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이상형 님
시야가 흔들리고 골이 울린다. 으, 어지러워. 며칠 연속으로 휘몰아치는 과제에 치여 밥도 안 챙기고 학교를 다니다 보니 멍멍이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덜컥 걸려버렸다. 하여튼, 김여주. 철근도 씹어 먹을 것처럼 다니면서 체력 약한 건 알아줘야 돼요.
지하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문 바로 옆 자리에 앉고는 차가운 쇠봉에 뜨거운 이마를 가져다 댄다. 아, 좀 살 것 같네. 퇴근 시간 좀 지나서 사람이 별로 없나. 열차 안도 조용하고 아까 털어넣은 약 기운 때문인지 잠이... 오... 네...
...아, 잠들어 버렸다. 한 5분 잔 것 같은데, 지금 어디쯤 왔지? 쉽게 뜨이지 않는 눈을 느릿하게 꿈뻑이며 다음 역을 알리는 전광판을 보는데, 헐? 집에 도착하기까지 다섯 정거장이 채 남지 않은 위치였다. 못해도 30분은 잤네. 내가 많이 아프긴 한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며 가방을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자느라 뻐근해진 목을 살살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는데 문 앞에 서있는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런데 그 남자가...
미친, 내 이상형.
나의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강아지 같이 축 쳐진 눈에 뽀얗고 어딘가 애기애기한... 모성애 자극하는 외모를 가진 남자. 근데, 왓? 나 지금 완전 폐인인데? 아침에 일어났더니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팠던 것이 화근이었다. 화장은 커녕 선크림만 대충 바른 뒤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내가 옷을 입은 건지, 옷이 나를 입은 건지 모를 만큼 품이 큰 후드티를 대충 꿰어입고 나와 강의에 찌들어 피곤함까지 장착한 얼굴은 절!대! 내 이상형 님께 보여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세상에, 신이시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다시 힐끗 눈을 돌린 나는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눈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아, 진짜. 그렇게 바보같이 놀라면서 피할 건 뭐람. 그런데 이 분도 날 계속 쳐다보는 건가. 혹시... 에이, 설마.
혹시나 하고 다시 시선을 돌리면 이상형 님은 문에 달린 창 밖만 보고 있었다. 역시... 근데 옆 모습도 잘생겼다, 어쩜. 이렇게 완벽하게 내 이상형이라니. 곧 내려야 하는데 정녕 이 남자를 그냥 보내야 하는 건가.
한참을 이 상태에도 철판을 깔고 번호를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며 앉아있는데 지하철 방송이 귓가에 울렸다.
이번 역은 ㅁㅁ역, ㅁㅁ역 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This stop is...
망했어, 망했어. 혹시 같은 역에서 내리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품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상형 님의 옆에 섰다.
의식하지 말자, 신경쓰지 말자... 혼자 되뇌이는데 옆에서 이상형 님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왜...? 혹시 막 내 생각 읽을 수 있는 건가. 그럼 수치사인데- 와 같은 뻘 생각을 하며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며 문만 쳐다보고 있는데 몇 초 뒤 그 시선이 거두어졌다. 역시, 뭐 묻었었나...
문이 열리고 지하철을 벗어나며 혹시 여기서 내렸나 기대하며 뒤를 힐끔 보는데 이상형 님은 그 자리 그대로 서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그래, 내 주제에 연애는 무슨... 가서 잠이나 자자. 그리고 그날 밤 난 이상형 님이 나오는 꿈을 꿨다.
이상형 님을 앓으며 혹여나 그를 다시 만날까 매일같이 화장에, 옷에 신경쓰느라 수업에 제때 들어간 적이 없은 지 며칠이 지나고, 내 머릿속에서 이상형 님에 대한 생각이 차츰 옅어질 때 즈음 -그래봤자 하루에 500번 정도 생각하던 게 200번으로 줄은 정도- 나는 지하철에서 그를 만나는 걸 이미 포기하고 난 뒤였다. 그래, 연예인이었다고 생각하자. 내 인생에 절대 없을 그런...
현실을 자각하고 슬픔에 빠져 허우적 대는데 동기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여주야! 오늘 홍대 콜?
-홍대는 무슨 홍대야. 피곤해...
-아, 왜. 요즘 너 빡세게 꾸미고 다니잖아. 처음에 넌 줄 못 알아볼 뻔. 너 우리 과 여신이야, 여신.
-뭐래, 여신 다 죽었다. 아무튼 가서 뭐 할 건데.
-가서 뭐 하겠어. 술이지, 술!
-됐다, 됐어. 나 술도 잘 못마시...
그때 이상형 님이 떠오르며 (혼자) 실연당한 내 처지가 떠올랐다. 그래, (혼자 한) 이별에는 소주지...
-콜, 홍대 가자. 오늘 마시고 죽자!
는 무슨. 지들이 먼저 죽었네.
술을 잘 못 마시는 터라 천천히 마신 나와 달리 왜인지 신나서 부어라, 마셔라 한 동기들은 홍대에 도착해 자리에 앉은 지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뻗어버렸다. 세 명 중 그나마 멀쩡한 동기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챙겨 숙취해소제 한 병씩 들려준 뒤 홍대 거리 벤치에 털썩 앉았다. 저 웬수들... 내가 다음부터 너희들이랑 술 마시나 봐라.
벤치에 앉아 멍하니 동기들이 술에서 조금 깨기를 기다리는데 기타 소리와 함께 기분 좋아지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아, 근처에서 버스킹 하나 보네. 이것들 정신 차릴 때까지만 구경해볼까. 하고 발걸음이 향한 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높은 신발을 신었어도 보이지 않는 노래 소리의 근원에 여기저기 알짱거리다 측면 쪽에 빈자리가 난 걸 보고 쪼르르 달려가 자리를 잡았다.
드디어 보이네. 기타를 튕기는 손에서 따뜻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입, 그리고 그 얼굴로 시선이 옮겨 갔을 때...
미친, 내 이상형...
나의 이상형 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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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일을 저질렀네요... 재환이 주인공인 글이 너무나도 쓰고 싶었기 때문에... 번외가 있을 예정입니다. 예정... 시험이 끝나고 돌아올 수도 있어요... 그리고 둘이 연애하는 모습도 계속 써나가고 싶은데 제 게으름이 도와줄까 싶네요. 여러분의 의견을 받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