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 삼류 드라마
01
학교를 가지 않은 동혁은 하루를 내리 따분하게 보냈다. 정오가 넘은 느즈막한 시간에 일어나 민형이 아무렇게나 태워두고 나간 후라이팬을 깔끔하게 닦아 넣어놓는 것도 동혁의 몫이었다. 눈 뜨자마자 자신도 씻고, 후라이팬도 씻긴 동혁이 다음으로 한 일은 산책이었다. 동네 산책. 동혁과 민형이 사는 동네는 도시 치고는 아직 정돈이 덜 된 곳이었다. 달동네라고 하기에는 나름 번듯하고, 그렇다고 완연한 도시라고 하기에는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들과 상가들에 비해 초라한 꼴이었다.
"어, 아저씨 이사 가세요?"
"오, 동혁이냐. 이제 내년이면 아들도 초등학교 입학을 해야 되니 조금 더 트인 곳으로 가야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이민형이 엄청 아쉬워 할 것 같은데... 언제 가세요?"
"집은 내일까지 비울 것 같은데."
평소 서글한 인상으로 동혁과 민형이 잘 따르던 가까운 집 아저씨의 이사 소식을 접한 동혁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사를 오는 사람이 누가 될까 생각하며 언덕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랐다. 저 멀리서 새입자는 토요일부터 온다더라 외치는 아저씨의 목소리를 들은 동혁이 몸을 틀어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다시 제가 오를 길을 바라본다.
아, 더럽게 힘드네. 몇 번을 올라도 적응이 안 돼. 동혁은 슬슬 더워지는 날씨에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이내 도달한 스무 개 남짓한 계단의 끝자락.
"역시 시원하네."
파란 하늘과 푸릇한 풀, 동혁은 매마른 숨을 뱉어내고 풀밭에 드러누웠다. 흘러가는 구름을 가만히 올려다 보던 동혁은 불현듯 스쳐지나가는 자신의 어머니 생각에 인상을 구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좆같네... 이민형 따라 학교나 갈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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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소개."
"어... 안녕, 나는 김시민이라고 해. 잘 부탁할게."
알아, 나도 안다고. 고삼 중순이나 돼서 전학 오는 사람 몇 안 되는 거 나도 잘 아는데 그렇게 신기하다는 눈으로 쳐다볼 거 없잖아? 호기심을 가득 담은 반 애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와중에 다행스러웠던 건 짝 없이 혼자 앉는 자리 배치였다는 것과, 내가 앉은 자리 앞 친구가 오늘 학교를 오지 않아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는 것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선생님은 반을 나가셨고 이방인인 나를 향한 눈길도 잠시, 아이들은 제 공부를 하기 바빠 펜과 샤프를 잡았다. 사각사각, 적막한 공간을 가득 채우는 펜 소리에 나도 뭔가 해야 될 것 같은 부담감을 안고 가방을 열었지만...
"하아..."
교과서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네이비색 가방 안을 채우고 있는 건 노트 몇 권과 필통. 이거라도 꺼내둬야 좀 덜 민망하겠다 싶어서 노트 세 권 중 두 권을 서랍장에 밀어넣고 한 권은 곱게 펴서 책상 위에 필통과 함께 올렸다. 나름 행색이라도 갖춘 것 같은 뿌듯함을 뒤로하고 청천벽력 같은 첫 수업 시간이 왔으니... 필기만 받아적으면 되겠지 생각한 나의 뇌를 완전 뒤집은 첫 수업 선생님의 말은 옆 친구와 함께 교과서를 보겠니, 였다.
"네? 아... 선생님 저는..."
"얼른 자리 붙여야지 수업 시작하지."
"아... 네..."
울며 겨자먹기로 쳐다본 왼쪽에는 교과서가 마치 제 방 베개라도 되는 듯 베고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친구의 뒤통수가 보였고, 이내 고개를 돌린 반대편에는 뚱한 얼굴로 칠판을 응시하고 있는 어디서 본 것 같은 인상의 남자애가 있었다. 정면만 보고 있는 녀석에게 먼저 말도 못 꺼내고 있으니 보고 있던 선생님께서 시민이랑 교과서 좀 같이 보자는 말을 꺼내셨다. 그 애는 달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제 책상을 반쯤 내쪽으로 밀어왔다.
"뭐 해, 안 붙이고."
멍청하게 그 애가 취하는 행동을 보고만 있던 나는 나즈막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내 책상을 오른쪽으로 밀었다. 책상 사이에 반 걸쳐진 문학 교과서. 뭐라고 적힌건지 글자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책상을 밀 때 눈에 들어온 그 애의 왼쪽 가슴팍에 정갈하게 붙여진 명찰의 이민형이라는 이름 세 글자만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수업 세 개 정도를 하며 알게된 것은, 이민형은 수업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칠판만 쳐다본다는 것이었다. 손에 쥐어진 까만 샤프가 움직이는 때는 이민형이 지루한지 샤프 뚜껑을 딸칵 딸칵 누르거나 책상 위를 뾰족한 샤프 끝으로 두어 번 톡톡 치는 경우 정도였다. 점심 시간, 모두가 급식을 먹기 위해 학교 1층에 있다는 급식실로 향했을 때도 이민형은 십 분이 넘도록 제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턱을 괴고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워 돌리는 채로. 그리고 나는 무슨 배짱에서인지 세상 모든 것들이 따분하다는 눈을 하고 있는 이민형에게 말을 걸어버리고 말았다.
"저기, 넌 점심 안 먹어?"
"아니, 기다리는 중인데."
"기다리는 중...?"
"지금 가면 사람 많아서. 가서 서서 기다리느니 앉아 있다 가려고."
"아..."
이민형의 대답을 끝으로 우리의 대화는 끊겼다. 꿀 먹은 벙어리 상태로 책상만 쳐다보다 답답함에 하늘이라도 볼 요량으로 창문쪽을 바라보면 이민형이 내게 물어온다. 그러는 너는. 무슨 의미일까 하는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가 그 애에게 했던 질문과 같은 맥락의 것이겠지.
"나 급식 신청을 아직 안 해서."
내 대답을 들은 이민형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시간이 시작된 지 십오 분이 지난 때였다. 드르륵, 이민형이 뒷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안 오냐."
"어? 나 급식 신청..."
"오늘 학교 빠진 게으른 새끼 하나 있으니까 걔 대신 먹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잠시, 턱짓을 하며 나를 재촉하는 이민형을 급하게 따라나섰다. 밥을 먹는 와중에도, 남은 수업을 듣는 와중에도 어떤 행위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적은 양의 밥을 입에 넣고 씹는 그 애, 샤프로 손장난을 치며 칠판만을 바라보는 그 애. 뭐지 이건. 마음이,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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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생 왔다고?"
"어, 너 없어서 네 밥..."
"여자, 남자?"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