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정국에 뷔 예보
정국은 저를 뿌리치고 가 버리던 지민을 붙잡을 수 없었다. 무언가에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지민의 그 울망한 얼굴과 그 심정을 내뱉으며 괴로워하는 표정까지 하나하나 제 심장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 어린 날의 저와 너무 똑같아서. 너무 닮아서. 그 모습을 보며 괴롭던 어린 날의 저를 회상하는 게 싫으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또 화가 났다. 밤잠도 설쳐가며 저를 어지럽게 만든 지민이 싫었다. 왜. 지가 뭔데. 겨우 숨겨뒀던 상처를 끄집어 내게 만드는 지. 정국은 학교에서도 하루 종일 멍하니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으니 탄소는 답답한 마음에 지켜보기만 하다 거꾸로 놓여진 책을 똑바로 놓아주었다. 그제야 시선을 들어올린 정국이 탄소를 바라보았다.
" 또 뭐가 문젠데? 내가 오늘도 이러면 죽는댔지. "
" …아, 미안. "
" 오늘은 더 이상하네, 진짜. 왜 답지않게 사과야? 무슨 일인데, 너. "
정국이 또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숨길 이유도 없는 사실이었으나, 또 딱히 그 이유를 알려줘야 할 사실도 느끼지 못 했다. 그냥, 제 사정이든 지민의 사정이든 멋대로 내뱉는 게 싫었고, 그로 인해 또 저만큼 아픈 얼굴을 할 것을 보는 게 싫었다. 탄소를 향한 자신의 작은 배려라고 생각했다. 헌데 받는 이는 그게 아닌 건지 탄소는 제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벌떡 몸을 일으키자 정국의 시선을 따라 올라갔다. 정국은 정국대로 답답한 제 시정이겠다만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런 정국을 지켜봐야 할 탄소는 고구마 수십 개는 먹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자신에게도 말 하지 못할 비밀이 무엇인지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 너 말 안 하면 나 담배필 거다. "
" 지랄. 거기서 담배 얘기가 왜 나와. "
" 아, 그러니까 말을 하라고. 사람 열 뻗치게 어제도 오늘도 답답해 죽겠네, 진짜. 성가시게 만들지 말고 빨리 불어. "
" 넌 또 말을 꼭……. "
" 말 안 해, 진짜? 나한테 숨겨서 또 저번처럼 돌아가자고? 이번에 뭔데 자꾸 숨기려 드는데. 별거 아니면 말을 하라고. "
정국의 미간이 좁혀졌다. 안 그래도 불난 속에 부채질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국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탄소를 지나쳐 교실 밖을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탄소는 헛웃음을 치며 정국이 나간 앞문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똥 싼 놈이 성 낸다더니, 시발. 작은 오해로 갈등이 생겼던 자신과 정국의 사이에 자꾸 또 다른 오해와 갈등들이 생겨날 것만 같았다. 욕을 읊조리며 책상을 걷어찬 탄소도 정국이 나간 앞문을 따라 나섰다.
정국은 교실을 벗어나 곧바로 지민의 반을 찾았다. 뭐든, 사과를 해야만 이 답답함이 풀릴 것 같았다. 지민의 반을 찾아가니 텅 빈 지민의 자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 반을 나오던 이의 팔을 붙잡았다.
" 박지민. 어딨냐? "
" 어? 지민이? 오늘 지민이 학교 안 나왔는데……. "
아, 시발. 짧게 욕을 내뱉은 정국에 잡혀있던 이는 흠칫 몸을 떨었다. 정국은 그런 그는 안중에도 없는 듯 교실 밖을 벗어나 급히 학교를 빠져나갔다. 탄소는 뛰쳐나가는 정국을 보며 어리둥절하다가도 정국이 지민을 찾는 게 신기했다. 쟤가 박지민을 왜? 존나 박지민이랑 바람피나? 쓸데없는 생각까지 넘어가던 탄소는 신경질적이게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태형에게 덜미를 잡혀 매점으로 끌려가야 했다.
" 넌 전정국이 저 지랄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시발. 어? 진짜 박지민이랑 바람 피나 봐……. "
" 진짜 개소리 작작하고 빵 사줘. "
" 너나 개소리 작작하세요. 존나 진지한 친구 상담따위 들을 생각은 없고, 썅. "
" 아, 남자들끼리 그렇고 그런 우정을 나누겠지 뭐가 걱정이야. 전정국이 너 냅두고 바람 필 애냐? 그것도 건장한 남자랑? "
" ……그건 또 아니지. "
그렇게 생각하니 화가 풀리네. 금세 헤실헤실 웃는 탄소를 보며 경악에 찬 증오스러운 눈빛을 보내던 태형이 빵이나 사놓으라며 재촉하자 기분이 좋아진 탄소는 음료수까지 결제해줬다. 정국이 제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대해 토론을 하면서 말이다. 물론, 탄소 혼자 신이나 떠드는 걸 태형은 한 귀로 들으며 한 귀를 흘리는 중이었다만.
* * *
정국은 지민을 찾겠다고 무작정 학교를 나오기는 했다만 지민의 번호도, 그렇다고 지민의 집도 알지 못 했다. 그에 절망한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눈가를 쓸어내리던 정국이 다시 발걸음을 돌리고 가려다가 문득 떠오른 게 놀이터였다. 저와 탄소가 자주 갔던 공간이었으며 탄소를 좋아하는 지민 또한 탄소와 한 번 쯤은 가보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발걸음을 돌려 탄소를 만났던 놀이터로 발걸음을 하는데 그 한적한 놀이터에서 삐그덕거리며 움직이는 그네가 보였고, 아니나 다를까 지민이 거기 앉아 있었다. 정국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 옆으로 가 앉자 지민의 시선이 정국을 향했다.
" ……네가 왜. "
" 사과하러 온 거니까 닥치고 듣고만 있어. 쪽팔리니까. "
" ……. "
" 내가 김탄소한테도 안 하던 사과를 너한테 다 하네. "
" 무슨 사과. "
"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감정에만 충실해서 남 감정따위 생각할 여유 없었어. 내가 상처 받는 게 싫었으니까.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될 것 같아서. "
" ……. "
" 어제 했던 말도 진심 아니야. 그러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 "
" …내가 살다살다 사과도 받아 보네. 됐어. 애새끼도 아니고. "
" 맞잖아, 애새끼. "
" 시비 걸러 온 거지, 네 새끼. "
정국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지민이 시선을 앞으로 돌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참 아무런 말이 없던 둘 사이에 정국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난 그런 삶을 살아서 나와는 정 반대인 김탄소한테 관심이 가고, 마음이 가더라. "
" ……. "
" 너도 그래서 걔 좋아하는 거 아니였나. "
" 너랑 내 사이에 자꾸 공통점 만들지 마. 예뻐서 좋아한 거니까. "
" 어찌됐든 내 거니까 넘볼 생각은 뒤져도 하지 말고. "
이번엔 지민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정국의 말이 맞았다. 저와는 너무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은 탄소에게 눈길이 가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관심이 생기고, 마음이 가고, 그렇다 보니 어느새 그 아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아무 의미없이 내뱉은 말에도 바보처럼 웃음이 흘러나오고, 세상 물정 모르는 듯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심장이라도 꺼내 받치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정국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민의 시선이 정국을 따랐다.
" 네가 김탄소만 안 좋아하면 너랑 친구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
" 지랄. 내가 너랑 친구한댔냐? "
" 김탄소 좋아하지 말라는 경고와 동시에 친구 하자고 돌려 말하는 중이잖아, 병신아. "
정국은 낯설게 제 마음을 표현했다. 제 어릴 적 모습과 닮은 지민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 건지, 정국 자신이 가장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 * *
지민의 목덜미를 끌어 학교로 다시 돌아온 정국을 보며 팔짱을 끼운 채 둘을 번갈아 보던 탄소가 헛웃음을 쳤다. 그 옆엔 어깨를 으쓱이는 태형이있었고. 태형 또한 어리둥절한 조합이었다. 박지민과 전정국. 어제만 해도 서로 물어 뜯을 것 같이 굴더니, 김탄소가 둘이 바람날 것을 걱정할 정도로 붙어있는 꼬락서니가 의심이 가지 않을리 없었다. 그것도 정국이 먼저 나서서 지민을 찾으러 갔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이때까지 정국을 알아오며 태형이 삐지거나 화가 났다고 해도 생전 먼저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해가 서쪽에서 뜰련가 보다. 그런데도 속에 들끓는 이것은, 시발. 질투인 건가. 어느새 태형도 탄소의 옆에 서 정국을 질투하고 있었다.
" 아주 쿵짝이 맞다, 너네? "
" 닥쳐. 말도 없이 쳐 뛰어나가더니 혹을 하나 달고 왔네. "
" 저기 내가 왜 혹인지? "
" 넌 더 닥쳐. "
지민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좋다고 빠개? 탄소의 눈썹이 꿈틀거리다 정국을 쏘아봤다. 뭐든 상황 설명을 하라는 소리였다. 물론 아까 태형에게 정국이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대해 그렇게 열심히 말해놓고선 아직도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지. 한 시간동안 나가서 단 둘이 무엇을 했는지 안 궁금하지 않을 리 없었다. 태형에게 당장 오토바이를 가져오라며 어서 찾아봐야 한다고 생떼 부리는 걸 겨우 진정 시켰던 무려 한 시간, 정확히 51분 전의 자신을 칭찬하는 태형이었다. 정국으 슬쩍 웃으며 탄소에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먼저 앞을 가로질러갔다.
" 네가 얼마나 예쁜 지에 대해 토론 좀 하고 오는 길이었다. "
" 지랄할래, 진짜? "
" 아, 뭐가 그렇게 궁금해. 그냥 학교 안 오는 놈 붙잡아 온 건데. "
" 그러니까 네가 왜. 너 박지민 싫어했잖아. 학교는 지가 더 안 왔던 거 생각도 안 나나…. "
삐진 탄소를 달래는 건 시험 1등하는 것보다 힘든 것 같았다. 정국은 진땀을 빼며 말을 돌리기 바빴고 그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태형이 역시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젓다 저의 옆에 서있는 지민을 바라보다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전정국이 친구로 여기기로 했음 나도 친구로 여겨야지. 단순한 이유였다. 지민은 정국과 탄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태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제 어깨에 둘러진 팔을 한 번 쳐다본 후 그 손을 쳐냈다.
" 친한 척 하지 말지. "
" 왜? 우리 친한 거 아니었어? "
" 아까 나 존나 야리던 거 못 본 줄 아냐? "
" 앗. 들켰넹. "
몰래 야린 건데. 배시시 웃던 태형이 다시끔 지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또다시 쳐낼 줄 알았던 지민은 딱히 별 다른 반응없이 그 손길을 받아냈다. 그래. 제 겉모습을 보며 좋아하는 속물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제 속모습까지도 거리낌 없이 받아줄 진짜 내 사람을 찾으면, 그러면 된 거다. 지민은 고개를 숙이며 피식 웃음을 터트리다 어느새 저만치 앞서 가며 여전히 쩔쩔 매고 있는 정국의 옆에 있는 작은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래, 진짜 그거면 된 거다.
" 뭘 혼자 웃어? 옆에 있는 사람 지리게. "
" 그냥. "
" 그냥? "
" 친구 생기면 이런 기분인가 싶어서. "
" 뭐야, 그 존나 찐따같은 발언은? "
태형은 짖궃게 웃으며 지민을 볼따구를 잡아당기다 정강이를 걷어차이고 나서야 손을 거두었다. 남들보단 조금 더 특별하고 요란스러운 성장통을 제법 잘 넘긴 것 같았다. 평생 끝도 모르게 이어갈 그 아픔을, 같이 나눠줄 것 같은 이들이 생겼다. 지민의 그거면, 그거 하나면 만족했다.
아프면 어때. 존나 슬프면 어때. 한 번 사는 인생 나도 한 번 좆같이 살아봐야지.
* * *
으어 저 너무 늦은 것 같은데 매우 쳐 주세여1!!!! 사실 급 완결 느낌 나는 것 같은 거 기분 탓이에요. 왜냐면 다음 편이 완결이거든여.
아마 태형이 시점으로 이야기 풀 것 같아요. 정국이랑 탄소를 제 3자가 봤을 때를 쓰고 싶거던요. 전 진짜 머냐 지금 나오는 노래!
진짜 꼭 한 번 써보고 싶었는데! 성장통! 이 단어도 진짜 써보고 싶었거든요. 끼워 맞춘 것 같겠지만 음음음. 아닙니다. 이 글 자체가
성장통을 겪는 이야기를 다룬 거기 때무네! 아픔이란 아픔은 다 끌어 모아 놓았죠, 사실상 글 주인공은 정국이랑 여주가 아닙니다.
정국이랑 지민이 ㅎㅅㅎ 성장통을 겪고! 한 번 좆같이 살아보자! 라는 마인드로 억압 받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그런 거랍니다ㅎ
암튼! 다음 완결 편에 그런 이야기를 좀 담아볼게요.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