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민은 동진의 집에서 본의 아니게 밤을 지샜다. 제 핸드폰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팔을 고쳐 누워가며.
영민은 이름이에게 전화를 했었다. 이왕이면 목소리가 듣고 싶었지만 조금 이르다 싶어서 신호음이 가는 걸
듣고만 있다가 종료 버튼을 터치했다. 뭐, 물론 동진이 옆에서 저를 음흉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는 것도 한몫했다.
듣고 싶었던 목소리를 못 들어서인지 미련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아서 이 다 늦어버린 새벽녘에, 영민은 여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자겠지."
시간은 새벽 세시를 넘어가고 있었지만 코까지 골며 잠들어있는 동진과 달리 영민은 결국 몸을 일으켜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자는 걸 알면서도 영민은 제 카카오톡에 자동친구추가된 이름이의 프로필을
몇번이고 눌렀다 껐다 하길 반복했다. 아, 이 사진 저장하고 싶다.
영민은 아무래도 여자에게 빠진 게 확실했다.
잠도 못 잘 정도로 이렇게 덜컥 빠질 줄이야, 누가 알았나.
영민은 우유부단함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좋고 싫음이 분명해서 질질 끄는 법이 없었고
제 의견과 생각에 대해 꽤 고집을 가지고 있는 편이랄까. 그래서 동진의 이름을 빼겠다고 속 시원히 말해오는
여자의 다부짐이 제 마음에 쏙 들었다.
"...아, 망했다."
결국 영민은 프로필 사진을 터치하다 통화버튼을 누르는 실수를 했다.
'우리 보이스톡해요~'
영민이 제 머리를 헤집곤 한숨을 쉬었다. 미쳤다, 임영민. 미쳤냐, 임영민.
급하게 취소버튼을 눌렀지만 채팅방 상단에 뜬 메세지에 영민은 제 뺨이라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작 두번만에 여자에 대해 정확히 뭔가를 아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뭐라도 해보고 싶은 적은 또 처음이었다.
아침이 밝고 동진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샌 영민의 꼴을 발견하곤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동진이
영민의 옆에 앉다가 헐. 육성으로 내뱉었다. 설마, 이름때문에 잠도 안 잔 거? 실화냐! 곧 동진은 혀를 쯧하고 찼다.
미친, 임영민. 너 설마 금사빠냐?
..그건 형이지.
야, 니들이 몇 번 만났다고!
...지금부터 만나면 되지.
....니 입에서 나온 소리냐, 지금?
아, 시끄럽고. 이름 시간표나 카톡으로 보내줘요.
내가 무슨 큐피튼줄 아냐!
잔말말고요. 저 집에 갑니다. 형.
그 말과 동시에 영민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눈이 뻑뻑했다. 일단 오후 수업부터 갔다 와서.
영민은 지금 축구부 아침 연습하던 시절에나 뛸법한 스피드로 지하철역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영민의 다급함이 얼굴에서 느껴졌다. 그러니까 영민이 내달리게 된 이유의 서막은 불과 몇 분전이었다.
오후 1시 수업. 제 집까지 무사히 도착한 영민이 그제야 원인모를 긴장이 풀리는지
침대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겨우겨우 한시 수업에 맞춰 자리에 앉았는가 싶었더니.
제 주머니에서 울리는 짧은 진동소리 하나가 H대학교 임영민을 도로 일어나게 만들었다.
-전화했어요?
-아, 전화했어?
-덕분에 발표 잘했어, 고마워.
-선배랑 밥 먹을건데 너도 올래?
더 볼 게 있나. 만나러 가야지.
영민의 첫 자체휴강이었다.
-
영민은 지금 제 앞에서 밥을 먹고 있는 여자를 살피느라 제 밥은 안중에도 없었다.
여자는 제 옆에 앉은 동진이 칠칠맞다면서도 제 앞에 있는 휴지를 동진에게 건넸다. 영민의 눈썹이 한번 꿈틀댔다.
"선배, 턱에 진짜 구멍난거 아니에요?"
여자의 목소리에 다시 제 눈썹을 가라앉히려고 할 때쯤 동진은 제 흰색 티셔츠에 김치를 내리꽂았다.
"아, 내 옷!"
..진상이었다. 영민은 한숨을 쉬며 여자보다 먼저 동진에게 휴지를 내밀었다.
큐피트니 마니 하더니 여자와 밥을 먹는 순간에도 여자의 옆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선
여자가 온통 신경쓰게 만들고 있는 동진에 영민은 몇번이고 인내했다.
"나 화장실! 내꺼 뺏어먹지 마라."
"줘도 안 먹으니까 걱정말고 다녀오세요."
여자는 벌떡 일어서는 동진을 향해 직구를 날렸다. 영민은 그런 여자를 바라보다
동진을 향해 가죠, 좀. 하고 입모양을 냈다. 동진은 그런 영민을 보다 입을 삐죽이곤 제 가방을 들쳐멨다.
"서러워서 간다!"
아, 저 형 입방정.
영문은 모르지만 동진이 한참을 돌아오지 않자 여자는 조금 어색한듯 입을 벙긋거리다 곧 영민을 향해 말해왔다.
"..선배, 지금 먹튀한거죠."
"....큭."
여자의 입에서 생뚱맞게 나온 단어가 여자와 퍽 잘 어울렸다. 여자에게 동진이형 좋아하냐고 물어보려던
제 걱정이 무색할만큼. 정작 당사자인 여자는 영민이 왜 웃는지 몰라 눈을 깜빡거리다 결국 영민을 따라 웃어버리는 걸로 마무리했다.
먹튀한걸로 납득된 동진의 몫과, 여자의 몫까지 영민이 모두 계산했다. 어, 내가 살게!
여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저은 영민이 커피 마실래?하고 물었다.
"어, 어? 그럼 커피는 내가 살게!"
"아니다, 내가 살게."
커피는 저가 산다더니, 정작 여자는 커피를 못 마시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메뉴를 보다가 조금 민망한 듯 제 볼을 긁적이며
영민에게 말했다. 나는 딸기스무디 먹을게. 너는?
영민은 그런 여자를 내려다보다 딸기스무디 두개요. 하고 여자가 미처 손쓸새도 없이 계산을 마쳤다.
"내가 사려고 했는데."
여자의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서 영민은 제법 자연스레 여자에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럼, 다음번엔 네가 사라."
또 만나게.
영민은 여자가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선에서 도서관 앞까지 여자와 함께 걸었다. 제 학교보다 이 학교 도서관을
어째 더 많이 보는 거 같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미안."
"뭐가 미안해, 밥도 잘 먹었고."
"아니, 그건 그런데. 네가 다 사고 그랬잖아."
"너도 사줄거라며."
여자가 그 말에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게 꼭 복숭아, 뭐 그런거 같아서 영민은 고개를 돌리고 혀를 뺐다 넣었다.
"..전화해도 되냐."
"어? 아...응! 조심해서 가. 오늘 고마웠어."
여자가 손을 흔들었다. 영민은 제 눈에 보이는 그 살랑거리는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고 올라와 잠깐 새에 제 속을 달래야 했다.
발걸음을 억지로 돌리던 영민이 다시 등을 돌려 조금 빠른 걸음으로 여자를 향해 도로 걸어갔다.
"성이름. 이번주 토요일날 소개팅 안 할래."
".....에?"
나중은 절대 흑역사가 될 지 몰라도, 역시 이게 제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영민이 한번더 쐐기를 박았다.
"나랑 소개팅하자.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