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우연함에 대하여 01
로시에나 作
평범하게만 살아왔던 내게도 일상의 행복이란 게 찾아올 수 있을까? 예를 들면 자주 가던 카페의 멋진 알바생과 두근대는 인연을 쌓는다거나 나만 바라봐주는 근사한 남자친구가 생긴다거나 하는 일 말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러한 행복들과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째서 남자인 친구조차 한 명도 없겠느냔 이야기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만 봐도 소꿉 친구로 지내던 그가 어느 순간 남자로 보인다던지 하는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이야기들이 넘치는데 내겐 그 흔해 보이는 일 하나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절로 나오는 한숨을 붙들며 교문을 통과하는데 나를 불러세우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란,
"명찰 없네. 학번이랑 이름."
고작 명찰 따위에 굴복하게 만드는 선도부장 선배가 전부였다. 그럼 그렇지. 내 인생에 뜻하지 않은 행복이란 게 찾아올 리는 없었다.
* * *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잘 달려있었던 명찰에 대체 발이라도 달렸단 말인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벌점을 받았다는 죄로 아침부터 학생부장 선생님의 잔소리에 일일히 고개를 숙이고 나니 정작 1교시는 시작도 않았는데 오전이 훌쩍 지나버린 기분이었다. 다행히도 담임 선생님은 아직 교실에 도착하기 전이었기에 나는 텅 빈 교탁을 보며 재빠르게 자리에 착석했다. 나이스 타이밍.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담임 선생님을 보며 나는 홀로 자그맣게 킥킥댔다.
"자, 집중. 우리 반에 전학생이 오기로 했다."
엥? 고등학교에도 전학생이 있나, 하는 무의미한 생각은 다시금 열리는 교실 문을 통과한 전학생의 얼굴을 보자마자 연기처럼 훌훌 사라져버렸다. 웅성거림을 정리하려 선생님께선 목소리를 높이며 말씀하셨다.
"조용히들 하고. 서로 어색한 건 알지만 그래도 자기 소개는 들어봐야겠지?"
전학생은 선생님의 말에 짧게 대답하더니 반 아이들을 보고 섰다. 어색함을 지우려는 듯 살짝 웃는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아니, 남자가 이렇게까지 예뻐도 되는 건가? 묘하게 불공평한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전학생의 소개가 이어졌다.
"박지훈입니다. 우리 일 년 동안 잘 지내보자."
이어지는 박수 세례 속에서 나는 한참을 멍하니 전학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유라 하면 열아홉 인생을 사는 동안 그토록 찾아다녔던 평생의 이상형을 마주한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이 비단 나 혼자가 아니라는데 있었지만 말이다.
야, 전학생 진짜 잘생겼어. 이름이 뭐랬더라. 지훈? 박지훈이라고? 듣지 않을래야 듣지 않을 수 없는 말들에 전학생은 민망하다는 듯 옅은 미소만 보였다. 선생님께선 교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전학생의 자리로 내 옆자리를 지정하셨다.
"선생님. 여기 자리 있는데... 요?"
내 곁으로 오던 전학생의 발걸음이 멈춤과 동시에 내게 쏟아지는 이상한 눈빛의 시선들. 나는 그제야 내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도 전학생이 싫어서가 아니라 진짜 주인이 있는 자리라서 얘길 한 건데. 당황한 기색이 드러났던지 전학생은 입모양으로 내게 괜찮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괜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거기 형섭이 자리지?"
"네."
"형섭이는 당분간 개인 사정으로 학교 안 나오게 됐으니까 그렇게 알고. 그럼 문제 없지?"
깐깐하기로 소문난 담임이 개인 사정이라고 일축할 정도면 보통 사정이 아닐 텐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려나.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 달 동안 바로 옆자리에서 지켜본 정이 있는데. 걱정이 아예 없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안형섭이 가끔 장난을 심하게 치긴 해도 특별한 사고를 터뜨릴 사람도 아니고, 또... 모르겠다.
"한예린?"
"어?"
지금은 그보다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 같은 전학생 덕분에, 전학생과 아는 사이냐는 오해를 잔뜩 사게 된 내 앞길을 걱정하는 게 더 바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 * *
"기분 나빴으면 미안."
너무 닮아서 나도 모르게 그랬어. 모여드는 아이들을 가까스로 흩어지게 한 뒤 전학생은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꺼냈다. 굳이 사과를 받을 정도로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사과를 전하는 전학생의 표정이 꽤 어두워 보여서 차마 담담하게 대답을 할 순 없을 듯했다.
"아냐. 그럴 수도 있지. 너무 신경 안 써도 돼."
정말이냐는 전학생의 물음에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름은 김여주라고 했지? 여주, 여주, 김여주... 전학생은 내 이름을 몇 번 곱씹더니 갑자기 교복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럼 이거 네 거야?"
전학생의 손바닥 위에 곱게 놓여있는 내 명찰을 보자 허탈함에 절로 한숨이 먼저 나왔다. 응, 내 거 맞아. 어디 갔나 했다니 여기 있었네. 고마워. 나는 명찰을 다시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곧바로 교복 조끼에 명찰을 달았다. 조금 비뚤어졌지만 이걸 똑바로 맞추려면 조끼를 아예 벗어야 할 것 같았기에 그만두었다.
"어... 혹시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응? 그런 건 없는데."
명찰을 다 달고 나서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 전학생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질문을 던졌건만 돌아오는 대답은 시원찮았다. 원래 사람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하는 타입인가? 아니, 할 얘긴 없다고 그랬는데. 그럼... 혹시 내가 아까 이름을 잘못 말했던 그 친구랑 닮아서 그런 건가?
"할 말은 내가 아니라 너한테 있는 것 같은데. 맞지?"
"어? 꼭 그런 건 아닌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제 전학생이 아니라 내가 전학생을 힐끔거리고 있었나 보다. 내 눈동자는 왜 이렇게 거짓말에 약한지 모르겠다. 이 자리에 전학생이 아닌 안형섭이 앉아있던 때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던 나였다. 자꾸 쳐다보면 닳아, 내 얼굴. 장난스레 나를 놀려먹던 그 목소리가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왜. 궁금한 거 있으면 다 알려줄게."
전학생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때 어디서부터 얘길 엿듣고 있었는지 모를 부반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다 알려준다고 했다? 우리 여주는 궁금한 게 별로 없는 것 같으니까 내가 질문 대신할게. 응? 갑자기 친한 척을 해대는 부반장이 부담스러웠지만 전학생과 둘이 이야기를 하는 것도 마냥 편한 일은 아니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지 싶었다.
"지훈아, 너 여자 친구 있어?"
"그런 거 없어."
"그럼 골키퍼도 없겠다. 내가 점심 시간에 학교 구경 시켜준다고 하면 알았다고 할 거지?"
입이 떡 벌어졌다. 대체 저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물론 부반장은 무슨 데이만 되었다 하면 책상 서랍과 사물함이 가득 차도록 간식 거리들을 선물로 받는 얼굴도 예쁘고 키도 크고, 더군다나 공부까지 잘하는 캐릭터였느니 그럴 만도 했다. 적극적인 제안에 퍽 마음이 흔들리기라도 했는지 전학생은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그래. 점심 시간에 보자."
전학생의 대답에 교실이 술렁였다. 대박, 쟤네 사귀는 거 아냐? 사귀기는 무슨. 이제 겨우 말 한 마디 했는데. 아냐, 너 새라가 그렇게 인기 많으면서도 먼저 좋다는 남자애들 한 명도 없었는데. 전학생 보곤 첫눈에 반했나 보다. 좋겠다. 나도 전학생이랑 말이라도 섞어봤으면...
그런 대화를 듣고 있자니 절로 멍해졌다. 그래, 김여주.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전학생이 왜 그걸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냐구. 나 같아도 새라처럼 예쁜 애가 그런 얘길 하는데 당연히 오케이 할 텐데.
"여주야."
"응?"
"궁금한 거 물어보라던 말 아직도 유효하다고."
전학생이 웃었다. 고작 말 한 마디에 민망하리만치 내 기분도 다시 나아졌다. 박지훈이 전학을 왔던 당일은 생각보다 꽤 평범하게 그렇게 지나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평화가 앞으로도 쭉 이어질 줄만 알았다. 정말 어리석게도 말이다.


인스티즈앱 ![[프로듀스101/박지훈/안형섭] 사랑, 그 우연함에 대하여 01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7/05/18/23/59e937fa2c670cd46879601913a32ee3.gi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