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궁궐안. 저 멀리서 붉은 빛들을 들고 사람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궁궐안은 그런 사람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조용하기만 했다. 마치, 그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 마냥. 사람들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그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걸 알고 있는 지호는 용포를 입은 채 저하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어릴 적 저를 데리고 들어온 재효를 생각하며 그에게 해줄 마지막 충성심이였다. 지호는 이 궁안에 자신밖에 남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부시럭 거리며 마루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자연스레 눈을 뜬 지호의 앞에 붉은 용포를 입고 있는 재효가 나타났다. 당황한 지호를 아는지 모르는지 엄한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지호를 꾸짖기 시작했다.
왜 그 자리에 앉아있느냐.
…저하. 어찌하여…
그 자리에 무슨 자리인지 아는게야?
태평한 재효의 얼굴에 지호의 얼굴에 어두움이 번졌다. 저하, 어째서!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아시는것입니까? 저하, 빨리 도망치십시오! 지호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는 재효가 그의 앞에 손에 들고 있던 옷을 던졌다. 이 옷을 무엇이더냐, 나보고 지금 이 초라한 옷을 입으라고? 재효의 입에서 말 한마디가 나올때마다 지호의 얼굴은 울먹임으로 가득했다. 저하, 제발… 제 말을 들어주시옵소서…. 내게 지금 명령하는 것이냐? 재효의 말에 지호는 고개만 도리질 치며 그의 앞에 무릎을 꿁고 앉았다. 저하… 저하… 도망치십시오. 그런 지호를 보는둥 마는둥 하던 재효의 눈에 둥근 달이 들어왔다. 밝구나.
저하, 제발 도망 치십시오…
…달이, 참 밝구나.
저하! 왜 소인의 말을 듣질 않으십니까!
…난 언제나 네 말을 듣고 있다. 웃으며 나를 부를때, 울며 나를 부를 때, 노여워하며 나를 부를 때, 겁에 질려 나를 부를 때.
웃으며 말하며 재효가 그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주며 그를 일으켰다. 지호는 재효의 손길에 따라 일어나고 멍하니 재효를 보았다. 난 언제나 네 말을 듣고 있단다. 울면서 나를 부르는 네 목소리를 들을때면 내 가슴까지 저릿해지고. 네가 웃으며 내 이름을 부를 때면 나 또한 가슴이 간질거려 웃음이 나오더구나. 늘 나를 저하, 저하 하며 따를 때. 재효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리고 곧 그의 얼굴에 웃음이 아닌 슬픔이 드리웠다.
…헌데. 어찌하여 내 이름은 불러주지 않느냐.
…저하, 제발… 제발 도망치십시오….
지호야, 오늘 같은 날. 꼭 네 입에서 내 이름을 듣고 싶구나.
…저하, 저하…
불러주련, 어서.
…소인 어찌 그 이름을 입에…
명이다. 불러 보거라.
…저하, …재효, 저하…
그의 입이 슬몃 올라가며 잠시나마 달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걷혔다. 멀리 있던 붉은 빛들은 서서히 가까워 오고 지호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이 범벅이 되어있었다. 붉은 도포를 입은 재효의 손이 지호의 얼굴을 덮을 즈음에 지호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이 이젠 홍수라도 되는 냥 왈칵 쏟아지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저하, 저하… 애달픈 목소리가 재효의 귀로 들어와 어느새 쿵쿵 뛰는 심장까지 도달했다. 심장은 그 목소리를 듣고 반응이라도 하려는 듯 더 빠르고, 불안정하게 뛰기 시작했고 속과는 달리 겉은 지호를 다독이느라 차분하기 그지 없었다. 지호야. 그의 부드러운 음성에 울던 지호가 그의 손을 더 꽉 잡았다. 마치 힘을 풀기라도 하면 그가 꼭 달아날 것만 같았다.
내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저하, 부디… 저를 생각해서라도.
지호가 입고 있던 자신과 같은 붉은 도포를 조금씩 벗겨 내고 자신의 옆에 있던 푸른 두루마기를 입히기 시작했다. 팔을 벌려 보거라. 울며 고개만 도리질 치던 지호에게 혀를 차는 소리를 내며 다정스레 웃은 그가 지호의 얼굴을 손으로 문질러 본다. 지호야, 내 사람아. 그의 목소리가 더욱 따스하고 달콤할수록 지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한없이 깊어만 간다. 저하, 저하… 이러지 마세요, 저하…. 그의 애달픈 목소리에 듣는 사람의 콧잔등 마저 시큼해 질 따름인데 그의 눈은 꿈벅이지도 않고 옷을 입히기에 바빴다. 지호야, 내 말 잘 듣거라. 서서히 시끄러운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이 옷을 입고, 얼굴을 보이지 말거라. 우리가 자주 들락날락 거렸던 그 구멍을, 기억 하느냐?
말을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듯 반응없이 재효가 입은 용포를 더 꽉 쥐는 지호의 손에 슬며시 웃으며 그의 손을 덮고 살짝 힘을 주자 요술이라도 되는 냥 지호의 손에 힘이 풀려버렸다. 지호야, 그 곳으로 가거라. 그 곳으로 가서 조금만 더 뛰어가다 보면 우리가 놀던 외다리가 있을게야.
저하…
살아라.
…저하!
꼭 살아서, 날 위해 울어주거라.
…저, 저하
내 욕망이 지나치긴 하지만, 명이다. 내 마지막 명.
얼굴을 적시던 눈물을 다 닦아주자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듯 다시 눈물이 얼굴을 뒤엎기 시작했다. 쯧, 그리 울면 어쩌자는거냐. 내 마지막은 꼭 네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구나. 아예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하는 지호를 꽉 끌어안은 재효가 그의 등을 토닥이다가 양 손을 지호의 뒷통수에 올리며 조금씩 살살 다독이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어여쁜 머리도. 아름다운 목선도, 내겐 한 없이 작은 네 어깨도. 곧게 잘 뻗은 네 등도. 그리고…
지호를 안고 있던 손을 고쳐 잡아 그의 양 어깨를 쥐고 몸에서 떼어내자 용포를 적신 만큼 지호의 얼굴에 붙어있던 눈물자욱이 지워져있었다. 그것 보고 웃던 그는 부드럽게 용포르 얼굴을 마져 닦아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어여쁜, 니 얼굴도. 꼭 살아서, 날 위해….
기어이 울음이 터진 재효가 얼굴을 푹 숙였다가 눈물에 적신 눈으로 지호를 쳐다봤다. 마지막으로, 그 어여쁜 얼굴을 한 번 보자꾸나. 재효의 말에 금방이라도 울듯한 지호가 입술을 꾹 물며 웃어보였다.
난 네 모든것이 좋았다. 그래서 꼭 이 나라의 지아비가 되었을 때. 너를 내 처로 맞이하고 싶었다.
재효의 말에 놀란듯 지호의 눈이 커지자 지호의 몸을 빙글 돌려 등을 탁 소리 나게 밀쳤다. 빨리 가거라. 꼭 살아서, 날 찾거라. 재효의 말에 지호가 몸을 돌려 그를 쳐다봤다. 그 순간 달이 또다시 구름에 가려졌고 보이지 않는 재효의 얼굴에 지호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저하…. 지호야. 지호의 귀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내 너에게 물었지. 환생을 믿느냐고. 난 믿는다. 그러니 부디 꼭, 오래 살아서. 날 찾아주려무나.
저하….
혹여 내가 너를 알아보지 못 할 지라도.
…저, 하.
넌 꼭 나를 알아봐 주려무나.
…저하
내 사랑하는 지호야. 내 이름을 불러주렴.
…재, 효… 재효저하…
그래, 난 재효다. 네 저하가 아니라, 재효다. 가거라, 어서.
…재효!
지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영 열리지 않았으면 하는 문이 열리고 우르르 역적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재효에게 달려가려던 지호는 재효의 눈길에 몸을 멈췄다. 구름이 걷어지고 달이 비친다. 울고있는 재효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모양. 가거라. 지호는 눈을 꾹 감고 뛰었다. 지호의 모습을 볼 리 없던 역적들은 그저 앞에 용포를 쓰고 있는 재효에게 다가갔고 그의 붉은 용포 만큼 붉은 피가 번져나갔다. 지호야, 넌 보지 말거라. 네가 좋아하는 어여쁜 꽃이, 지금 내 용포에 물들고 있구나. 너 만큼 요망한, 그 붉은…. 재효의 눈이 감기고 지호의 눈에선 눈물이 떨어졌다. 엉엉 울며 개구멍을 지나 뛰니 재빠르게 지호의 팔을 끌어당겨 말에 안착 시켰고 그 뒤로 남자가 지호를 감싸듯 하며 말을 이끌고 그 숲을 빠져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로 범벅이 된 궁에 지호는 오열을 하며 몸을 버둥였지만 그런 그를 알기라도 할 듯 꽉 그를 끌어안은 호위무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울고있는 지호를 보자니 한숨이 나왔다. 갑작스레 저를 불러 마지막 명이니 지호를 보호하라는 말. 그게 갑작스럽게 내려진 재효의 명이었다. 차라리 저도 죽겠다고 발버둥치는 지호를 보며 지금이라도 죽으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 지호가 죽으면 네 앞에 나타나 너를 꾸짖을테야. 장난스레 말하던 재효가 떠올라 눈을 꾹 감고 산을 올랐다. 되도록, 멀리 도망가거라. 멀리. 재효의 말에 따라 정처없이 멀리 도망치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울며 죽지 못하는 지호도 우스웠다. 그리고 그날은 달이 무척이나 밝았다.
나비(懦悲)
일어나거라.
…자지, 않았습니다.
불편한 동행을 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지호의 행동에 민혁은 그저 묵묵히 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지호가 일어나면 그에게 먹을 아침을 차려주고, 그가 잠에 들면 늘 하던 대로 밖을 살피고. 드문드문 잠을 취하는 그런 일상의 반복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민혁에게 있어 재효는 최고의 왕이었다. 물론 아직 왕세자였지만 그에게는 왕이었다. 그 누구보다 빛나고 훌륭한. 물론, 그건 지호에게도 같았을 것이다. 지호에게 먹을 나물을 만들어 주고 일어선 그를 보며 지호가 슬며시 물었다. 어딜, 가십니까. 처음으로 입을 뗀 지호에 놀라운듯 민혁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가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상관하지 말거라. 민혁의 무뚝뚝한 어투에 결국 지호는 고개를 푹 숙이며 넘어가지도 않는 밥을 꾸역꾸역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언제까지 제 곁에 이렇게 남아계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왜 묻느냐.
…저와 있으신게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불편하다.
민혁의 말에 지호는 그저 손가락으로 제 옷고름만 만지작 거릴 뿐이다. 재효가 입혀준 처음이자 마지막 옷. 눈을 지그시 감은 지호가 아직 한참이나 남은 밥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만 하십시오.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당신을 위한것도, 저를 위한것도 아닙니다. 지호의 말에 가소롭다는듯 웃은 민혁이 제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의 행동에 놀란 지호는 입만 꾹 다물고 눈을 감을 뿐이었다. 내가 왜 이짓을 하는지 아느냐.
나도 너에게 말하고싶다. 내가 왜 이러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넌 몰라야 한다.
민혁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고 지호에게 그 한숨은 무거운 짐이 되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부들부들 지호의 떨림이 보이지만 애써 그것을 무시한 민혁이 다시 검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말 없이 뒤를 돌아 근처 마을로 내려왔다. 조금 소란스러운 마을에 민혁은 한숨만 내쉰채 조용히 사람들을 따라 길을 걸었고 지호의 헌 옷이 생각났다. 곧 죽어도 저는 옷을 벗지 않겠다, 다른 옷은 입지 않겠다 하는 지호에 민혁은 답답할 따름이었다. 이미 소낙비에도 맞고 더러운 흙물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갈아입지 않는다 박박 우기는 꼴이라니. 민혁은 늘 재효와 마을을 둘러볼때마다 이것이 지호에게 어울리겠다며 보여주던 색상의 옷감들이 기억에 남았다. 개나리를 닮은 노란 옷. 민혁은 그 옷을 쥐고 돈을 건넸다. 입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부병이라도 걸릴 것 같았다. 재효를 볼 면목이 없었다. 이미 보지 못할 사람이었지만. 민혁이 하늘을 올려다 봤다. 해가 참 맑다. 너무 맑아 그 안까지 들여보일정도로. 오늘따라 재효가 그리운 날이었다.
***
홀로 남겨진 지호가 옷고름이 풀어지기라도 할 듯 아슬아슬한 매듭을 만지작 거리다가 그것을 다시 묶지도 않은채 일어섰다. 옆을 지키고 있는 말을 가만히 보다가 민혁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고마움의 뜻이라도 되는 냥 제가 쉬고 있던 나무에 동앗줄을 고정시키고 말이 도망가지 않도록 한 후 다시 산을 올랐다. 분명 이 길이었다. 잠을 자지도 않고 눈만 슬쩍 뜬 채 늘 민혁이 걸어온 길을 봤다. 제가 누울 수 있게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산을 내려가던 민혁의 모습을 보던 지호는 고개만 도리질을 치고 다시 산을 올랐다. 이 길로 쭉 뻗어나가면, 재효가 있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그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아직도 재효의 죽음이 지호에게는 믿겨지지 않는 거짓과 같은 꿈이었다.
저하.
지금이라도 제 앞에 나타나 저를 껴안으며 많이 기다렸겠구나 하고 그 부드럽고 한없이 맑은 손으로 저를 쓰다듬어줄 것만 같았고 왜이리 얼굴이 상했느냐 하며 저를 걱정하고 내 끼니를 거르지 말라 몇번을 일렀거늘 하며 저를 꾸짖을 것만 같았다. 그리도 내가 보고싶더냐? 하며 저를 부끄럽게 만들 농을 내던질 것 같았고 웃으며 난 그랬다 하고 농과 섞인 진심을 내뱉을 것 같았다. 저하. 그의 생각에 서서히 다시 눈물이 차오르는 지호의 뒤로 날이 밝아졌다. 저하를 꼭 찾으러 가겠습니다. 저하를 꼭 찾겠습니다. 저 또한 환생을 믿습니다. 허나, 저는. 저하의 죽음을 믿지 않습니다. 저하는, 꼭, 그 자리에…
***
노란 옷을 들고오던 민혁이 멀리서 말만 시끄럽게 울어대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손에 꽉 쥔 노란 옷을 들고 뛰어 보금자리로 돌아가니 지호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말만 외롭다는듯 울어대기 바빴다.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안 돼. 작게 중얼거린 그의 입에서 빠르게 지호의 흔적을 찾아냈다. 어디로 갔지. 말에게 물어본들 대답하지 못할 것을 알고 그렇다고 이 근처에 사람이 살기도 만무하고. 그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마을에서 돌아오던 길인지라 지호가 마을로 오는 걸 보지 못했으니, 제 생각엔 딱 하나밖에 없었다. 궁궐로 갔다. 그 생각을 하자 막막해졌다. 아직 그 안에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가장 큰 일은 서서히 날이 어두워졌다. 말을 끌고 빠른 속도를 내지 못할 것도 분명했기에 말을 이끌고 마을로 내려왔다. 말이 있는 것은 거치적 거릴 뿐이었다. 말을 이끌고 마을로 가 그 말을 팔아넘기고 두둑한 전을 품안에 넣고 빠르게 산을 올라탔다. 제발, 지호가 무사히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
민혁아.
예, 저하.
이 것… 말이다.
마을로 백성들의 삶을 보러 오겠다 떼를 쓰는 재효를 데리고 온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늘 재효는 상인들의 가계를 둘러보기 일수였고 간혹 아이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기도 하였다. 노란 옷을 들고 있는 재효를 보고 민혁은 헛기침을 했다. 저하, 지호는 사내아이옵니다. 민혁의 말에 금새 풀이 죽은 재효가 아, 어울리지 않느냐? 하며 아쉽다는 듯 옷을 바라봤고 그럴때면 민혁은 다시 재효에게 인지를 시키듯 묵직하게 말을 꺼내곤 했다. 저하, 지호는 사내아이옵니다.
나도 안다.
그러니 그만 그 마음을…
누가 내 마음을 그리 가볍게 여기라 했느냐.
…….
지호는 사내아이다. 분명 계집아이는 아니다. 허나 누가 법을 지었느냐? 꼭 계집아이만을 내 품에 품으라고?
…저하. 저하께서는 후손을…
그건 후궁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난 꼭 훌륭한 지아비가 되어 지호를 처르 맞이할 것이야.
…….
그게 내가 이리도 나랏일에 목을 메는 이유다.
…저하.
더이상 말을 아끼거라. 내 화가 나려 하니.
늘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민혁은 재효에게 말을 하고, 재효는 일방적인 말을 하며 오히려 민혁을 꾸짖곤 하였다. 그리고 무거운 분위기가 되면 다시금 그 옷을 들어올려 지호의 흉내를 내곤 했다. 마치 저의 무거운 마음을 털어내려하는 듯. 저하, 이것을 어찌 입읍니까! 저는 사내아이입니다! 조금은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재효는 웃고있었다. 하지만 아마 그 속을 까맣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재효의 아버지, 나라의 지아비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처음 재효가 지호를 데리고 궁으로 들어왔을때 화를 감추지 못하였다. 도대체 그 아이는 무엇이며, 어찌하여 데리고 들어왔느냐. 재효는 그 당시 나랏일에 관심도 없고 늘 밖으로 나갈 꽤만 부렸다. 그 당시 어쩔 수 없이 다른 신하들이 이끌고 장터로 나갔다가 지호를 보게된 재효는 지호를 데리고 들어왔고 약조를 했다. 지호를 제 곁에서 풍요롭게 살게 해주신다면, 소인. 훌륭한 지아비가 되려 노력하겠습니다. 그게 재효가 이토록 촉망받게 된 이유가 되었다. 물론 신하들, 하인이든, 백성이든 사내아이 탓에 이리 바뀐 재효를 몰랐지만 그 결과는 재효를 훌륭한 지아비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이유를 들키지만 않았어도.
혁아.
예, 저하.
오늘은 달이 참 뿌옇구나.
날이 차옵니다, 들어가시지요.
…혁아. 내일은 달이 맑을 것이다.
…예.
…부탁이 있다.
아마 재효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역적을 내 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지호를 지킬 생각을 하느라 그 일을 까먹은 것인지, 제 손으로 제 백성들을 죽게 둘 수 없었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오로지 재효만 알고 있었을 뿐. 내일 이 시각, 나와 지호가 다니던 그 구멍 있지 않느냐?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아니였다. 묵직하고, 나라의 지아비같은 목소리. 모든것을 짊어진 듯 한 그 목소리. 내일 소란이 있을 것이야. 넌 절대 궐 안으로 들어오지 말고, 그 구멍에 말 한마리를 데리고 서있거라. 알겠느냐? 민혁의 눈이 커졌고 재효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소리냐며. 재효는 씁쓸히 웃으며 그의 손 안에 묵직한 주머니를 넘겼다. 이것으로 그 동안 생활하고 돈벌이를 찾거라. 그렇다고 남의 돈을 훔치는 그런 일은 하면 안 돼. 알겠느냐?
저하, 제 임무는 저하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 사내아이를 지키는 것이 아니오라!
안다. 하지만, 내 명이다.
저하!
내 마지막 명이다. 듣거라. 지호가 다치면 내 니 꿈에라도 나타나 너를 잡아가버릴테다.
장난스럽게 말한 재효의 얼굴이 달에 비춰졌다. 그리고 재효 또한 달을 올려다 봤다. 달이 참 뿌옇구나. 그런 재효를 멍하니 바라본 민혁이 이를 꽉 물었다. 어찌하여, 그 아이를 보듬는 것입니까. 저하의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까? 혹여, 저를 믿지 못하시는… 민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효가 민혁의 콧등을 손으로 두어번 힘 줘 쳤다. 아프느냐? 민혁이 조금 뒤로 밀렸고 재효는 민혁을 보며 물었다. 고개를 도리질치며 그렇지 않습니다 라며 대답한 민혁에 재효는 웃었다. 그래, 아프지 않았다니. 안타깝구나. 내 한 번 너를 아프게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재효의 표정은 이미 씁쓸함으로 물들었다. 저하, 지금이라도 도망 치십시오. 제가 저하를 지키겠습니다.
혁아, 난 지아비가 되지 못했구나.
…저하.
하지만 난 지호의 지아비가 되고 싶다.
…….
이 나라의 멋진 지아비가 되어, 지호에게… 내, 처가… 되어달라… 말하고 싶었다.
울음을 삼키며 말하는 재효의 목울대가 꿀렁이기 시작했다. 민혁은 답답한 마음에 재효의 앞에 무릎을 꿁고 고개를 푹 숙이며 소리쳤다. 저하! 부디, 저하를 지킬 수 있게! 민혁의 말이 끝나지도 못했는데 재효는 그의 머리위로 손을 올렸다. 혁아. 내 자랑스러운 민혁아. 재효의 말에 민혁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지아비가 아니다. 너의 지아비도, 지호의 지아비도 나는 무엇 하나 되지 못하였어. 하지만 말이다. 난 그들을 두고 도망 칠 수 없다. 아버지에게는 말하였다. 아마 지금 쯤 저 산을 넘고 계실거야. 두 눈을 감은 재효의 다리를 붙들었다. 저하, 저하…. 제발, 도망치십시오. 애원하는 민혁을 바라보던 재효가 다시 고개를 위로 올려 달을 바라봤다. 혁아, 이 새벽을 넘기지 못하는구나. 내 왕위계승을 아무도 원하지 않아. 난 벌을 받는 것이야. 지호에게 내 마음을 숨긴 죄야. 너, 그리고 모두에게 숨긴 죄. 눈을 감은 재효가 제 옆에 있는 붉은 용포를 손에 쥐었다. 아버지가, 지호에게 무슨 말을 했을게야. 용포를 입고, 나 인척 하라고. 민혁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하면, 그대로 도망치십시오. 민혁의 말에 화를 내는 듯한 재효의 목소리가 어두운 밤하늘에 울려퍼졌다.
내 지호는, 내가 지킨다.
……
지호에게만은 지아비가 되어 죽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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