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침대 맡에 머리를 붙였다. 이것이 얼마 만이더라, 그것 또한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동안 내게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그것들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서야 지친 몸을 간신히 뉠 수 있었다. 눈꺼풀이 천근이라도 되는 듯 무겁게 느껴졌다.
더는 이 피로를 억누를 기운이 내게는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잠들어 영영 깨어나지 않았으면 싶었다. 꿈속처럼 내가 사는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눈앞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눈을 두어 번 더 깜빡이니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다.
다시 눈을 떴을 때의 나는 허연 백지 같은 공간에 떨어져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꿈속 세계를 어떻게 여행을 했었는지 가물거렸다.
어떻게 했더라. 한참을 그 하얀 공간에 앉아 고민하던 나는 어느 한 곳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머릿속으로 문을 그렸다. 역시 오랜만에 하는 것이라 그런지 제대로 될리 없었다.
하얀 공간에 겨우 손바닥만한 동물이 들어갈 문부터 내가 절대로 열 수 없을 것 같은 크기의 문이 수시로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러다 생전 처음 보는, 아니 기존에 내가 봐 왔던 것과는 다른 문이 생겼다. 언뜻 기와집의 문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나는 더 고민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기서 더 시간을 축 내봤자 다른 문이 그려질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호기심이 생겼다.
저 문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하는 아주 작은 호기심이. 그때까지만해도 이 작은 호기심이 불러올 일들을 예상도 못하고 있었다.
*
그곳에 들어선 순간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곳은 도원향 같기도, 어쩌면 조상들이 그리던 몽유도원 같기도 했다.
하늘은 무지갯빛으로 물들어져 있었고 햇살이 따사로웠고 온통 평화로움으로 가득 찬 곳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뜻 보면 조선시대의 구중궁궐 같기도 했고 어떤 양반가의 집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무언가 달랐다.
곳곳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식물들이 놓여있고 머리 위로는 생전 처음 보는 새 같은 것이 날아다녔다.
신비로웠다. 이런 곳이 있었는데 왜 진작 와보지 못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이 아니면 언제 다시 이곳을 오게 될지 몰랐다.
누군가 잠들어 있는 내 몸을 흔들어 깨우기 전에 이곳을 좀 더 구경하고 싶었다. 아, 이럴 줄 알았다면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잘 것을...
"이게 꿈이야, 생시야..."
물론 꿈이지만, 꿈같지 않아서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이다. 나는 한참을 그곳에 멍하니 서있다가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아름다운 연주가 들려왔다. 그것이 연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끌 리 듯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점점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니 거의 다 온 듯싶었다. 단단히 걸어잠긴 것 같은 문고리에 손을 가져가자 문이 제 스스로 열렸다.
꼭 들어오라는 듯 승낙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내가 그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제 스스로 열렸던 문이 스스로 닫혔다.
나는 당황스러움에 다시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나 지금 여기에 갇힌 건가? 문 앞에서 문고리를 잡고 씨름을 해보았지만 얻는 것은 없었다.
꿈속에 갇혀보는 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는데,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갇힌 것은 처음이었다.
"열려라 참깨. 열려라 홍두깨!"
이런다고 열릴 리 없지.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도 아니고...
*
여기서 죽치고 있어봤자 얻는 것도 없으니 일단 노랫소리를 따라 계속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흙 먼지 묻은 옷을 손으로 툭툭 털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신비로운 곳이 나왔다.
노래를 부르는 커다랗고 신기한 연못과 그 가운데 놓인 다리, 그리고 그 끝에 있는 어떤 신비로운 건물.
저 다리 건너의 누각에는 누가 있을까 궁금했다. 이런 신비로운 곳에 있는 존재라면 한 번쯤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이곳에 갇혔다는 생각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라 나는 찬찬히 이곳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현실같이 치열한 곳에 살 바에야 이런 평화로운 곳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겨우 조금 둘러본 곳인데 어쩐지 이곳이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노래하는 연못 위로 놓인 다리 앞에 도착하고 나서 나는 망설임 없이 그 다리 위로 올라섰다. 연못을 바라보니 신비로운 색의 물고기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연못에 살고 있는 생물들 역시 빛깔이 독특하고 묘한 분위기를 풍겨왔다. 멀리서 봤을 땐 연못의 색깔이 맑아 보였는데 어딘지 모르게 탁한 빛을 띄고 있었다.
노래하는 연못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 것만 같았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시선은 연못으로 향해있었다. 파란빛의 물고기가 내 뒤를 강아지 마냥 졸졸 따르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것 같았다. 저 물고기를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일순간이었다. 그것이 내 의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 파란 물고기에게 손을 뻗었고 파란 물고기는 곧 파란 빛깔의 손으로 변했다. 꼭 죽은 사람의 손 같기도 한 그 시퍼런 것이 내 손목을 잡았고 이내 나를 끌어당겼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도 못하고 속절없이 그 연못으로 끌려들어 가려던 그때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연못의 노랫소리가 멈췄다. 파란 손이 다급히 나를 끌어당겼지만 그 또한 그 남자에 의해 저지 당했다.
말하자면 그 남자가 나를 끌어당기는 속도가 파란 손이 끌어당기는 속도보다 빨랐달까. 나는 멍한 눈으로 그 남자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어버렸다.
남자는 나를 빠르게 밀쳐내곤 무언가 아니꼬운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옷을 보니 꼭 한 나라의 왕처럼 보이기도 하고 옥황상제처럼 보이기도 했다.
곱상하게 생긴 것치고는 말투가 상당히 재수 없었다. 일단 신분이 높아 보이는 사람 같아서 대충 비위나 맞춰주다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
"너 도대체 이곳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
"길을 잃어서 헤매다가 도착한 곳이 여긴데요."
"길을 잃은 것 같은 소리하고 있네."
"길을 잃었다니까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바른대로 고해라."
아니,이 새끼가. 진짜 길을 잃었다니까? 나는 바른대로 말하고 있는데 받아들이는 새끼는 그렇게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나 보다. 아, 인생. 꿈속에서도 더럽게 꼬이네.
"그렇지 않으면 저 밑에서 입맛을 다시고 있는 놈에게 너를 고깃밥으로 던져버릴 생각도 충분히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