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궤도
이항대립 作
몽롱한 기운에 눈이 떠졌다.
까맣게 그을렸던 시선의 흐림이 점차 뚜렸해지면서 어지럼증을 유발했다. 지구가 회전하는지, 내가 도는지 토기가 올라올 지경이었다. 저녁노을이 높은 고층들을 등지고 서서히 모습을 감춰갈 때 나는 이상한 기류를 느꼈다. 내 몸을 음습하는 음침한 기운. 그리고 무섭도록 고요해진 주위. 시선을 황급히 돌려 인기척을 찾으려 했지만 이내 관둘 수밖에 없었다. 마진 편에 있던 편의점도, 시끄럽게 가스를 뿜어내던 버스와 차들도. 그리고 활개를 치던 사람들도, 모두 사라진 후였기 때문이었다.
01
횡단보도 한 블록 옆에 위치한 한대의 지프.
이곳엔 이 차 한 대 뿐이었다. 붉은 핏빛의 노을과 섬뜩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쉬이 발을 떼기 어렵게 만들었다. 혹시 처 지프차에 누가 타있을까? 생각하며 그곳으로 갔지만 약올리듯 텅 빈 통체만 구경해야 했다. 편의점도 마찬가지. 환한 조명을 비추며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진열대는 온데간데없고 깨진 유리창과, 깜빡이며 생을 다한 조명만이 편의점이 긴 시간동안 폐가로 변질 됐다는 것을 알려 줄 뿐이었다.
마치 같은 공간에 다른 시공간으로 동떨어진 기분.
차츰 주변이 정리가 되고나자 이제 여기서 뭘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어떻게 됐을까, 엄마 아빠는 있을까, 여긴 대체 어딜까, 난 어디에 온 것일까. 수 만개의 물음들이 목적 없이 생겨나며 나를 극한의 공포로 몰아갔다.
결론은 하나, 여긴 지구가 아니다.
잘 안 떨어지는 발걸음이 추를 단듯 천근만근 무겁게만 느껴졌다.
긴 고심 끝에 낸 결과는 간단했다. 집.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나만의 은신처가 있다는 것일까. 씁쓸한 위안을 삼으며 익숙하면서도 낯선 골목으로 방향을 돌렸다. 둑 언저리로 나있는 여러 개의 꽃들이 보이자 알록달록 색이 칠해진 그것들이 문뜩 부러워졌다. 적어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테니. 거기에 무엇보다도 혼자인 나보다는 외롭지 않겠다는 별 영양가 없는 생각이 더해지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참으로 이상하지. 평소 눈에 차지도 않던 꽃들이 다 부럽다니.
이곳은 나를 변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지도.
-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눈을 감아도 찾을 수 있을 동에 발을 들였다. 익숙한 계단을 오르자 어느덧 캄캄해진 실내는 계단과 평지가 분간이 되질 않게 만들었다. 덕분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계단참이 있는지도 모르고 헛 발을 들여 스텝이 꼬인다거나 계단이 없는 평지인 줄 알고 걸었다가 정강이에 큰 멍이 든다거나, 누가 본다면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주위는 단 한 사람도 없는듯 했다. 복도 층층마다 길을 밝혀주던 빛이 없으니 가는 것도 고역이 돼버렸다. 그리고 난 한가지 깨닫게 되었다.
이 아파트는 전기의 배급이 끊겼다는 것.
육중한 철문이 끼익 소음을 내며 열렸다.
고요한 복도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메아리쳐 공명했다. 오늘따라 섬뜩하리만치 울리는 이명에 문을 다시 닫기도 망설여졌다. 소음이 복도 끝이자 시작인 쪽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문을 닫으려 할 때였다.
'타타타타닥ㅡ.'
누군가 복도를 뛰는 소리. 사람이 두 발로 뛰는 간격이라 하기엔 너무나 빠른 소리였다. 마치 포유류가 네 발로 뛰듯이 연속해서 울리는 이질적인 소음이었다. 무서운 마음이 빨리 몸을 숨기라고 명령했지만 단순한 인간의 뇌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 비례하게 어느새 현관으로 들였던 상체를 빼내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왼쪽에서 울리는 기이한 소리. 헉헉대는 거친 숨소리, 사람의 몸놀림으로는 절대 날 수없는 발자국 소리. 어둠이 자욱한 터라 자세히 보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뜀박질.
타타타타타타닥ㅡ.
타타타타타타닥ㅡ.
정확히 복도 왼쪽에서 나는 보고야 말았다.
네발로, 아니. 두 다리와 두 팔로 기어 오듯이 뛰어오는 괴상한 인간체를. 달빛이 드리우는 공간으로 그 괴물체가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고 나는 경악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분명 모습은 사람의 모습이지만 멀리서도 튈 정도의 붉은 눈동자와 땅에 끌리는 긴 머리카락. 그리고 내 눈을 의심케 했던 보행 자세. 일반적인 사람보다 뼈가 휘어 양 다리가 좌우로 길게 늘어져있었고 팔도 마찬가지로 거미의 다리처럼 쭉 뻗어 팔꿈치가 높이 치켜져 있는 게 온몸의 털이 곧두 설 정도의 흉직한 형체었다.
입에서 뚝뚝 떨어지는 묽은 액이 땅에 추락할 때마다 그 부근이 염산에 닿은 듯 검게 변색되며 녹았고, 난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생명체가 반갑다기보다는 미친 듯한 두려움만 느끼며 숨을 죽여야 했다.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더 선명하게 고막을 울리고 나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 사람처럼 허겁지겁 집으로 몸을 숨겼다. 현관문을 쾅 닫았지만 건전지가 없는 도어록이 고삐 풀린 말처럼 잠금장치를 실행시키지 못하고 맥없는 무답으로 응했다. 그때문에 덜컥이며 열리는 문을 최상의 힘으로 붙잡으며 난 미친 사람처럼 안전고리를 껴야만 했다.
사람이 두드리는 것처럼 쿵쿵대며 나를 육박해오는 현관문 밖의 괴생체를 느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얼굴 전체를 흠뻑 적신 땀과 눈물 자국들을 닦을새도 없이 덜컹대는 문을 예의주시할 뿐. 별다른 움직임을 할 여력이 없었다. 저 괴물은 뭐지.라는 기본적인 생각보다는 살아야 한다는 원초적인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난 살아야 해. 입으로는 영혼 없는 문장들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내가 이런 말을 했었는지도 모를 만큼의 주절거림이었다.
한동안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던 괴생체도 지쳤는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잠잠해졌다.
"뭐야....."
이제 갔나?
한참을 쥐 죽은 듯이 현관 앞에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펴지지 않는 다리를 펴고는 조심스레 기척이 들리지 않게 현관문 앞에 가 섰다. 이런 걸 가지고 오금이 저린다고 해야 하나. 외시경을 이용해 괴생체가 떠났는지 확인하려 투시했지만 애석하게도 꽤나 높은 곳에 위치한 구멍이 바닥에 붙어있을 괴생체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필 처음 만나는 생명체가 저런 괴물이라니. 앞날이 캄캄하게 드리워졌다.
-
3시간이 흘렀다. 디지털의 붉은 점선이 11:00를 나타냈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서 도움을 요청할 수도, 마음 편히 눈을 붙일 수도 없었다. 아직도 덜덜 떨리는 두 다리와 팔은 여차하며 늘어질 만큼 두려움에 잠식되어 있었다. 나는 이제 여기서 뭘 할 수 있을까, 여기엔 괴물들만 득실 거리는 것일까, 이건 꿈일 거야. 꿈.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은 강한 충동에 휩싸이며 거실 한 가운데에 풀썩 주저앉았다가, 땀으로 축축해진 머리를 쥐어잡으며 다시 한번 생각에 잠겼다.
우선은 두 가지의 고안을 생각해 내야 한다.
첫 번째, 이 상황이 꿈이라는 전제하에 대안법.
두 번째,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전제하에 대안법.
다시 머리를 굴렸다.
꿈이라면 주로 위기 상황에 놓일 때 깨어나곤 한다. 예를 들면 이곳 6층에서 떨어진다던가, 아까 그 괴생체에게 잡혀 죽는다던가.라는 극단적인 상황 말이다. 하지만, 꿈이 아닌 현실이라면? 당연한 답이다. 죽음. 그것만이 날 기다린다는 거겠지.
그러면 두 번째에 대한 대안법을 생각해야 해.
내가 살기 위해 칼을 드느냐, 아니면 평생을 저 괴물을 피해 도망자 신세로 사느냐. 난...
겁쟁이다.
칼을 든다는 것 자체는 생각해 볼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 묘면 하게 된 인간이 자신의 팔을 자르기도 하는데, 그렇게 나온 것처럼 나도 그 괴물들을 죽이게 될까? 생각의 회로가 빨라졌다. 이러면 이렇고 저러면 저렇고 머리를 쥐여 잡고 생각에 잠겨 있기를 3시간. 한쪽 벽면이 크게 창으로 뚫려있는 곳에서 갑자기 작은 기척이 들렸다. 좀 전에 있었던 경험때문인지 작은 소리에도 반응하는 심장이 쿵쾅댔고 입은 바싹 말라갔다. 무언가 둔탁하게 내리치는 소리.
누가 망치질이라도 하듯 거실 전체가 쿵쿵대며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뭐지. 두렵다. 무섭다. 죽고 싶다. 시선이 유리 문 밖으로 향하고 소리는 점차 근처에 다다랐다.
끼이이이이익ㅡ!
아까 그 괴생체가 이번에는 돈벌레처럼 묽은 점액을 팔 다리에 꽁꽁 싸맨 채 벽을 타고 한발 한발 올라온 것이었다.
"으아아아악-!!"
"끼이이이익-!"
목에 핏대가 설 만큼 공포 어린 소리를 지르자, 괴물은 아까보다 더 많은 양의 묽은 침을 흘리며 오른쪽 팔로 유리를 강하게 내려쳤다. 흡사 포식자 망에 걸린 피식자의 모습. 한번 두 번 내리칠 때마다 금이 가는 유리에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첫 번째 대안법을 떠올렸다. 그래, 이건 꿈이야!
마음을 다잡고 꿈에서 깨어나길 바랄때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주위가 적막해졌다.
"..........."
눈을 스르륵 뜨며 앞을 바라보자 배를 내놓고 유리를 부시던 괴물이 없다. 대신에 핏방울들이 여기저기 튀어있었다. 핏물이 붉은색이 아닌 터키옥색을 띄는 형태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몇 번의 총탄 소리. 아까는 괴물의 초음파 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었는데 분명 총탄 소리였다. 사람이라도 있는 것일까? 구세주를 만난 것 마냥 안도감이 들며 총을 든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베란다로 다가갔다. 아래로 보이는 지프 한 대.
아까 봤던 횡단보도 옆 지프와 같은 모양새였다. 내가 봤던 지프를 누가 타고 온 것일까. 금이 나 잔뜩 갈라진 유리문을 조심스레 열며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아까 보았던 얌전한 지프와는 달리, 차 위에 달린 서치라이트와 그 옆으로 두어 개가 더 붙은 안개등이 평범한 지프의 용도는 아닌듯했다. 운전석에서 누군가 부산스레 움직이는 형상이 잡혔다. 검은 그림자와 같은 모습으로 총을 장전하는 남자를 대신에 뒷좌석에 있던 다른 사내가 내리려 했는지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두 개의 안개등 중 하나를 꺾으며 사격 자세로 괴물이 쓰러져있는 곳으로 다가가더니 이내 총탄이 한번 더 울렸다. 그리고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튄 핏자국을 보려 했는지 사내가 고개를 올려 내 쪽을 올려다봤다. 그리고는 놀란 듯 커지는 두 동공에 나는 밀담을 나눈 것을 훔쳐 듣다 괜히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사내가 코부터 턱까지 가리고 있던 검은 복면을 내리며 운전석을 흘낏 훔쳐봤다.
내가 불청객이라도 되는 건가?
날 버리고 가면 어떡하지? 생각지 못했던 사내의 반응에 몰려오는 근심을 하고 있을 때, 사내가 몸을 돌려 성큼성큼 운전석에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어어......."
멀어져 가는 사내에 불안한 마음이 일자 외마디 비명조차, 구조 요청조차 목구멍에서 소리가 새어 나지 않았다. 꽉 막힌 성대에서 나오는 음성은 내 귀에서만 윙윙댈 정도의 앓는 소리일 뿐 그들에게까지 닿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차를 타고 떠날 줄만 알았던 내 예상과는 다르게 남자가 사내를 두고 이곳을 떠나려는 듯 지프차가 천천히 직진했다.
밝은 서치라이트를 선두로 달리는 차의 뒷모습을 보던 나와 사내가 차가 완전히 아파트를 빠져나가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를 바라봤다. 남자의 얼굴이 달빛을 받자 내가 상상했던 구세주의 이미지처럼 환하게 빛이 났다.
** (제 필명을 누르면 홈으로 이동됩니다.)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요즘 찐금수저 판별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