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on ice 下
w.피자피자
그를 뒤돌아 가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분명 선수단 숙소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이었던 것 같은데 어두컴컴한 길을 혼자 걸으니 여러 감정들이 늘어져 더욱 길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난 그날 밤 엉엉 울며 숙소로 돌아가 잠에 들었고 한 세 시간 쯤 자고 일어난 지금의 내 몰골은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상태였다. 급한 대로 숟가락을 냉동실에 넣어 차갑게 만든 뒤 눈 주위에 갖다 대보기도 했지만 별 다른 효과는 없었다. 거울을 보고 또 봐도 답이 안 나오는 상태에 결국 마스크에 후드집업의 모자를 눌러써 대충 가리곤 식당으로 향했다.
“헥, 야 너 얼굴 왜 그래.”
“닥쳐, 좀.”
하얀 접시에 대충 풀떼기 몇 개를 담아와 제일 가까이 있던 자리에 앉았다. 하필 그 자리에 하루라도 장난을 걸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이동혁이 있었고 당연하다는 듯 내 얼굴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정강이를 몇 대 까고도 남았을 텐데 오늘은 그럴 기력조차 없어 그저 조용히 욕을 내뱉었다.
“무슨 말을 못해. 너네 내일 경기 아니야?”
“아, 왜 너네야. 좀 따로 불러주면 안되냐?”
그가 좋다는 마음과 비등비등하게 올라온 미운 마음에 당연하다는 듯 너네라는 단어로 묶여져 불리는 것도 싫었다. 가뜩이나 체중 관리에 당장 내일 있을 경기에, 결정타로 어제 자 벌어진 상황 덕에 예민의 극치를 달하고 있던 나인데 저렇게 친절히 건드려 주시니 화가 안 날 리 없었다. 결국 난 전 세계 선수들이 다 모여 있던 식당에서 아삭한 양배추를 씹다 말곤 그에게 소리를 버럭 질러버리고 말았다. 동혁이는 그런 날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도로 식판에 집중했다. 밥을 더 먹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지금 시간이 아니면 뭐 제대로 챙겨 먹을 시간이 없을 줄 알기에 애꿎은 샐러드를 괴롭혔다.
“야, ㅇㅇ야.”
“왜.”
“너네 싸웠지.”
“뭐래.”
“아까 나재민도 표정 진짜 구리던데. 잠도 못 잔 것 같더라. 다크로 온 얼굴 다 덮을 기세였어. 너네 내일 경기 잘 할 수 있겠냐.”
걔가 왜? 심란한 건 내 쪽이 훨씬 클 텐데 도대체 걔가 왜? 갑작스런 물음표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포크로 쿡쿡 찍은 덕에 여기저기 구멍이 나있는 양상추를 입에 쑤셔 넣었다. 양상추는 수없이 곱씹어 단물은 다 빠진지 오래였지만 복잡한 머릿속은 더욱 얽히고 설 킬 뿐 이었다. 그 와중에도 잠을 못 잔 것 같다는 그가 걱정 되는 내 모습에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몰라. 알아서 되겠지. 너 경기 오늘 아니야? 하키 오늘이라 그랬던 것 같은데.”
“어, 오늘.”
“근데 뭐 이리 태평해.”
“어차피 우리가 이겨. 그러니까 내 걱정 그만하고 재민이랑 빨리 풀기나 해라. 나 간다-”
“가라-”
모닝빵을 입에 물곤 내 머리를 꾹 누른 뒤 멋있는 척을 하며 식당을 빠져나가는 동혁을 향해 소리쳤다.
“야, 나 머리 안 감았는데!”
“미친, 존나 더러워. 좀 감고 다녀라!”
오만상을 지으며 제 손을 유니폼에 슥슥 문대는 동혁에 식당 안의 사람들 몇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 또한 식당으로 내려오기 전 보단 훨씬 나아진 기분에 버리려던 샐러드를 대충 입에 넣곤 퇴식구로 향했다. 접시들끼리 부딪혀 나는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꽤나 큰 소음을 만들어냈다. 나도 모르게 찌푸린 미간을 풀며 출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때, 내 발 앞으로 같은 디자인의 크기만 조금 더 큰 운동화가 길을 가로막았다. 거무튀튀한 눈이 묻은 곳까지 익숙한 그 신발의 주인은 다름 아닌 그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고개를 들까 말까 하는 고민을 수 없이 했지만 곧 그의 손에 의해 들려진 고개에 쓸 데 없는 고민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내 턱을 조심스레 감싸 올려 마주한 그의 얼굴은 아까 전 동혁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온 몸으로 ‘나 피곤해요.’ 를 나타내고 있는 그에 또 다시 그를 걱정하는 마음이 비집고 나왔다. 잠시 서로의 눈동자에 서로를 담았을까, 그의 얇은 입술이 먼저 열렸다.
“다친 덴."
그 열린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다름 아닌 내 상태를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술에 취해 숙소는 잘 찾아 들어갔을까 걱정이었겠지. 안 봐도 선한 그의 모습이었다. 넌 정말, 미워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없어.”
걱정, 고작 그 한마디에 다 풀린 마음과 달리 쌀쌀맞은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는 이런 나를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별 다른 반응이 없이 턱을 쥐었던 손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할 말 있어.”
"난 없어. 너랑 이렇게 얼굴 마주하는 것도 힘들어."
"..."
"간다. 이따 봐."
단호한 내 어투에 한숨을 내쉬며 나를 스쳐 지나가 힘없이 배식대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몸을 틀어 링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그가 하겠단 말이 부정적인 방향일까 두려워 도망쳤다고 정의하는 것이 맞는 쪽일 것 같다. 몇 년을 좋아했던 그 마음이 그의 한 마디에 의해 와르르 무너져 버릴까봐, 그것이 무서웠다. 겁에 질린 난 오늘도 이렇게 내 감정을 숨겨냈다. 몇 년 간 그를 혼자 짝사랑하며 생긴 버릇이었고 그 버릇은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또 한 번 내 감정이 곪아버린 그 날은, 수 십 년을 준비한 올림픽 경기 하루 전 이었다.
***
수많은 카메라와 중계석, 취재진, 관객들. 전 세계의 중심이 이 곳, 링크장에 모여 있었다. 올림픽 자체도 끝나가는 시즌이라 관중석 곳곳엔 손수 제작한 플랜카드를 든 동료선수들도 보였다. 한 팀, 한 팀 끝나갈 때마다 점점 올라가는 안무 수준에 경기장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라 어느새 두 팀만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우린 일주일 전 쇼트 프로그램을 1위로 마쳐 맨 마지막이었고 2위를 차지한 러시아 팀의 경기가 막 시작되었다. 별 실수 없이 빙판 위를 뛰노는 그들의 모습에 괜히 긴장이 되었는지 내 손엔 땀이 흥건했다. 허벅지 춤에서 짧게 나풀거리는 의상도 꼭 쥐어보았지만 자국만 남을 뿐 별 효과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결국 반 포기 상태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만 반복하던 내 손이 누군가에 의해 빼앗겼다.
"..뭐,"
"가만히 있어. 너 이 상태로 경기 들어가면 손 미끄러져."
그였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놀란 나는 손목을 비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빼내려했지만 성인 남자의 힘을 이길 리는 만무했다. 그는 내 손목을 더욱 꽉 잡아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하얀색 손수건으로 손바닥에 맺혀있던 땀을 닦아냈다. 그가 내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다.
"ㅇㅇㅇ."
"..."
"대답."
"왜."
"끝나고 할 이야기 있어. 도망가지 마."
"내가 언제 도망을 갔어."
"..."
훈련을 제외하곤 할 이야기가 있다는 그를 내내 피해 다닌 내가 뻔뻔하게 나오니 땀을 닦다말고 고개를 들어 삐딱하게 날 내려다보는 그였다.
"아, 알았어. 안 가."
절대 잔뜩 굳은 그의 표정이 무서워서 안 가겠다고 한 건 아니다. 내 대답이 나오자 때마침 러시아 팀의 경기가 끝났고 꽤 큰 함성소리와 박수소리로 경기장이 메꿔 졌다. 점수 또한 평소 그들이 받던 점수보단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았다. 감격에 겨워 서로 껴안고 뽀뽀하고 난리가 난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내자 그가 보였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내 손은 그 위에 살포시 얹어졌다.
"대한민국의 나재민, ㅇㅇㅇ 선수."
우리의 이름이 호명되자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빙판 한 가운데로 날 이끌었다. 그의 한쪽 손이 내 허리를 감은 채 이마를 맞대었다. 그의 앞머리가 내 이마께를 간지럽혀 괜한 미소가 새어나오자 그의 입 꼬리 또한 약한 호선을 그렸다. 삐- 소리와 함께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악이 진행되면 될 수록 빙판에 서기 전까지 긴장 가득했던 내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 심장은 요동치고 있었다. 리프트나 스핀을 위해 그와 가까이 마주할 때 마다 보이는 눈빛이 너무나도 달았다. 사랑스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그에 난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지도 못한 채 경기를 이어나갔다. 고난도 리프트, 점프, 스핀 등 짜여져 있던 기술들은 모두 깨끗하게 끝이 났고 엔딩만이 남아있었다.
악기 소리들이 점점 잠잠해지며 그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내게 다가와 한 손은 허리를 한 손은 내 목 뒤를 살며시 감싸 안았다. 더욱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눈빛은 여전히 달다 못해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내 얼굴은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졌겠지, 하는 생각에 괜한 부끄러움이 몰려왔을 때 빰- 하는 악기 소리와 함께 음악이 끝을 맺었다. 그리고 그 순간, "미안." 한 마디와 함께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갑작스런 입맞춤에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관중석에선 전 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박수 소리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내겐 그의 목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도망가지 마."
잠시 마주했던 입술을 떼곤 삐져나온 내 잔머리를 넘겨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난 그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또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 위에 다시 한 번 내 손이 얹혀졌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 또한 잡은 손에 힘을 줬다는 것, 그 뿐이었다.
***
결과는 금메달이었다. 쇼트 1위에 프리 1위였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어딘가 시원섭섭한 기분도 뿌듯한 기분도 공존했다.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올림픽 금메달이 이렇게 단번에 끝나버릴 일이였나 싶어 조용해진 경기장 복도에 기대 목에 걸린 메달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밝게 빛나는 금빛에 조그마한 금빛이 합쳐져 물결을 자아냈다. 언제 갈아입었는지 편한 트레이닝 복 차림의 그가 내 옆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그가 왔다는 것을 눈치 채자 아까 전 입맞춤이 다시 떠올라 고개를 푹 숙였다. 그저 홧김에 한 입맞춤이었을까봐, 마음 가지고 장난치는 것일까 봐, 다양한 고민들에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ㅇㅇㅇ."
"..."
"ㅇㅇ야."
내 옆을 지키던 그가 두 발자국 움직여 내게 안기던 노을들을 가려냈다. 이어 그의 입술에서 내 이름이 새어나왔다. ㅇㅇㅇ, ㅇㅇ야. 내 이름이 이리도 달콤했던가. 곧 녹아버릴 것 같아 더욱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 안 볼 거야?"
"..아, 좀. 너 같으면 제대로 보겠,"
궁시렁대던 내 목소리는 금세 갈 길을 잃고 말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내게 맞추어 제 고개를 꺾어 내려 진득하게 입을 맞춰오는 그 덕에. 경기장에서 보다 배는 진한 입맞춤에 다리에 힘이 풀리려하자 그는 내 허리를 단단히 받쳤다. 분명 키스는 아니었지만 남자를 만나본 경험이 적은 내겐 꽤나 진한 입맞춤이었다. 메달끼리 부딪혀 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고 그는 살짝 고개를 떼어냈다. 그의 입 꼬리가 짙은 호선을 그렸다.
"너 그날 가고 생각 많이 해봤는데, 훈련이고 뭐고 그냥 내내 너 우는 것 밖에 생각 안 났어. 숙소는 잘 찾아갔을까 걱정도 되고, 신경 안 쓰고 자려고 눈 감아도 너 얼굴 밖에 안 떠올랐어."
"..."
"이거 좋아하는 거 맞지?"
"..."
"아니야? 난 맞는 것 같은데, 당사자가 아니라면 뭐."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이며 장난스레 웃은 뒤 내게서 등을 돌리려는 그의 소매를 꽉 붙잡았다.
"너 또 장난치는 거 아니지?"
"좋아해."
"어?"
"좋아한다고. 나 진짜 생각 많이 했다?"
나 잘했지? 하는듯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는 그에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딱 그 다운 고백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나재민. 그 자체였다. 내 입 꼬리 또한 호선을 그리자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제 목에 걸려있던 메달을 빼내 내 목에 걸어준 뒤 엄지손가락으로 내 볼을 살살 쓸었다.
"너 덕분에 딸 수 있었던 거야."
"무슨.."
"고마워."
"아, 낯간지럽게 갑자기 왜 그래."
"좋아해."
"어?"
"사귈래?"
대답 대신 고개를 두 어 번 끄덕이자 그가 날 꽉 껴안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비치는 하늘을 수놓은 별빛들과 그의 품에서 은은히 풍기는 샴푸 향이 아름다운 선율과 같은 조화를 이루었다. 곪았던 감정들이 깨끗이 씻겨 내려가 밤하늘처럼 빛나던 그 날은 올림픽 금메달과 n년 간의 짝사랑 청산, 두 가지 소원을 모두 이룬,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완벽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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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보니 거지같군요...이런 것도 글이라고 어휴..이번 글의 포인트는 홀리 듯 여주한테 뽀뽀한 재민이 헤헿 근데 망한 것 같아요..
아 저번글도 초록글에 올라갔어요!!!!!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당!!! 그나저나 드림이들 엔라라니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저 죽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재민이가 보고싶은 밤이에여...아니 무슨 이런 아무말이 다 있지..댓글은 제게 큰 힘이 돼요!!!! 사랑합니당 여러분!!!! 마지막 첫사랑이랑 온에어도 금방 가져올게용!!! 암호닉은 항상 신청 받고 있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