알/나의 왕자님/현기증 님 감사합니다 !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