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센티넬버스 |
본 설정을 각색하여 센티넬버스 세계관과 다른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센티넬 (능력인) : 일반인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 (초능력 등)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폭주가 일어나기도 한다. 폭주가 심해지면 센티넬은 죽는다. 센티넬에게 가이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 가이드 (보좌인) : 센티넬을 안정시키고 지켜주는 존재. 가이드는 센티넬이 없어도 상관없다.
센티넬과 가이드의 등급은 다양한데 가장 높은 등급은 S등급이다. 가이드는 센티넬에게 손잡기, 포옹, 키스 등 다양한 신체 접촉으로 가이딩을 할 수 있으며 관계를 맺는 것을 각인이라고 칭한다. 서로 레벨이 맞지 않는 가이드와 센티넬을 만나면 죽는다. (S급 가이드가 C급 센티넬에게 가이딩을 하면 센티넬은 황홀한 가이딩에 못 이겨 중독사, C급 가이드가 S급 센티넬에게 가이딩을 하면 가이드가 센티넬의 힘을 못 이겨 죽게 된다.) |
지화력 1728년. 긴긴 전쟁을 끝내고 오랫동안 주인을 잃었던 왕좌에 주인이 들어섰으니 이가 곧 지화국 제 18대 왕이요, 존함은 풍화국 제 16대 황제 전중훈과 중전 유희왕후의 소생 전정국이더라. 왕께서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현명함을 발휘하시어 안으로는 나라의 기강을 세우시고 밖으로는 백성을 두루 보살피시니 저잣거리에 그 명성을 찬양하는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또한 왕은 능력인이셨기에 보좌인을 필요로 하였으나 어린 왕의 혼기가 다 차도록 그의 보좌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왕께서 전국적으로 12세에서 17세 사이의 소년 소녀들을 모두 궁으로 불러모아 보좌인을 뽑는 시험을 여셨으니, 항간에서는 이 시험을 '천명대회', 이 대회에서 왕의 보좌인으로 간택될 자를 '천명인' 이라 부르더라.
한 쪽 눈을 감고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자 부르르 떨리는 진동이 생채기 가득한 볼에 와닿았다. 바람이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을 놓았다. 화살이 시원하게 허공을 가르며 과녁 한가운데를 꿰뚫는다. 심장 한가운데 화살이 박힌 지화왕의 초상화가 바람에 펄럭였다.
"명중."
무덤덤한 박수 소리와 함께 윤기가 훈련장으로 들어섰다. 한때 지화국 영의정의 아들이자 내 친구이며, 내 동생인 유화 공주의 혼처였던 사내. 풍화국 황제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우리 나라를 침략해오던 날은 윤기의 혼례 전날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자비한 칼날에 스러지면서도 지키고자 했던 사람은 애교 많고 깜찍하던 유화도 아니고, 아직 죽기에는 너무 어린 막내 월화도 아니었다. 나는 별달리 내세울 것도 없으면서 단지 지화국의 첫 번째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살아남았다. 대신들이 지화국 근처의 숲에서 칡뿌리를 캐어먹으며 연명하던 나를 발견했을 때 누구도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탓하지 않았다. 심지어 윤기마저도.
"... 떨려?"
"아니."
폐허가 된 지화국 경계의 마을을 옮겨다니며 은신 생활을 한 지도 어언 몇 달째 되던 날, 내 나라가 풍화국의 속국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것도 능력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능력을 마구 사용하고 죄 없는 사람까지도 몰살시킨 그 세자가 왕이 되어 다시 지화국 땅을 밟는다니. 그가 미웠다. 우리 백성도 아니면서 우리 땅에 살고 칭송을 받는다. 지화국의 명성은 날로 갈수록 높아졌고 그만큼 내가 무술 연습을 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윤기와 나는 천명대회의 소집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물론 본명이 아닌 가명으로. 나는 대신들이 몇날 며칠을 고심해서 지어준 여주라는 새 이름이 꽤 맘에 들었지만 가명이 적힌 종이를 받은 윤기는 이게 뭐냐며 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그런 윤기를 어르고 달래며 천명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궁으로 가는 길은 아이러니하게도 즐겁기만 했다.
지금의 지화국에서 과거 지화국의 흔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완벽히 재건되어 있었다. 작은 풍화국이라는 이름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시장에서 파는 물건 하나까지도 풍화국의 것을 그대로 빼다박았다. 옆에서 걷고 있는 윤기도 표정관리가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하얀 얼굴에 검은 눈썹이 자꾸만 불편하게 까닥였다. 슬쩍 둘러보자 천명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 중에 그런 표정을 짓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윤기의 손을 슬쩍 잡았다가 놓았다.
'표정.'
훈련장에서 왕의 얼굴만 보면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내게 항상 윤기가 하던 말을 지금 내가 하고 있으니 기분이 굉장히 묘해졌다. 어렴풋이 보이는 저 궁에 들어가게 되면 정말 우리 둘밖에 남지 않겠구나. 대신들이 도와주기야 하겠지만 지화국 전성기 때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한 힘이고 얼마 남지 않은 백성들 또한 우리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으니. 긴 행렬이 드디어 멈추고 큰 대문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그 몸을 움직였다. 윤기와 복잡한 시선이 오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화궁을 되찾는다.
입궁했다고 해서 단번에 왕을 만나 천명인인지 아닌지를 가릴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으나 몇 달이 지나자 슬슬 애가 타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녀를 구분한다는 규칙 하에 윤기와도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확실히 줄었다. 지난 한 달 간 얼굴을 본 적이 공용 수돗가에서 물을 뜰 때뿐이었으니 아예 없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친구를 사귀어 보려고도 했으나 왕의 보좌인이 된다는 목표 아래에 어차피 모두가 모두의 적. 좀처럼 마음을 열려고 하는 이가 하나 없었다. 피 같은 몇 달이 속수무책으로 흘렀다.
"얘, 여주야. 들었니?"
"뭐를?"
"오늘 왕의 대신께서 내려오셨단다."
기다리면 복이 온다고 했던가. 나와 같이 궁의 허드렛일을 돕던 아이가 상기된 얼굴로 전한 말에 처소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다. 너나 할 것 없이 머리를 다시 땋는다, 오늘 쌀뜨물로 세안을 하지 못했다며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녔다. 지쳐가던 처소에 활기가 돌았다. 모두가 분주히 움직이는 가운데 나만이 주먹을 꽉 쥔 채 멈춰서 있었다. 물론 내 기쁨은 어떻게든 왕의 품에 한 번 안겨보고 손을 한 번이라도 잡아보고 싶어 안달난 저들과의 기쁨은 달랐다. 드디어 내 원수의, 내 나라를 무너뜨리고 내 가족을 처참히 죽인 채 사지 멀쩡히 살아 있는 그 파렴치한 얼굴을 볼 수 있다는 끔찍하고도 절망적인 기쁨 때문에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왔다. 반드시 천명인이 되고야 말겠다. 내가 보좌인이 아니라고 하면 영혼을 팔고 다른 보좌인을 죽여서라도 그 자리를 차지하겠고, 천명인이 아니라고 하면 천명인으로 간택된 자를 죽이고 그의 얼굴 가죽을 써서라도 그 자리에 오를 것이다. 훗날 모든 것이 들통나 왕에게 버림받고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먼저 간 사람들이 헛되이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증명해보이고 죽을 것이다. 반드시 천명인이 되어 그 뻔뻔한 얼굴에 칼을 겨눌 것이다.
왕께서 대신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모인 천명인 후보들에게 첫 번째 수행 과제를 내리시니, 그것은 놀랍게도 왕의 용안을 보고 왕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왕의 자애롭고도 어려운 과제에 천명인 후보들이 떨릴 가슴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사흘 뒤 첫 시험이 시작되니 지화력 1729년이더라.
꼬끼오. 닭도 한껏 들뜬 공기를 눈치챘는지 평소보다 일찍 운다. 가장 늦게 일어나던 오월이조차도 벌써 일어나 분을 바르고 있으면 말 다 한 거다. 왕께서 만개한 벚꽃처럼 화안한 분홍색을 좋아하신다더라, 귀여운 병아리처럼 샛노란 색을 좋아하신다더라 재잘거리며 한껏 치장을 하고 있는 아이들 틈에 끼어 분첩도 두드리고 입술에 연지도 찍어 발랐다. 거지꼴로 시험에 참가했다가 왕의 발끝조차도 보지 못하고 돌아설 수는 없었다. 아닌 척하며 은근슬쩍 서로의 얼굴을 힐끔거리던 아이들이 평소에 화장 좀 하고 다니라며 겉치레를 떨었지만 듣기에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나비 모양 비녀까지 꽂으니 유난히 나비를 좋아했던 유화 생각이 났다. 눈물을 감추기 위해 비녀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땋은 머리에 더욱 꽉 찔러넣었다.
'윤기야!'
'오랜만.'
'잘 지냈지?'
'어. 너도?'
당연하지. 대놓고 웃을 수는 없어서 입꼬리만 올려보이자 윤기도 특유의 비웃는 듯한 웃음으로 대답한다. 나비 비녀를 보고는 잠시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내가 걱정할까봐 금방 다시 웃어준다. 나도 모르는 척, 더 반가운 티를 내며 인사하려 애썼다. 무려 한 달만에 제대로 보는 얼굴이니 반갑지 않을 리가 없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더 여윈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살이 더 오른 것 같기도 하고. 윤기는 남자 천명인 후보 사이에서도 뛰어난 무술 실력과 박학다식함으로 대신들의 눈여김을 한몸에 받고 있다고 했다. 마구잡이로 줄세우지 않고 유력한 천명인이라고 생각되는 순서대로 줄을 세운 걸 보면 대신들도 아예 우리를 방치하고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윤기와 나는 앞줄을 당당히 차지했다. 사람들이 집중하는 건 유명했던 윤기가 아닌 눈에 잘 띄지 않았던 나였다. 제 목숨을 굉장히 중하게 생각하는 왕도 대신들의 보고를 받고 내게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졌을까. 지금 내게는 수천 명의 시선보다 왕 한 사람의 시선이 더 중요했다.
"왕께서 납신다. 예를 갖춰라!"
그리고 지금 왕의 시선을 얻어낼 기회가 코앞으로 왔다. 어머니, 아버지, 유화와 월화의 얼굴이 차례대로 스쳐지나갔다. 예를 갖추기 위해 땅에 처박듯이 한 고개가 분노로 떨려왔다. 드디어, 내 몇 년간의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할 시간이 코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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