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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꽃마리
01.
"됐다, 그냥 일어나."
"... 왜?"
"너 지금 별로 공부 안 되잖아"
"..."
때는 한달 전.
전교 일등을 놓친 적이 없는 이민형에게 공부 못하는 딸래미 틈틈이 과외를 부탁한다며
생판 모르는 사람보단 낫지 않냐며,
용돈겸, 과외비겸 이민형의 손에 자그마치 30만원의 거금을 꽂아준 우리 엄마.
물론, 그렇다고 덥석 받을 이민형이 아니었지만, 우리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30만원은 돌려주고 내 과외만을 약속한 이민형 덕분에
점심시간마다 틈틈이 수학이며 영어며... 평소 담 쌓고 살던 공부를 조금씩 건드려 보는 중이다.
물론... 예상대로 순조롭게 흘러가지는 못하지만...
"밥이나 먹으러 가자."
"어, 그래..."
이민형과 나는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코찔찔이 시절부터 함께해 온
좋게 말하면 소꿉친구, 조금 속되게 말하면 부x친구다.
집도 가까운 편이라 등하교도 같이 하고 있고,
집이 가까운 만큼 서로의 집에도 왕래가 잦았다.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우리 엄마와 이민형의 엄마는 나와 이민형이 어렸을 때부터 유독 친분이 깊으셨고,
지금도 여전히 하루 열두 번도 더 전화든, 직접 만나서든 이야기 꽃을 피우신다.
우리 엄마가 하는 이야기 중 절반 이상이 하나밖에 없는 딸래미 험담이라는 게 좀 마음에 안 들지만...
나나 이민형이나 성격이 그닥 쾌활하고 활발하지는 못한 탓에
서로 다른 친구를 사귀기보단 이렇게 지내는 게 편해서
중학교 때부터 거의 생활을 달리하지 않고 있다.
아무리 그대로 이성지간인데 불편하지 않냐고?
전혀.
아마 아주 오래 전부터 서로 볼 거 못 볼 거 봐 오며 지내온 사이라 그런지
웬만큼 불편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없었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김여주 인생 유일 동성친구 승완이가 있었는데,
고등학교를 오면서 찢어지고 말았다...
그렇다.. 승완이는 예체능이었다... 그것도 현대무용.
승완이는 오래 전부터 희망해 오던 우리나라에서 손 꼽히는 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덕분에 보기 좋게 우리 둘은 갈라졌지만,
김여주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아직도 꾸준히 연락을 하고 지내올 만큼 가까운 친구다.
"너 다이어트 하냐?"
"... 어떻게 알았어?"
"웬일로 고기를 다 남기길래."
진짜 귀신이다, 귀신...
이렇게 촉이 좋으니까 귀신같이 매번 일등을 하지...
가만 보면 무섭다니까...
"그냥 먹지 그래."
"뭐야, 왜 웃어."
"너 다이어트한다고 해서 3일 넘긴 적 없잖아."
"아니야, 이번엔 진짜 해야 해. 이번 주 금요일날 신체 검사 있어."
"금요일까지 빠져 봤자 얼마나 빠진다고..."
"야."
"쏘리."
"조용히 먹자, 쫌. 어?"
저렇게 꼭 한 번씩 시비를 걸어주지 않으면 못 베기나 보다, 이민형은.
금요일날 있을 신체검사 망할 xx 때문에 내 사랑하는 고기들을 눈 앞에 두고도
못 먹고 있다. 디저트로 나온 과일 주스랑 샐러드만 몇 조각 집어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마치 식판에 가지런히 담긴 양념 불고기들이 자신을 먹어 달라며 애원하는 것 같았다...
미안해, 고기들아... 내가 금요일만 지나면 미친듯이 다시 먹어 줄게... 꼭.
"맛있어?"
"응."
아주 흡입을 하는구만, 흡입을.
내가 못 먹으니까 더 신나서 먹는 것 같아.
원래 저렇게 식탐이 많은 애가 아닌데, 오늘은 어째 식판이 깨끗하다.
"이제 가자. 나 다 먹었어."
"그래."
맙소사. 하늘이 너무 예쁘다. 이제 진짜 완연한 봄인가 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교복 위에 사복을 갖춰 입지 않으면 추워 덜덜 떨었었는데.
하늘은 정말 티 한점 없이 맑고 청완했다.
봄내음 물씬 풍기는 선선한 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런 날엔 도시락 싸서 소풍 가야 하는데.
왜 현실은 수업에, 보충 수업에, 야자인지.
정말이지, 대한민국 고등학생은 극한 직업이 맞다.
"좀 걸을까?"
"웬일이야. 너 점심 자습 안 해?"
"그냥, 날이 너무 좋아서."
"저기..."
"네?"
"이거... 받아 주실 수 있으세요...?"
이민형과 운동장 트랙을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초록색 명찰(우리보다 한 학년 아래)을 단 예쁘장한 여자애가
나와 이민형 쪽으로 걸어와선 한손에 걸린 예쁜 선물 가방을 건넨다.
이거 백프로다... 얘 이민형 좋아한다.
아마, 이민형 성격엔 또 단칼에 거절을 하고 매몰차게 돌아서 가버리겠지.
그게 얼마나 여자 마음 찢어지게 만드는 일인데...
내가 직접 경험은 못 해봤지만, 중학교 때 승완이가 자신의 짝남에게 매번 퇴짜를 맞는 것을 두눈으로 직접 목격한 뒤론
왠지 모르게 이민형에게 다가오는 여자애들이 불쌍하게만 느껴진다.
"아, 죄송합"
"그냥 받아."
"아... 감사합니다! 안에 편지도 꼭 읽어 주세요!"
보다 못한 내가 선물가방을 낚아채 이민형 손에 가방끈을 걸어주자
후배는 고맙다며 가벼운 목례를 하곤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건너편 친구쪽으로 달려갔다.
이거... 근데 느낌이 싸한 게 왠지 이민형한테 된통 혼날 삘이다.
"김여주."
"아, 아니... 그렇게 거절하면 너무 미안하잖아."
"이렇게 받고 모르는 척하는 게 난 더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아, 미안해... 그, 그래도 초콜릿은 맛있겠다, 그치. 하하... 하..."
"너 먹든가."
"아, 어떻게 그래! 네가 받은 건데. 저 애한테도 실례야."
"그럼 침이나 닦고 말해."
"침... 나왔어...? 아, 아닐 건데..."
아까 샐러드랑 과일 음료만 먹은 게 내 성에 안 차긴 했나 보다.
스르륵, 소량의 침방울이 내 입가에 흘려 나온 것을 내 육안으로 확인을 하곤
창피한 마음에 아까 급식실에서 조금 집어온 휴지로 입가를 벅벅 닦았다.
"그냥 너 먹어. 나 초콜릿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안 좋아해도 그냥 좀 받아줘라. 이거 받아 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먹기 싫으면 그냥 방에 두고 썩히다 버려. 아무리 그래도 사람 성의가 있지... 가끔 진짜 너무하는 거 알아?"
"..."
아... 내가 너무 화를 냈나...? 아니야, 그래도 나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어.
아니, 근데 내 일도 아닌데... 이건 이민형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 맞는데... 내가 너무 오지랖부린 것 같기도 하다.
"그래, 그럼 그냥 줘."
"어, 어... 여기..."
별것도 아닌 일에 정색까지 하며 말이 세게 나간 게 내심 미안해져서 이민형 눈치를 살살 살피던 와중에,
점심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시간 동아리 시간이래."
"헐, 진짜?"
"어, 왜?"
"너무 좋아서."
각박한 학교 생활 중 유일하게 내가 가장 기다리는 시간, 동아리 시간이었다.
일주일에 딱 한 번 있는 이 시간은 국수영으로 지친 내 심신을 달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는 영화감상 동아리에 들었었고, 이민형은 시사토론 동아리였다.
남들 다 즐기라고 있는 동아리 시간에 저렇게 딱딱한 동아리에 드는 걸 보니 역시 전교권에서 노는 애들은 뭔가
다르긴 다른가 보다. 시사토론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으...
"이민형, 나 먼저 가볼게!"
"그래."
영화감상 동아리는 무엇보다 자리 위치가 중요했다.
어서 가서 되도록이면 세번째 줄, 중간 즈음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맨앞자리는 선생님 눈치도 보일 뿐더러 스크린을 올려다 볼 때 목이 아프기 때문에 피해야 했다.
그렇다고 맨뒷자리도 스크린이 작게 보이기 때문에 피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르고 고른 세번째 줄. 지금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 자리가 꼭 내 자리가 되길 빌었다.
뛰고 뛰어서 도착한 영화 감상반 동아리에는 이미 아이들이 전원 착석을 하고 맨 뒤에 두자리만 덜렁 남아있을 뿐이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학생들이 자그마치 서른 명 가까이나 되었다니...
나는 생각을 조금 뒤늦게 했고,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요했던 것이다...
그래, 내 잘못이지 뭐....
생각보다 큰 스크린에 뒷자리도 나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급하게 반에서 나오느라 달랑 하나만 챙겨온 검정색 펜을 책상 위에 고이 올려두곤 영화 상영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한 학기 동안 영화도 감상하고, 직접 그 느낀점을 글로 표현해 보는 시간을 가지게 된 이윤미라고 합니다.
우리 잘 지내 봐요."
선생님의 간략한 소개가 끝나고 아이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막 영화를 틀어 주려는 듯 선생님께서는 오늘 볼 영화는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영화라며 짧막한 소개를 하시곤,
동아리실 불을 껐다.
그때 마침,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그 소리는 영화 시작의 흐름을 또 한번 깨버렸다.
뒷문을 열고 등장한 남자애는
"죄송합니다."
라는 짧막한 인사를 끝내고 자신이 앉을 자리를 스캔했다.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는 게 당연할 거다... 내가 왔을 때도 이미 아이들이 한가득 자리를 메우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부턴 늦지 마요. 저기 맨 뒤에 자리 하나 남았는데, 거기 앉아요."
잠시만... 맨 뒤에 자리 하나면... 설마....
"..."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그 설마가 이렇게 딱 들어맞을 줄이야...
내 옆자리였다....
작가의 주저리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