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작가 그렇게 안 봤는데 음흉하네요.
코 끝이 모니터에 닿을정도로 화면에 얼굴을 처박고있던 경수가 의아한 표정과 함께 통유리 너머의 종인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종인이 편의점에서 사온 것으로 추정되는 샌드위치를 흔들어보였다. 경수는 저도 모르게 종인과 같은 편의 손을 들어 흔들었다. 무슨 행동일까. 게스트로 오는 아이돌의 팬들이 서포트로 보내준 간식거리라면 인증하는구나 생각했을테지만 지금 종인의 행동은 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더러 음흉하다는 말을 하면서 샌드위치를 흔든다... 경수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내가 샌드위치를 가지고 대본을 쓴적이 있던가 생각했다.
벽화 비둘기의 주파수 02
w. 비옴 (viomm)
꽃이 피는 걸 질투하는 못된 심보의 바람은 유난히도 추위에 약한 백현을 괴롭혔다. 늦겨울의 날씨가 아직 가시지 않은 고등학교 입학식은 그다지 넓지 않은 운동장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안아줘?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생판 처음 보는 얼굴은 일렬 종대로 서있는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단정히 교복을 갖춰입고는 추워서 이를 악 물고 떠는 백현을 커다란 눈으로 훑어보듯 내려봤다. 바로 옆 줄, 바꿔서 말하면 바로 옆 반의 박찬열과 변백현의 첫만남이었다.
“야 박찬열.”
“응.”
“너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
“무슨 냄새?”
“약간 좀, 구리구리한 냄새.”
“아 그거. 홀아비 냄새.”
“좀 퀘퀘한 냄새.”
“우리 엄마도 내 방 문 열면 맨날 그 소리 해.”
사춘기면 다 나는 냄새야. 찬열은 스프링으로 엮인 무제 노트에 의미없는 낙서를 했다. 백현은 그런 찬열을 보며 사춘기 소년의 호르몬에서 비롯된 냄새라고 하기엔 조금 더 숙성된 것 같다고 냄새론을 펼치려다가 그만 두었다. 손에 쥔 볼펜으로 대충 몇 번 끄적인 것 같은데 그럴싸한 그림이 완성되었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한 재능이다. 백현이 찬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야. 내 얼굴 그려봐.
“못 생겨서 그리기 싫은데.”
“매를 벌지?”
앉은 찬열의 정수리를 살짝 비껴 때렸지만 그다지 아픈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찬열은 괜히 얼굴을 찡그려가며 아프다는 엄살을 피웠다. 백현이 찬열을 재촉했다. 야 빨리 그려봐. 찬열이 백현을 스치듯 슥 보더니 펜을 쥔 손목을 유연하게 몇 번 움직였다. 새를 단순화시킨 캐릭터 같았다. 부리에는 작은 잎사귀를 물고 있는 새를 들여다본 백현이 물었다. 이게 뭐야. 비둘기? 내가 비둘기 닮았냐?
“응.”
“…….”
“뻥이고.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그린거.”
“뜬금없이 이게 왜 생각이 나.”
“좋아하니까.”
툭 던진 찬열의 말에 장난기 어린 백현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너 비둘기 좋아해? 이렇게 되물어야하는데 말이 나오질 않아 어버버거리고 있는데 찬열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얘가 평화의 상징이잖아. 나 옛날에, 초등학생땐가 여름성경학교 잠깐 다닌 적 있거든. 공짜로 수영장 보내준대서. 어쨌든 그 때 거기서 재밌는 얘길 듣고 온 게 있어. 노아의 방주 알지? 물난리 나서 세상에 있는거 다 죽었는데 그 방주 안에 들어간 사람하고 동물만 산 거. 원래 그 때 비라는 게 안 내렸는데 신이 노아한테만 알려줬대. 너 살려줄테니까 방주 만들라고. 그래서 노아가 방주 만들면서 비 온다고, 비 존나 많이 와서 너네 다 죽는다고 죽기 싫으면 같이 방주 만들어서 타자고 그랬는데 사람들이 미친놈 취급을 했대. 근데 그 미친놈 말이 사실이 된거지. 노아네 가족 빼고 세상 사람들이 다 죽고.
물난리가 났는데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기 갇혀있으니까 밖이 어떤 상황인지 존나 모르잖아. 그래서 어떤 새랑 비둘기한테 정찰을 시켰대. 비둘기가 귀소 본능이 있댔나. 아무튼 비둘기가 돌아왔는데 걔 입에 무슨 풀때기가 물려져 있었다는거야. 밖에 물이 다 빠지고 이제 풀때기 난다 이거지. 비둘기가 물어온 풀이 재앙이 끝이 났다는 걸 알려준거래. 그래서 걔가 평화의 상징이 된거고. 난 그래서 비둘기가 좋다. 기회가 되면 키워보고 싶은데 어릴때 페릿 키운게 죽은 충격이 너무 커서 그러진 못하고 있다. 근데 너 아냐? 난 누구랑 싸우는 거 진짜 싫어해. 빈 종이에 그림을 그리며 말을 이어가던 찬열이 고개를 들어 백현을 쳐다보았다. 살짝 벌려진 입술의 백현이 곧 찬열에게 핀잔을 주었다.
“나는 뭐 싸우는 거 좋아하냐?”
“…….”
“그리고 나도 노아의 방주 얘기 알거든?”
너도 여름 성경학교 다녔냐? 되묻는 찬열의 말 끝에 쉬는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백현이 찬열의 팔뚝을 잡아 흔들었다. 야, 내 얼굴 한 번 그려보라니까? 너 그림 잘 그리잖아. 철부지 아이가 떼를 쓰는 듯 하는 행동에 찬열이 백현에게 손을 내저었다. 이따가. 수업 끝나고. 종 쳤어 빨리 너네반 가.
입학식날 처음 안면을 트고, 말을 트고, 새학기가 시작된지 채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마치 중학교에서부터 같이 올라온 사이처럼 친해진 백현과 찬열이었고, 백현은 쉬는시간이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찬열의 반에 놀러와 시시껄렁한 농담이라도 하고 가곤 했다. 사교성도 좋은데다가 자기 반이라되 되는 것처럼 뻔질나게 드나들다보니 같은 반이 아닌데도 백현은 찬열의 반 아이들과 대부분 친한 사이였다. 개중에 경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사가 들어오고 나서야 헐레벌떡 찬열의 교실밖으로 나가는 백현의 뒷모습을 눈에 담은 찬열이 교과서를 펼쳤다. 그 옆에는 아까 그림을 그리던 노트를 한 장 넘겨 펼쳐놓았다. 흰 종이가 있었다. 찬열은 거기에 백현의 얼굴을 어떻게 그려넣을지 생각했다. 지리교사가 동력자원을 열심히 설명하던말던 수업시간 50분 내내, 찬열은 흰색의 종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한시간에서 십분이 모자란 그 시간동안 넋이 나간듯 가만히 있던 찬열은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고 그제서야 손등위에 힘줄이 불거지도록 힘을 꽉 준 손으로 펜을 쥐었다. 꽤나 신중을 기울이는 그림은 비교적 단순한 곡선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그림을 그려내고 스프링에 철되어있는 종이를 뜯어낸 찰나에 어김없이 백현이 찾아왔다.
“다 그렸어?”
“방금 막.”
“……이게 뭐야.”
“왜?”
“이걸 내 얼굴이라고 그린거야?”
“응.”
“내가 꼼데가르송이냐?”
백현이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찬열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를 뺏어와 제 얼굴 옆에 비교하듯 나란히 두었다. 똑같은데? 백현의 행동에 능청맞게 찬열이 대답했따. 이거 하트잖아. 응. ..하트가 내 얼굴이야? 왜?
“그냥. 생각나길래.”
“야, 내가 무슨 비둘기도 아니고….”
“너 생각하면 하트 생각나길래.”
“…….”
“너 하트야, 백현아.”
“그게 무슨 말인데?”
“내 마음이자 니 얼굴.”
어때. 좀 감동?
유리컵에 담긴 물에 어쩌다보니 기름이 튀었다. 동그란 액체 위에 또 동그란 액체가 동동 띄워져있다. 백현은 꼭 자신이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접시에는 노릇하게 구워진 전이 차곡차곡 쌓여있었지만 백현은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유리컵을 잡은 손목을 돌리면 컵 안의 물이 찰랑이면서 그 위의 기름방울은 여전히 동동 띄워져만 있다. 찬열이 한 말이 하루종일 머릿속에서 그렇게 둥둥 떠돌았다. 식탁 의자에 앉은 몸도 덩달아 붕 뜬 기분이었다. 백현은 휴대폰을 키패드를 꾹꾹 눌렀다.
여보세요, 박찬열. 뭐하냐? 뭘 또 그냥 있어. 얘는 맨날 전화만 하면 그냥 있대. 아니 그게 아니고. 야. 너는 내가 왜 맨날 너네 반 가서 너랑 노는 줄 아냐? 나 왕따 아니거든? 쳐맞을라고. 너한테 구린 냄새 나서 너 왕따될까봐 미리 가서 챙겨주는거야. 진짠데. 어, 맞아. 사실 뻥이야. 나는 그냥 니가 제일 편해서 그런건 줄 알았거든. 근데 오늘 알았어. 뭐냐면. 너. 챙겨주고 싶어. 잔소리가 아니라 야, 이게 그런게 아니라고. 단순하게 챙겨준다는 게 아니야. 설명하자면 좀 애매해. 알 필요 없고 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따라해봐. 빨리. 왜긴. 들어야 하는 말이니까 그렇지. 아 놀리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방금 한 말 말고! 아오! 장난칠래? 이 다음 말부터 따라해.
“변백현.”
- 변백현.
“나.”
- 나.
“너.”
- 너.
“좋아해.”
- ……좋아해.
“찬열아.”
- …….
“나도.”
메뉴로 나온 오므라이스를 오물거리는 입이 느렸다. 점심시간대의 학관 식당은 여느때와 같이 분주했고 소란스러웠다. 시험이 끝난 여고생들이 견학이라도 왔는지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 무리가 백현의 옆자리에 한뭉텅이로 앉아 시끄럽게 조잘댔지만 백현은 개의치 않았다. 허공에는 손에 쥔 수저가 떠있었고 백현의 시선이 닿아있는 전공책은 팔랑거리며 넘어갔다. 비어있는 백현의 앞자리에 누군가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여기 있을 줄 알았지. 그러고 밥이 넘어가요?”
“…….”
“다른 형들은?”
“의리없게 자기들끼리 먹고 갔어.”
차라리 이게 나아.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무심히 되돌아오는 답에 세훈이 건조하게 웃었다. 쌤. 백현을 부르는 소리에 흘깃 눈만 치켜떠 세훈을 쳐다보자 세훈이 몸을 앞으로 쭉 빼고 입을 쩍 벌렸다. 한입 달라고? 백현이 묻자 세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백현은 쥐고있던 수저를 달걀지단이 덮어져있는 밥알 사이에 푹 쑤셔넣고는 그릇을 세훈쪽으로 밀었다. 그냥 너 다 먹어. 그 반응에 세훈이 시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또 이런다.”
“…….”
“이러지 말고 나가서 밥 같이 먹을래요?”
“…….”
“아아, 쌤. 대답 좀.”
앞머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활자에 다시 시선을 두던 백현이 인상을 확 찡그렸다. 그 칭호 좀 고치면 안돼?
“왜요.”
“대학도 들어왔으면서 왜 자꾸 선생님 타령이야.”
“쌤이 대학 오게 해줬잖아요.”
미간에 내 천자가 새겨질 것 같았다. 세훈은 손을 뻗어 더 깊게 좁혀진 백현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런 표정 지으면 불독돼요. 백현을 신경써주는 행동이었지만 백현은 그런 세훈에게 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 괴롭히지 말고 동기들이랑 놀아.”
“걔넨 별로.”
“…….”
“나 근데 쌤 안 괴롭혔는데.”
빈들거리는듯한 세훈의 반응에 백현이 두터운 전공책을 소리나게 덮었다. 여고생들 무리의 시선이 한꺼번에 와닿는것이 느껴졌다. 세훈이 그쪽을 흘끔 쳐다보고는 이내 가방을 싸는 백현을 따라 일어났다. 몇 입 먹지도 않고 남긴 백현의 식판을 들고 선 세훈이 백현의 옆에 나란히 섰다. 식기를 반납하는 세훈을 기다려주지 않고 보폭을 빨리 해 식당을 빠져나가는 백현을 세훈이 뒤쫓았다. 형! 백현이 형! 그제서야 호칭을 바꿔 부르는 세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백현은 또 인상을 찡그렸다. 그저께 낮에 연락하지 말라고 쐐기를 밖아놨는데도 오늘 아침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백현아, 깼어? 걸려온 전화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형! 마른 몸이 휘날리듯 백현의 옆에 와 섰다. 오십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설렁거리며 뛰어와서는 마라톤이라도 한듯 힘든척 헥헥대는 세훈을 보며 백현은 콧방귀를 끼었다. 어떻게 기다려주지도 않고 먼저 가요. 볼멘 소리를 하는 세훈이었다.
“형. 오늘 우리집 가요.”
“나 바빠.”
“오늘 강의 다 끝난거 알아요.”
“강의가 없어도 바빠.”
“튕기지 말고 웬만하면 좀….”
“……백현아.”
“…….”
백현은 금세 난감한 낯빛을 했다. 정문으로 향하는 길목에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 찬열이 서있었다. 멀거니 서서 이틀 새에 퀭해진 얼굴로 백현아, 부르는 찬열을 백현은 애써 지나쳤다. 뭐야. 아는 사이예요? 찬열을 보면 옆에 서있는 누군가가 단골멘트라도 되는 것처럼 하는 물음이었다. 세훈이 백현을 쿡쿡 찔렀다. 쌤, 왜 무시해요. 쌤 부르는데. 백현의 소매를 잡아 흔드는 세훈에게 백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눈치를 주었다. 왜 그러는데요. 소근거리는 목소리로 물어오는 세훈에게 이렇다 저렇다 대답은 안해주고 묵묵히 가는 백현의 뒤에 찬열이 따라붙었다.
“변백현. 얘기 좀 해.”
“그만해.”
백현의 어깨에 닿을듯 말듯 하려는 손을 백현이 홱 뒤를 돌아 치워냈다.
“말했지. 연락하지 말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해를 못하겠어.”
“박찬열.”
“…….”
“짜증나. 진짜 짜증나.”
다시 홱 돌아서는 백현이 미련없이 걸음을 옮겼다. 찬열은 백현의 뒤에서 바보같은 표정을 하고 또 뒷모습만 보이는 백현을 보고 서있기만 할 뿐이었다. 안봐도 비디오였다. 백현의 머릿속에 찬열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 상상이 됐다. 그리고는 상황을 관망하던 세훈이 덩달아 어버버거리며 뒤에 멈춰서있는 걸 알고는 백현이 고개를 반만 틀어 소리를 빽 질렀다. 오세훈, 빨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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