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국황여일지 2
written by. 아름다웠던 그 날
태형은 말을 타고 달려 성문 앞에 도착했을 때 무척이나 반가웠으나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웠다. 자신이 먼 곳으로 귀양을 쫓겨나고 그 곳에서 황후로 인해 황비가 사약을 먹고 돌아가셨다는 전문을 받았을 때도 황궁으로 가질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고 또 한탄했다. 결국 자신의 어머니인 황비는 죽었고, 황후도 병으로 죽었다. 이제 남은 것은 나머지 황자들과 석진 그리고 자신 뿐. 그리고 이제 태형이 믿을 것은 목 안에 새겨진 꽃 문양의 표식 밖에 없었다. 자신이 하늘의 아이라는 것을 유일하게 표출해 주는 하늘의 마지막 선물. 귀양을 끝내고 돌아왔을 땐 모든 것이 바뀌어져 있었다.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은 태형이 귀양을 떠났을 때 줄줄이 숙청되었고, 황비 또한 사약으로 죽었으며 태형이 믿어 의심치 않던 석진은 자신을 버리고 황제가 되기를 선택했다. 마지막으로 믿었던 아비마저 나를 버렸다.
이제 황궁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모든 것을 되돌려 놓는 것 그 이상이었다. 태형은 자신이 진정한 하늘의 아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은 물불 가릴 것이 없었고 더 이상 남아있는 것도 없기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폐하, 태형 황자님께서 문안 인사를 간청드리옵니다.”
석진은 읽고 있던 신하들의 호소문을 읽다 내리며 천천히 들어오는 태형을 발부터 머리 끝까지 들여다보았다. 귀양 갔을 당시에 보았던 태형의 모습과는 달리 좀 야위었지만 남자답게 큰 몸과 더욱 더 잘생겨진 얼굴에 석진은 웃으며 태형을 마주보았다. 그에 태형은 네 번 절을 하고 석진의 앞에 다가갔다.
“그동안 수고했다. 내 얼마나 너를 보고 싶어 하였는지 아느냐?”
“...”
“얼굴이 많이 야위었구나. 그곳에서 밥을 제 때 챙겨먹었어야지.”
“...”
“이리와서 차 한 잔 하거라. 나머지 형 동생들에게도 인사는 하고 온 것이냐?”
“폐하께서는 제가 반가우십니까?”
잔에 차를 따르던 석진의 손이 태형의 말에 흠칫 멈췄다. 그리고는 찻잔을 내려 그를 바라보았다. 석진의 눈에는 씁쓸한 마음이 가득했다. 이런 반응은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직접 들어보니 마음이 아렸던 것이었다. 태형은 석진이 따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석진의 얼굴 바로 옆으로 던졌다.
그러자 찻잔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그의 얼굴 옆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나뒹굴어져 굴러 떨어지는 파편을 보고 태형은 비웃음을 흘렀다. 석진은 그런 태형을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서 깨지는 찻잔에도 오직 태형만 바라보았다. 태형의 눈동자는 그 때보다 더욱 훨씬 더 어두웠다. 그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 속에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 어미를 잃은 슬픔, 고독함이 다 들어담아 있었다.
“폐하께서는 제가 반가우시냐 말입니다.”
“...”
“반쪽짜리인 주제에.”
“...”
“겁도 없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다니 참 양심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태형아.”
“제 이름 부르지 마십시오. 소름끼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제가 가졌던 고통 그대로 되돌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난..”
“황궁 안에서 쫓겨났을 때 가만히 절 지켜 보기만 하셨죠.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제게 편지 한 통 날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선황제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전 그 사실을 몇 개월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태형은 악이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치며 말했다. 그런 태형을 보는 석진은 고개를 떨궜다. 그동안 태형이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왔는지 느껴졌기에 더욱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더 태형에게 신경 써주고 위로했더라면 우리는 이곳까지 오지 않았을까.
“우린 옛날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단호한 말에 고개를 숙인 눈에서 결국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니 헛된 희망을 갖지 마십시오, 폐하.”
“과거에 잡혀 살지도 마세요.”
마지막 말에 석진은 손을 떨었다. 태형은 등을 돌려 방을 나갔고 그는 그런 태형의 뒷모습만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숨을 죽이고 울 수 밖에 없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만 있다면 언제든지 돌아가고 싶다. 아무 걱정도 없이 서로를 보면 말없이 웃었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언제나 원한다. 산산조각난 찻잔 파편들처럼 우리의 사이도 그렇게 산산조각이 되어버렸다.
“누구요?”
자신과 여인을 막아내는 성문지기들에게 호위무사임을 나타내는 패를 보이자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비켜나갔다. 여인은 계속 눈치를 보며 정국을 뒤따랐다. 성문이 열리고 그 앞에 드러나는 웅장한 황궁의 모습에 여인은 더욱이 긴장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정국은 뒤따라오는 여인을 때때로 확인하며 석진이 머무는 태한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문으로 다다렀을 때쯤 석진의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태형이 차가운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정국은 아까도 보았지만 더욱이 가까이서 느껴지는 그의 어두움에 짐짓 걸음을 멈추고 그를 경계할 수 밖에 없었다. 태형은 정국과 그 여인을 그 특유의 검은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여인은 그런 태형의 기가 너무나도 견디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색색거리며 내뱉었다. 태형은 여인을 보는 눈빛을 떼어내고 정국을 지나쳐갔다. 그를 지나쳐가는 순간 보였던 태형의 알 수 없는 미소는 그의 몸에 오한이 끼치게 만들었다.
정국은 태형이 지나간 자리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뒤를 돌아보자 숨을 쉬는 것이 힘든 듯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을 움켜잡고 있었다.
“넌 황제폐하를 보게 될 것이다.”
“...예?”
“그러니 적당한 예를 갖추고 묻는 말에 대답만 하거라.”
“황제폐하라니요. 제게 아무런 말씀도 없었지 않으셨잖습니까.”
“왕족의 목걸이를 훔쳤는지 안 훔쳤는지에 대해서는 폐하께서 결정할 일이다. 특히 왕족에 대한 일은 폐하께서 면밀히 판단해야 하시는 일이지.”
“그런 말씀은...”
“네가 하는 대답에 따라 네 목숨이 달려있다. 그러니 신중히 대답하거라.”
정국은 시녀들을 물러내고 여인의 손목을 붙잡아 석진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가 집무실에 들어가자 보였던 것은 그 옆에 깨져있는 찻잔조각과 숨을 죽인 채 울고 있는 석진이었다. 예상 외의 모습에 여인은 당황해 다급히 고개를 숙이고 정국은 담담히 그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석진은 그 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울음이 멈춰지질 않았다. 애써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지만 그 미소 속에서 우러나오는 슬픔과 눈물은 감춰질 수 없었다. 그는 더 큰 소리로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의 눈물은 흐른 채로 허망한 웃음소리만 궁 안에 떠돌 뿐이었다.
“내가... 내가... 다 망쳤다. 내가 다 망쳐버렸어...”
“...”
“정국이 너도 내가 반쪽짜리라 생각하느냐? 솔직하게 말해보거라.”
“폐하, 정신차리십쇼.”
“네 이노옴!!! 어디서 호위무사 따위가 황제에게 대드려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석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국을 향해 걸어갔다. 그 옆에 있던 여인은 흠칫 놀라 온 몸을 벌벌 떨었다. 그에 석진은 정국에게 가려던 걸음을 여인에게 향했다. 여인은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석진이 너무 무서워 고개를 더욱 숙였다. 석진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실성한 듯 허허 웃으면서도 곧바로 얼굴을 굳은 채 화를 내는 모습이 가히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것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다.
“이 여인은 무엇이냐.”
“...왕족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던 자였습니다.”
“이 천한 평민이 어떻게 가지고 있던 거지?”
“기억을 잃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정국의 옆에 차있던 칼을 석진이 뽑아들어 순식간에 여인의 목으로 향했다. 여인은 너무 놀라 온 몸을 벌벌 떨었으며 정국은 석진을 말리려 했으나 이미 이성을 잃은 석진을 그가 막을 수는 없는 지경이었다.
“바른 대로 말하거라.”
“..폐.. 폐하.”
“훔친 것이냐?”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너도 나를 반쪽짜리라 무시하는 게로구나.”
“아니옵니다 폐...”
“이게 날 무시하는 게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폐하, 진정하시옵소서.”
“이거 놓아라!!! 이거 놓으란 말이다!!!!!!!!!”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폐하!”
석진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가 오래였고 정국의 소리지르는 목소리에 궁녀들이 몰려와 황제를 말렸다. 그의 눈동자는 텅 빈 듯 씁쓸해 보였다.
“이봐라!! 이 년을 옥에 당장 가...!”
석진은 이 말을 끝으로 눈을 감으며 쓰러졌다.
누가 황제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를 괴물로 만든 황궁이었을까 아님 이 모든 것을 만들었던 신이었을까.
그에게 눈이 부실 듯 아름다운 긴 금발은 필요없었다. 차라리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그 금발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태형이었더라면. 태형이 온전한 하늘의 아이였다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넓은 신전에 한 남자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하얀 두건을 쓰고 있었으며 무언가를 쓴 종이를 촛불에 태워 재로 만들고 그 재를 쓸어 모아 항아리에 담고는 조용히 술을 담아 앞에 있는 동상에 기도를 드렸다.
무언가를 한참 중얼거리다 서서히 눈을 뜨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을 껐다.
그러고는 나지막히 말했다.
“드디어 만났구나... 드디어... 하늘의 뜻이 이루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