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첫사랑_05
w.피자피자
〈!--StartFragment-->
평소와 다름없이 재판 준비로 지샌 주말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내내 입가에 걸린 미소가 떠날 생각이 없었다는 것. 그 뿐이었다. 귀찮을 법도 한 월요일 아침인 지금 조차도 그 생각은 여전했다. 잠에 푹 절여진 몸을 일으킬 때에도, 잔뜩 부은 눈을 겨우 떼어내며 씻을 때에도, 그렇게 귀찮아하던 화장을 할 때에도, 거울로 본 내 입가엔 항시 미소가 걸려있었다. 고작 그의 말과 행동 하나에 내 감정은 하늘을 찌르기도 바닥 저 깊숙히까지 내려앉기도 했던 것이다. 알 수 없는 제 마음에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며 코트에 팔을 집어넣곤 거울을 슬쩍 본 뒤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달칵-
연락을 한 것도,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문을 연 순간 맞은편에서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문을 열고 나온 우리였다. 그와 난 반 쯤 열린 자신의 집 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시선을 교환했다.
"잘 잤어?"
주말 내내 미소를 잃지 않게 해주었던 목소리가 또 한 번 재생되었다. 깔끔한 검은색 수트에 머리까지 넘긴 그에게서 듣는 간밤의 안부인사는 새로운 느낌으로 내게 성큼 다가왔다. 그 다가옴에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던 토요일과 달리 이번엔 나 또한 한 발자국 다가섰다.
"응. 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내 목소리를 듣더니 이내 입 꼬리를 올리며 화답했다.
"나도."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달았다. 그리고 난 그 달콤함에 나도 모르게 스며들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은 발 끝만 살짝 담궈 온도를 체크하는 정도. 딱 그 정도였다. 사실 발을 담그는 행위조차 내겐 큰 고민 덩어리였다. 잠시 머리 아픈 생각을 접은 뒤, 문을 닫고 나오자 삐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양 쪽 문이 잠김을 알렸고 이어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차분히 몸을 실었다.
사람들이 계속 타 점점 좁아지는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좁아지면 좁아질수록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져 옅게 뿌리는 그의 향수 냄새도 맡아질 정도의 거리가 되었다. 월요병에 찌든 사람들에 이리저리 치여 미간에 주름이 잡히려던 순간, 그의 손이 나를 잡아당겨 구석에 있던 제 몸과 내 몸의 위치를 바꿔놓았다. 더 이상 사람들에 치이진 않았지만 내 시야엔 오로지 그 뿐이라는 것이 더욱 큰 문제점이었다. 고개를 들자니 그와 눈을 마주해 얼굴이 붉어질 것 같고,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그에게서 풍겨오는 향수 냄새에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았다. 이러나저러나 붉어지는 얼굴을 감출 순 없겠단 생각에 결국 고개를 홱 들어버렸다. 눈을 마주한 채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는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암묵적으로 이유를 물었다.
"머리 올렸네?"
그를 바라 볼 이유랍시고 급히 찾아낸 것은 고작 시원하게 이마를 드러낸 머리카락뿐이었다. 처음 올린 것도 아닌 머리를 묻자 그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내게 물었다.
"응. 왜? 이상해?"
"아니. 근데 난 너 머리 내린 게 더 좋아-"
"나도 너 머리 말린 게 더 좋네요."
"어?"
그는 내린 것이 더 좋다는 내 말에 고개를 잠시 끄덕이다 아직 물기를 머금고 있는 내 머리칼의 끝부분을 매만지며 말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스킨십에 겨우 참아냈던 열이 확 터져버리고 말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불타오르고 있을 두 볼이 뻔히 그려졌다. 그는 제 눈동자에 분홍빛 볼을 띠고 있는 나를 담아내다 피식, 하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와 함께 내 볼을 톡톡 건드렸다.
"머리 말리고 다녀. 감기 걸려."
때마침 1층을 알리는 엘리베이터 소리에 그를 뒤로한 채 발 빠르게 빠져나왔다. 그 작은 손짓에 부풀어 오른 분홍빛의 몽글몽글한 감정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는 것을 나 혼자만 눈치 채지 못했다.
***
"좋은 아, 뭐야, 아무도 없네."
붉어진 얼굴을 겨우 식혀내며 도착한 사무실엔 차가운 공기만이 나를 반겼다. 어째 바깥보다 더 추운 것 같은 온도에 잠시 몸을 부르르 떨다 코트 주머니에서 웅웅대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 즉 내가 아저씨라 부르는 분이셨다. 이 시간에 무슨 일 이시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ㅇㅇ가 맞니?"
"네! 아침부터 무슨 일 이세요?"
"아 그, 그때 말했던 소개, 받아 볼래? 아저씨 지금 말하려고 하는데."
"아.."
주말의 달콤함에 잠시 잊고 있었던 문제였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아직 선 볼 나이는 아닌 것 같아서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그래그래. 나중에 또 보자-"
"네, 들어가세요."
나는 조금의 텀을 두고 끊겨버린 전화를 잠시 바라보다 바로 이어 민형에게서 도착한 문자에 잡고 있던 문고리를 다시 돌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발걸음을 돌려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법원이었다. 문자의 내용은 그저 사무실 직원이 다 법원으로 출근했으니 바쁜 일 없으면 법원으로 오라는 것이 다였고 그 결과, 지금 난 로비의 한 가운데를 지키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 앞에서 삼십 분 째 멍을 때리고 있었다. 아니, 얘는 재판을 하면 어디서 한다고 말을 해줘야지. 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빠뜨린 문자를 괜히 노려보다 오래 건들지 않아 꺼져버린 화면에 작은 한숨을 내쉬며 가방 속으로 던져 넣었다.
애꿎은 구두 앞 코를 몇 번 괴롭혔을까, 재판 하나가 끝났는지 오른쪽 복도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게 중에는 한 시간 가량 기다리던 민형과 사무실 사람들도 포함되어있었다. 한 마디 할 생각으로 성큼 다가갔지만 승소라도 한 건지 입이 귀에 걸린 민형에겐 차마 화를 내지 못 할 것 같아 그 뒤를 따라 나오는 재현 선배에게 괜한 투정을 부려냈다.
"선배 휴대폰은 폼이에요?"
"아니? 멀쩡히 지 할 일 잘 하는데, 왜."
"그럼 주인이 문제네. 내가 전화를 몇 번을 했는데!"
"전화 안 왔는데?"
"확인 해 봐요."
선배도 나도 쓸데없이 당당했다. 확인 해보라는 내 말에 선배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들었고 화면을 킨 순간 선배의 얼굴에서 당당함이라는 감정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슬쩍 고개를 들어 내 눈치를 살피는 선배를 한 번 흘겨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 눈 째림에 진심은 거의 함유되지 않았다는 걸 눈치 챈 선배는 슬쩍 내 옆으로 다가와 넉살스러운 모습으로 나를 대했다. 나 또한 그들에게 진심으로 화를 낼 심상은 아니었기에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렸다며 투정 아닌 투정만을 부렸다.
"한 시간?"
"응? 아, 어."
재현 선배와 나의 대화에 갑작스레 끼어든 민형의 목소리였다. 어딘가 불만이 묻어있는 목소리였다.
"발목 안 아파? 굽 높은 거 신었잖아."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내가 아프거나 다친 지도 모르고 있다가도 주변에 의해 알게 된다면 그 때부터 온갖 고통이 밀려들어오는 그런 일. 지금의 내 상태가 딱 그랬다. 원래 신던 단화를 빨아 버리는 바람에 힐을 꺼내들었는데, 하필 그 어색한 힐로 한 시간 가량 서 있었으니 발목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고개를 숙여 발목을 보자 아침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일 정도로 부어 있었고 동시에 아릿한 느낌이 몸을 감쌌다. 그러나 난 그 고통을 대놓고 티낼 수 없었다. 워낙 남을 잘 챙기는 민형의 성격과 가끔 호들갑을 떨어주시는 재현 선배의 성격이 합쳐진다면 법원 한 가운데서 업혀 나갈 수 도 있는 불상사가 생길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이 먹을 대로 다 먹어 놓고 그게 무슨 추태야. 난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괜찮아. 밥이나 먹으러 가자"
"진짜 괜찮아? 나 슬리퍼 있는데 바꿔 신을래?"
"넌 재판 오는데 무슨 슬리퍼를 들고 와. 괜찮다니까, 얼른 갑시다-"
"그래도..아니면 업힐래? 차까지만 업어다 줄게."
"잠시 만요. 지나가겠습니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허리를 숙여 부어오른 발목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살펴보다 결국 업히라며 제 등을 보이는 민형의 행동이 또 다른 방해꾼에 의해 저지되었다. 익숙한 향기, 그였다. 괜한 반가움에 미소가 지어지려던 내 입가는 그 익숙한 향기에 더해진 이질적인 향기에 축 처져 버리고 말았다. 더해진 향기는 이질적이었지만 얼굴은 꽤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내 전 재판에서 붙은 변호사, 예쁘장한 얼굴을 지닌 그의 로펌 신입 변호사였다. 온 몸으로 '나 기분 나빠요-'를 티내고 있는 여자의 시선은 오로지 나를 향해 있었고 나 또한 그 눈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를 스파크가 튀었다.
"안 비켜 주실 거예요? 아까부터 계속 길 막고 계신데."
"법원 복도가 그렇게 좁았나요? 빈 공간 많은데, 굳이 다친 사람 있는 데를 뚫고 지나가셔야겠어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옛 속담은 틀린 부분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까칠한 말투로 나를 노려보며 말하는 여자에게마저 상냥하게 대해 줄 능력치는 내게 없었다. 아니, 나 뿐 아니라 아마 모든 사람이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갑작스런 여자 둘의 대립에 남자들은 그저 둘의 눈치만 볼 뿐,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 했다. 딱 한 사람만 제외하곤.
"다친 건 그 쪽 사정이지 저희가 그런 것까지 이해하면서 저 좁은 공간으로 지나가야 되는 건가요?"
이 쯤 되면 그냥 내게 악감정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누가 봐도 넓직한 복도를 보고 좁은 공간이라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그 웃음에 분위기는 더욱 싸해져버리고 말았지만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말은 똑바로 하세요. 누가 봐도 사람 두 명은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인데 저게 그렇게 좁아요? 그리고, 다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진 않더라도 최소한의 배려는 하는 게 맞는 거라고 보는데, 연수원에서 안 배우셨나 봐요."
"무슨 말,"
"ㅇㅇㅇ, 그만 해."
조목조목 따지는 나에 발끈한 여자를 차가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내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그의 입에서 그만 하라며 나온 이름은 여자가 아닌 내 이름 석자였다. 내 시선은 여자에서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로 옮겨갔다. 왜 그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혼란만 안겨주었을 뿐. 동공이 짧게 흔들리며 그를 마주하자 그는 내 시선을 피해 여자에게로 옮겼다.
"신아 씨, 가요."
"ㅇㅇ야, 가자."
두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맞물렸다. 첫 번째는 그의 것이었고, 두 번째는 민형의 것이었다. 두 남자는 서로를 잠시 바라보다 멍하니 서 있는 제 옆의 여자를 끌어 당겨 서로를 지나쳐갔다. 살얼음판 같던 분위기가 깨져버려 거대한 호수를 만들어냈다.
밥을 먹어도, 사무실에 돌아와 재판 준비를 해도, 내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의 옆자리를 차지한 채 콧소리를 흘리는 여자도, 그걸 그저 웃으며 받아들이는 이제노도, 아침과는 상반된 그의 태도도.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그저 갑작스레 바뀌어버린 그의 행동이 미운 것뿐일까. 혹여나 다른 감정이라도 생겨버린 것은 아닐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생각들의 공통점이라곤 내 오랜 친구, 이제노가 주체라는 것. 그 뿐이었다.
"ㅇㅇ야, 너 아까부터 계속 진동 울린다."
"네? 아, 네. 죄송해요."
"왜 이렇게 넋을 놓고 있어."
"그냥, 좀."
걱정이 한 스푼 정도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재현 선배에게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이곤 책상 가장자리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부재중 전화 2통, 문자 3통. 모두 같은 사람에게 온 것이었다. 엄지손가락이 아이콘 위를 잠시 헤매다 이내 홀드 버튼으로 향했다. 이유야 어찌됐던 무엇이건 지금 난 발신자의 연락을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누구 때문에 일도 제대로 못 했는데, 이렇게 냉큼 받아버린다면 마치 내 머릿속이 그로 가득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릴까 두려웠다. 까매진 화면에 내 얼굴이 비추었다. 혼란스러움이 가득히 차 있었다.
***
그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무시한지도 나흘 째. 어제 아침 이후론 더 이상 그에 의해선 휴대폰이 울리질 않았다. 그와 친구라는 개념으로 휴대폰에 서로의 번호가 저장되고 난 뒤로 처음 끊긴 연락이었다. 연락이 끊기니 당연스레 출퇴근도 각자 하게 되었다. 고작 4일 혼자 다녔다고 그새 익숙해진 혼자만의 출근길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출근과 등교로 바쁜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도 꽤나 재미있는 일과였고 오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법원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어 이어폰을 꽂았다.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라디오 디제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마지막 곡은 6916님이 신청해주신, 어쿠스틱 콜라보의 묘해 너와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바쁜 출근길, 등굣길을 걷고 계실 청취자 여러분. 하루도 화이팅!'
발랄한 목소리를 끝으로 잔잔한 기타 선율이 이어졌다. 디제이와는 상반된 나른한 목소리로 가사를 읊어 내려가는 가수의 목소리는 마치 시인과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한 자, 한 자. 노랫말이 진행 될 수 록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난 노래를 끝까지 듣지 못한 채 이어폰을 빼버리고 말았다. 힘없이 늘어진 하얀 선들이 머릿속에도 가득했다.
땅땅-
판사의 재판봉 소리가 법정 내에 울려 퍼졌다. 이에 맞게 자료 정리도 끝이나 고개를 들자 맞은 편 변호인석엔 익숙하지만 한편으론 어색한 얼굴이 앉아있었다. 내가 골라준 것으로 기억하는 검은 수트를 빼입곤 제 앞에 놓인 서류를 만지작거리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판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내게 시선이 꽂히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판사의 입이 열릴 때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검사 측, 입론 시작해주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피고인석으로 향하자 그의 시선 또한 옮겨져 갔다. 나는 진득하게 붙어오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피고인에게로 동공을 고정시킨 후, 입론을 시작했다. 꽤나 순종적인 피고인의 태도에 매끄럽게 진행 되는 듯 했으나 이 또한 잠시의 행복이었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검사 측이 제시한 증거는 출처가 불분명해 증거로서의 자격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글로 옮긴 것은 두 마디 정도였지만, 체감 상으론 내 말 끝 마다 사소한 것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듯 했다. 사실 모든 재판이 상대의 말에서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내 이어나가는 작업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내 기분이 언짢은 것은 그저 상대가 그라는 이유, 그 뿐이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 더욱 복잡해져가는 머리였다.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문 재판은 검사 측, 즉 나의 승소로 끝이 났다. 분명 이기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왜인지 내 기분은 꿀꿀하기 그지없었다. 방청을 온 사람들과 판사들 모두 빠져나가 시끌시끌하던 법정 내부는 정적만이 흘렀다. 꽤나 오랜만에 찾아 온 고요함에 나는 잠시 눈을 감은 채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긴장이 쭉 풀리는 느낌이었다.
“ㅇㅇㅇ.”
“...”
그 고요함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에게 잠시나마 쳤던 옅은 유리벽을 고작 내 이름 한 마디 부르는 것으로 무참히 깨뜨려버린 그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뜨고 싶지 않던 눈을 느릿하게 떠 보이며 변호인석에 삐딱하게 앉아있는 그를 마주했다.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과 단정하지 못 한 그의 모습에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다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그와 나는 서로의 모습을 빤히 담아내기만 할 뿐,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에겐 익숙지 않은 어색함을 못 이긴 그의 입술이 열리려던 순간,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재판 잘 했어?”
“아, 응. 이겼어.”
그 무언가는 물건도, 그저 지나가는 행인 1도 아닌 민형이었다. 검사 측 탁자에 기대어 다정한 질문을 던지는 민형에 그의 눈썹이 살짝 씰룩였다. 무언가 거슬리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왜 그 버릇이 나와 민형에게서 보여 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의 기분이 좋은 편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민형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눈썹이 전보다 조금 더 크게 일렁였다.
“수고했네. 밖에 비오던데 우산 있어?”
“우산? 아니.. 비 온다는 소리 못 들었는데.”
“소나기인 것 같긴 한데 엄청 퍼부어. 가자, 데려다줄게.”
민형은 내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나를 법정 밖으로 이끌었다. 힘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 차에 올라탄 채로 본 하늘은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집으로 돌아와 대충 씻고 노트북을 몇 번 두드리자 어느새 회색빛 하늘은 검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새까만 도화지를 그려냈고 무섭게 쏟아지던 비는 아주 조금 잦아들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약한 빗줄기가 떨어지는 일정한 소리에 요 며칠 간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차츰 정리되어가는 듯 했다.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제자리걸음인 덕에 넋을 놓고 있으면 자꾸만 떠오르는 그의 잔상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애써 지워내려 이미 완성 된 서류를 괜히 고치고, 또 고쳐냈다.
네 번째 수정 작업을 들어갔을 쯤,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내 정신을 깨웠다. 인터폰 너머로 본 현관밖엔 원인인 그가 서 있었다. 문을 열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짧은 시간에 수많은 내적 갈등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머리와 다르게 손은 이미 문고리를 잡아 돌리고 있었다. 찰칵-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뭐야, 너 비 맞았어?”
피로에 눈이 반 쯤 풀려있던 내 앞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두 눈을 말똥말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우산은 어디다 버리고 온 건지 비에 젖어 머리칼은 촉촉이 물기를 머금고 있었고 그의 향기엔 옅은 알코올 냄새가 더해져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며칠 간 그에게 가졌던 미움이라는 감정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저 위태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그가 걱정될 뿐, 다른 마음은 없었다. 걱정이라는 감정이 내 모든 것을 지배하자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산 안 가지고 갔어?”
“올 줄 몰랐어.”
“그럼 차는? 지하 주차장에 대고 바로 올라오면 되잖아.”
“오늘 차 안 끌고 갔어.”
“그럼 연락이라도 했어야지! 왜 그걸 다 맞고 와. 그리고, 우산이 없으면 집이라도 빨리 들어오든가 술은 왜 마셔?
“...”
“..기다려. 수건 가지고 올게.”
현관문에 기대어 있던 그를 등지고 수건을 가지러 욕실로 향하려던 내 발걸음이 그의 힘에 의해 멈추었다. 손목을 세게 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 그에 도로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마주했다. 실로 오랜만에 가까이서 마주하는 그의 깊은 눈이었다. 무언가 하고픈 이야기를 잔뜩 담은 그 눈을 마주하자 내 머릿속은 순백의 도화지로 변해버려 아무 그림조차 그려낼 수 없었다.
“ㅇㅇㅇ.”
“...”
“ㅇㅇ야.”
“..왜.”
“나 걱정 돼?”
“ㄷ, 당연한 소리를 해. 친구가 비 맞고 그 와중에 술 취해서 들어왔는데 걱정 안 할 사람이 어디 있어.”
감정을 숨기려 속사포로 내뱉은 내 말에 돌아온 답변은 깊은 한숨이었다.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그 한숨은 또 다시 정적을 찾아오게 만들었다. 그가 한 발자국 씩 다가올 때마다 나는 한 발자국 씩 뒷걸음질 쳤다. 차가운 벽이 등에 닿고 그의 발자국이 한 번 더 움직이자 더 이상 물러설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벽에 기댄 나를 내려다보다 젖은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지독하게 남자다운 그의 자태에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ㅇㅇㅇ.”
“내가 헷갈리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너 취했,”
“아니. 그렇게 많이 안 마셨어.”
“...”
“...”
작게 들려오는 빗방울 소리, 술에 취해 감정이 격해진 남자, 그리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여자. 단어의 나열만으로도 충분히 아찔한 상황이었다. 이윽고 그 남자와 여자의 시선이 맞물리자 남자의 고개가 비스듬히 돌아가 여자의 입술에 맞닿았다. 말캉하게 다가오는 차가운 입술의 느낌이 썩 좋진 않았지만 밀어낼 힘 또한 없었기에 그저 그 입맞춤에 응했다. 친구와 술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진 일탈이었다. 그 일탈은 어느덧 범주를 뛰어 넘어버리고 있었다.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하면 단단히 잡아오는 그 입술 사이로 느껴지는 알싸한 알콜 향에 나 또한 취하는 느낌을 안겨 주었다.
초승달이 뜬 비가 오던 날의 밤, 우리는 더 이상 순수하던 시절의 소년, 소녀가 아니었다. 그러나 여전히 친구라는 범주는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에선 겁이 많았던 소년, 소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갑작스레 다가오는 감정이 익숙지 않아 무서웠던 것일까, 모순적인 밤이었다.
-------------------------------------------------------------
헤헤헿 저 이런 아슬아슬한 거 좋아해요 키쮸는 했지만 아직 마음은 인정 못하고 막 꺄핳 다들 굿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