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0
-첫 장-
오늘도 약을 삼켰다. 특별한 약은 아니었다. 약국에서 감기약 좀 주세요, 하고 2500원만 내면 구할 수 있는 그런 흔한 감기약이었다. 흰 색의 약간의 쌉싸름한 냄새가 나는 길쭉한 타원형의 알약. 그것 2알을 먹는 행위는 내가 글이라는 걸 쓰기 전에 행하는 의식 같은 거였다. 이온음료와 함께 삼키면 약효는 2배로 더 빠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떡 진 머리를 긁적이며 무릎이 늘어난 츄리닝 바지를 종아리까지 걷어 부친다. 그리고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놓았던 보풀 일어난 회색 카디건을 떡볶이 국물이 묻은 티셔츠 위에 겹쳐 입는다. 그 후에 의자를 끌어당겨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탁, 탁, 탁. 책상을 손톱으로 두어 번 가볍게 탭핑을 하면 경쾌한 소리와 함께 노트북이 켜진다. 그러면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글을 쓴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무 단어, 아무 문장이나 마구 적어 넣는다. 누가봐도 무의미하고 생산성 없는 짓을 나는 매일같이 하고 있다.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느냐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다.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은 기분에 이러고 있을 뿐이니까.
의미 없는 타자질의 반복 끝엔 언제나 공복이 걸렸다. 붕 뜬 기분으로 멍하니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빼곡히 적힌 글자의 향연 뒤엔 뱃고동이 울린다. 밤새 들어 간 것뿐이라곤 차가운 물 한 잔과 약 2알 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하...”
의자를 엉덩이로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머리가 핑 하니 돌았다. 하도 앉아 있어서 피가 안 돌아서 그런가. 책상을 겨우 붙잡고 숨을 고르고 깜깜해진 시야에 눈을 힘주어 두 번 깜빡였다. 그제야 조금은 시야가 눈에 들어찼다. 그렇게 겨우 한 발을 내딛어 싱크대 앞에 선다. 그리고 맨 윗 천장에 손을 뻗는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차가운 비닐봉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까치발을 딛고 턱턱 손을 짚어 봐도 닿는 것은 맨질한 나무뿐이었다. 그 날이었다. 한 달에 한 번 피치 못해 바깥 공기를 들이마셔야 하는 날. 끔찍하게 싫었다. 대충 캡모자를 눌러쓰고 카디건 단추를 잠궜다. 협탁 위에 아무렇게 놓여진 먼지 쌓인 지갑을 챙기고 슬리퍼에 발을 끼웠다. 깊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문을 열었다.
마트까지 가는 길을 5분이면 충분했다. 5분이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아니었다. 어찌저찌 마트에 도착하면 나는 언제나처럼 세 블럭 직진하고 우회전을 해서 라면코너로 들어갔다. 그리고 봉지라면 한 박스 컵라면 두 박스를 꺼내려던 참이었다.
“꺼내 드릴까요?”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