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반에서 가장 인기많은 여학우를 꼽으라면 그건 단연 여주였다. 물론 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예쁘기만 하면 뭐해? 말수도 적고, 어딘지 음침해보였다.
어느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주말 내내 이사준비로 시끄럽던 옆집이 딩동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씻지도 않은 몰골로 문을 열자 의외의 사람이 서있었다. 여주였다. 두 손에는 떡이 든 접시를 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집으로 이사를 왔다고 둘 사이가 가까워진건 아니였다. 그래도 같은반인데 여전히 말 수 적고 음침해보이는 여주와 친해지기는 커녕 인사 한번을 하지않았다. 그냥 그렇게 이사를 가던 졸업을 하면 끝날 별 볼일 없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그 날 그 곳에서 여주를 만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 말라는 일이면 더 하고싶은 적당한 반항기를 갖춘 요즘의 남고딩답게 저녁 늦게 담배를 물고 아파트 놀이터로 향했다. 명색이 놀이터인데 그 흔한 미끄럼틀 하나 없이 그네 하나 띡 놓여있는 놀이터는 인적이 드물었다. 그네에 엉덩이를 붙히고 라이터를 꺼내려는데,
“ 왜 그렇게 까지 하는건데!“
하마터면 라이터를 흙바닥에 떨굴 뻔 했다.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으나 여주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들려오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없으니 누구랑 통화하다 입씨름을 하나보다 싶었다.
“ 이 집 팔면 난 어디서 지내라고? 엄만 나보다 그 아저씨가 더 중요해?! “
울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생각해보니 그 집에서 여주를 제외한 다른 사람이 드나다니는걸 본적이 없었다. 혼자 사는 집이였던거다. 고작 열아홉 인생이 꽤나 버거워보였다. 통화를 끝내고 주저앉아 흐느끼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유난히 작다고 생각했던 몸이 덜덜 떨리는게 보기 힘들었다. 외로운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여주가 신경쓰였다. 주위에 친구들이 없는것은 아니였으나 학교에서 돌아오면 혼자 밥을 먹겠지, 혼자 잠을 자겠지? 하는 저와는 상관없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수능 전 날, 저 나름대로 도시락을 싸겠다고 편의점에서 즉석음식을 한아름 사온 모습을 보면서 결심했다. 저 외로운 사람의 든든한 편이 되어주겠다고.
그때부터 고등학교 동창이자 같은 아파트 이웃주민이라는 핑계로 여주의 곁을 맴돌았다. 여주는 이사온지 햇수로 2년이 되도록 아는척 한번 안하던 놈이 갑자기 친한척을 해오는게 이상하다 생각하는듯 싶었으나 그런 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여주에게 유일한 친한 친구이자 가족같은 존재가 되어줬다. 또한 그 5년이라는 시간동안 변함없이 지켜주고싶은 존재였다.
“ 후우, 으 나하테 수냄새나? “
“ 내가 김여주를 업은건지 술독을 업은건지 모르겠거든? “
“ 푸하! 그엄 오느부터 나을 김수독이라고 부러라! 크흐- “
제가 아직도 대딩인줄 아는지 내일이 없는것처럼 술을 들이부은 여주를 익숙하게 업었다. 업은 폼새가 어색하지 않은건 대학시절 4년 내내 술에 죽고 사는 여주를 들춰업고 집에 데려다준 경력 덕분이리라.
“ 야 간지러워 “
술을 먹고 업힐때마다 제 얼굴을 목덜미에 폭 묻을때마다 느낌이 이상했다. 그런 여주에게 어깨를 으쓱이니 하지말라는 짓은 꼭 한번씩 더하는 성격답게 얼굴을 부벼댄다.
“ 기집애가 아무한테나 막... “
“ 너가 아무냐? “
그렇다고 틀린 말은 안한다. 맞는 말만 골라하기에 할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고 익숙한 길을 걸었다. 밤바람이 선선한게 기분이 좋았다. 이 집도 참 오래 산다. 문득 드는 생각에 퍽 웃었다. 얘도 참 오래 만나고.
“ 우리집에서 자고갈꺼야? “
“ 까분다 “
“ 에라이, 자고가지 “
아까보다 정확해진 발음을 보면 술이 깬게 분명한데 객기부리는 척을 한다. 안봐도 동그랗게 눈을 뜨고 쳐다보고있겠지. 그 표정에 뭐든 져줬으니까. 익숙하게 도어락을 풀고 소파에 여주를 내려놓고는 후-하고 한숨을 쉬었다.
“ 살 안뺄래? 난 무슨 죄냐? “
“ 다 너 운동 되라고 하는 내 배려다 임마 “
처음 봤을때 그 김여주의 모습은 대체 어딜갔는지 능구렁이가 다 됐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곧장 현관문으로 향했다.
“ 누가 잡아먹어? 좀 있다가 “
“ 내일 출근해야해 “
“ 나도거든 “
입고있던 블라우스가 갑갑했는지 단추를 두어개 푸는 여주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위험한 가시나. 더 위험한건 저 행동이 무슨 의민지를 전혀 모른다는거다. 소파에 철푸덕 누운 여주가 제 앞을 팡팡 친다. 앞으로 오라는 뜻이였다. 홀린듯 고분고분하게 앞으로 가서 앉자 씩 웃는다.
“ ...뭘 웃어 “
“ 오늘이 무슨 날이게 “
“ ... “
“ 우리 아빠 생일 “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를 리 없었다. 매년 이 날만 되면 나사 하나 빠진 인형처럼 정신을 놓고 살았으니까. 콧잔등에 미끄러진 여주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볼을 두어번 쓰다듬다가 손에 힘을 주어 깍지를 꼈다. 나름의 위로였다. 그런 저를 모를 리 없는 여주가 퍽 웃었다. 고마워서.
“ 자고 가 “
“ ...너 되게 치사한거 알지? “
“ 뭐가 “
“ 남자한테 그런 말 함부로하는거 아니야 “
얼굴을 찡그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여기저기 상처난 새가 제 품에 들어와있는걸 안아주고싶어 죽겠는데 그 새가 자꾸 절 잡아먹으란다. 미치겠다 정말. 늦은 새벽 둘의 대화가 거실을 잔잔하게 울렸다. 아무런 미동 없이 눈을 꿈뻑이던 여주가 소파에서 내려와 제 품에 안겼다.
“ 너가 없었으면 난 어떻게 살았을까 “
" ... "
" 아마 지금처럼 행복하진 않았을거야 "
“ ... “
“ 우리 고딩때 너가 나한테 친한척 하기 시작했을때 말야 “
“ ... “
“ 그땐 뭐 이런 놈이 다있나 싶었거든? “
“ ... “
“ 근데 생각해보면, “
“ ... “
“ 너가 나한테 왔던 이후로 널 사랑하지 않은 순간은 없었어 “
“ ... “
“ 물론 지금도 “
심장이 하늘에서 땅으로 쿵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더없이 솔직한 제 감정을 털어놓는 여주에 정신이 아찔했다. 풍기는 술냄새에 취한건지 몽롱하기까지 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쪼그려 앉아 흐느끼며 울던 그 모습은 무방비 상태의 제 가슴에 들이받듯 들어왔다. 이 고백도 그랬다.
“ ...왜 아무말이 없, “
두 입술이 포개졌다. 벌어진 입술 틈을 틈없이 채웠다. 둘 사이에 어떤 공백도 허락하지 못한다는듯 여주를 꽉 껴안았다. 스며들다. 그 짧은 문장은 너와 나를 설명하기 충분했다. 강렬하지도, 지독하지도 않은 너는 나도 모르는 새에 내게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 사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