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 있다. 여주와 눈이 마주친 진영이 받은 첫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눈은 끔찍할 정도로 공허했다. 여주는 진영의 깍듯한 인사에 대답조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진영은 당황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지훈은 진영이 있다는 것도 잊은 듯 여주를 제 어깨에 기대둔 채로 늘어뜨린 머리칼을 정성스레 만져준다. 이 비윤리적이고 잔인한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의 달콤하고 싱그러운 연인. 진영은 조용히 지훈의 명령을 기다린다. 본명을 밝힌 게 신경이 쓰이긴 했으나 적어도 이 들개 소굴 안에서 배진영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아는 사람은 없다며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지훈은 한참이고 여주의 머리칼을 만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주로 지훈이 이야기하고 여주는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으나 그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듯 시종일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아. 미안. 깜빡했다."
"괜찮습니다."
"네 임무는 간단해."
"......"
"지켜, 김여주."
"... 알겠습니다."
"다른 애들이 사격장이나 훈련장에서 구를 동안 너는 얘만 지키는 거야."
"......"
"얘가 네 목숨이고, 얘 죽으면 너도 죽는 거고."
생각보다 입이 살벌하시네. 진영은 저도 모르게 찌푸려진 미간을 살살 문지르며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아까부터 구십 도로 접고 있던 허리가 욱신거렸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가 바닥에 닿을 듯 숙였다. 지훈은 그것을 완벽한 복종의 표시로 여기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으나 실상 진영은 마구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는 중이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훈련장에서 몇 달은 개처럼 굴러야 겨우 올라갈 수 있는 자리를 첫날부터 떡하니 맡아버렸다. 미친개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는 날이 예상보다 훌쩍 앞당겨졌다. 진영은 제 어깨를 두드린 지훈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민현에게 소식을 알리고 싶어 입과 손이 근질거린다. 여주는 미친 듯이 웃어대는 진영을 이상하게 쳐다보지도 말리지도 않는다. 기대고 있던 지훈의 어깨가 사라지자 다시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본다. 공허한 시선 끝에는 말라 붙은 파리가 죽어있다. 진영은 눈물을 닦으며 굳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쓴다. 여주에게 말을 건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웃겨서."
"......"
"제가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 아가씨라고 불러."
잔뜩 갈라진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의외로 맑고 청아해서 진영은 내심 놀란다. 저 목소리로 박지훈을 홀렸나. 진영은 여주의 천박한 태생을 생각한다. 행방을 모르는 아빠와 길거리에서 굴러먹던 그녀의 엄마. 더러운 뒷골목들을 누비며 빌어먹은 밥과 돈들로 하루를 연명하다 결국 박지훈의 단골 업소에까지 팔려갔고 그곳에서 그의 눈에 들었다. 한마디로 여주는 태어날 때부터 버려진 삶이었으며 지훈이 구원하지 않았으면 형편없었을 삶이었다. 그런 주제에 뻔뻔하게도 아가씨라는 호칭을 원한다니. 박지훈이 어지간히 귀하게 키웠나 보다. 너도 결국은 미쳤구나.
"예, 아가씨."
"......"
"잘 부탁드립니다."
진영은 비웃음 대신 거짓으로 꾸며낸 상냥함을 한껏 머금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처럼, 그저 들개파를 동경해 조직원에 자원했지만 운좋게 눈에 들어 이런 임무를 맡게 되었다는 게 굉장히 기쁘다는 것처럼. 해사하게 웃는 진영의 얼굴은 이 잔혹한 방에 있다 죽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울 정도로 예쁘다. 진영은 지훈이 그랬던 것처럼 여주의 침대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가 이내 여주의 얼굴을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다.
"아, 죄송합니다."
"......"
"불편하세요?"
"......"
진영은 진심으로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재빠르게 여주를 바로 눕힌다. 처음 도둑질을 한 소년처럼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맨다.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진영을 바라보던 여주의 흐트러진 머리칼 속에 가려 있던 눈동자가 순간 반짝 생기를 띈다. 진영은 또다시 실수인 척 여주의 귀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댄다.
"죄송합니다."
"......"
"아가씨가 너무 예쁘셔서 그만."
이런 말하면 아까 그 분께 혼나나요? 여주는 간지러운지 몸을 움츠린다. 진영은 더 이상 순진한 소년으로 보이지 않는다.
"알고 있는 거 아니냐?"
"그게 가능합니까?"
진영의 보고를 받은 민현은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박지훈은 들개의 차기 보스로 손꼽힐 만큼이나 잔인하고 냉철한데 그런 녀석이 아무런 절차도 거치지 않은 낯선 이에게 그것도 제가 가장 아끼는 김여주를 맡겼을 리 없다는 게 민현의 주장이었다. 물론 알고 있었다는 게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지만 그러기에는 지훈의 태도가 지나치게 태연했다. 진영은 곧 먹이를 노리는 개의 눈빛과 마음에 드는 수족을 만난 윗사람의 눈빛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여기 오기 전에 짭새들도 다 정리했고, 몇 달 전부터 극비였고...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얘네가 우리처럼 또 심어놨을지 아닐지 어떻게 알아?"
"... 만약 들켰다고 해도 상관없는 거 아닙니까? 빨리 해치우고 가면 되지 않습니까."
"새꺄, 그게 말처럼 쉽냐?"
결국 민현이 분통을 터뜨렸다. 급작스레 높아진 데시벨이 전화기를 뚫고 나오자 진영은 황급히 여주의 눈치를 살핀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얼굴은 표정을 읽을 수 없으나 불편한 눈치는 아니었기에 다시 고개를 돌려 민현과의 통화에 집중한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 기쁘면서도 꽤 당황한 기색이 전화기 너머로도 느껴진다.
"혹시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것 같으면..."
"압니다."
"......"
"바로 뒈지러 갈게요."
주저하지 않고 나오는 진영의 대답이 말문이 막혔는지 민현은 한숨만 내쉰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박지훈이 모든 것을 알고 처음부터 진영을 들인 거라면.
"조직에 해 끼치는 일 없을 겁니다."
"......"
"약속해요."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진영이 죽는 수밖에 없다. 조심해라. 짙은 한숨과 함께 전화가 끊긴다. 진영은 능숙하게 휴대폰 배터리를 분리한 뒤 여주의 침대 아래 몸을 누인다. 고르게 오르내리는 여주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진영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적절한 거리를 두고 여주의 머리칼을 매만지기 시작한다. 다정하고 또 조심스러웠던 지훈의 것과 비교하면 훨씬 거친 종류의 손길이다. 총과 칼을 다뤄 굳어진 살들이 투박하다.
"아가씨."
"......"
"주무세요?"
"......"
"저는 길게 끌 생각 없거든요."
"......"
"그러니까..."
"......"
"빨리 저를 사랑하세요."
끝으로 부드럽게 여주의 머리칼을 쓸어넘긴 진영이 다시 몸을 누이고 곧 잠에 든다. 여주는 채 감지 못한 눈꺼풀을 파르르 떤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자꾸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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