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시집
[눈 떴어요?]
[...으...음...]
두 손발이 묶인 채로 막 잡아올린 생선마냥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여자.
아직도 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며 의식을 차리는 것이 버거워보인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눈을 떴냐는 한마디를 던졌을 뿐이다.
여자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온 몸이 뻐근거리며 손끝, 발끝에 감각이 없었다. 여자는 얼마간 정신을 잃었던 채로 묶여있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서서히 눈 앞이 맑아지고 여자는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창문 하나 없이 깜깜한 골방. 남자 앞에 놓인 조그마한 스탠드가 이 방 빛의 전부였다.
[여기 어디야.]
여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납치 당했어요. 우리 보스가 당신 납치하랬어.]
그런 여자에게 남자도 당황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고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싶은 손이 등 뒤에 묶인 채 꼼지락거렸다.
여자는 벽으로 애벌레마냥 꾸물대며 기어가 벽에 몸을 지탱하며 몸을 일으킨 뒤 남자를 제대로 마주보며 앉았다.
[내가 여기저기서 원한을 좀 많이 사고 다닌 인생이라서 그 쪽들한테는 무슨 원한을 샀는지도 기억이 안 나네.]
[우리 보스가 당신 때문에 아끼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잃었대요.당신에게 똑같이 되갚아주겠다네요. ]
[여기 발 담구면 사람 잃는게 대수도 아닐텐데 유난이군. 그 쪽 보스.]
납치당한 사람과 납치를 한 사람과의 대화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
여자는 자신의 위치가 위치인만큼 엄청난 담과 여유를 가지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도 절대 굴복하고 빈틈을 보이는 법이 없었다.
[난 이제 여기서 우리 보스가 하라는대로 할 뿐이에요.]
[우리 애들은 나없이 잘할런지 모르겠네. 지들 두목이 사라진 건 알고나 있을까.]
[혹시나 그쪽 애들이 찾으러 올 거라는 희망은 버려요. 여긴 네비게이션에도 안 뜨는 곳이니까.]
[영화를 너무 봤군.]
**
[오늘 당신의 조직을 무너뜨렸어요.]
두터운 철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그 틈으로 빛이 새어들어왔다.
정확히 23시간 만에 보는 빛이었으며 여자는 이 곳에 온지 정확히 일주일하고도 세시간이 되었다.
남자는 안으로 들어와 스탠드에 불을 켠 뒤 자신이 이 안에 있을 동안만 여자의 손목에 묶인 끈을 풀어주었다.
남자가 전한 충격적인 소식에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신이 가꾸고 일구어온 조직이 자신의 부재로 인해 한순간에 무너질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 했다.
지금껏 자신이 그 안에서 몸 담궈온 시간들이 빠르게 여자의 눈 앞을 스쳐지나갔다.
수년간 자신이 쌓아올린 탑이 무너지니 그 밑에서 열심히 탑을 쌓고있던 자신은 돌무더기에 순식간에 깔리고 말았다.
그렇게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느낌이었다. 자신이 쌓아올린만큼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의 무게 또한 늘어날 수 밖에.
[거짓말 하지마.]
[원한다면 그 쪽 부두목의 혓바닥도 잘라올 수 있어요.]
여자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
[오늘 당신의 집에 불을 질렀어요.]
[내 가족들은... 내... 내 가족들은...]
[그건 잘 모르겠네요.]
[이 미친 새끼야. 대체 언제까지...언제까지 이럴건데...]
[우리 보스가 만족할 때까지요.]
**
[오늘 당신의 친구들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걔들은 상관없는 애들이잖아...]
[보스가 시켰을 뿐인걸요.]
[안 돼. 이제 그만. 제발.]
남자는 여자가 점점 무너지는 꼴을 즐겼다.
**
[당신의 부두목을 마침내 죽였어요.]
[...]
[끝까지 당신 걱정을 했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서서히 끝을 내야겠대요.]
**
여자가 이 곳에 온지 마침내 3개월이 되었다.
여자는 앙상해졌고 빛을 보지 못해 피폐해졌다. 3개월 전 이 일대를 주름잡던 조직의 보스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초라하고 궁색한 모습이었다.
3개월 간 여자는 차근차근히 무너져내렸고 처음 왔을 때의 패기와 당당함은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소중한 사람을 하나하나 잃어갔고 그 때마다 번번히 놀라기도 지친 여자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해탈해버렸다.
여자의 하루는 어두운 방 안에서 바닥에 엎드려 텅빈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것이 전부였다.
삼일만에 남자가 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닌 왼손에 들린 권총 한 자루와 함께.
[오늘은 당신의 마지막 남은 여동생을 죽였어요.]
[그래서.]
[이젠 정말 아무렇지 않은거야? 아니면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거예요?]
[니 좆대로 생각해.]
[그래요. 당신 말대로 이 곳에 발 담구면 사람 잃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잖아요?]
남자는 여자와 첫만남 때 들었던 말을 곱씹어주며 총알을 장전했다.
촤르륵--철컥--
총알이 딱 한 발 장정된 총 한자루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남자는 늘 그렇듯 의자에 앉아 여자를 내려다 보았다.
[이제 더 이상 당신 곁에 남아있는 사람은 없어요.]
[...]
[이러면 보스가 말한 복수가 끝이 난거겠죠.]
[언제까지 속일 생각인데.]
여자의 쏘아붙이는 말투에도 남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일관된 미소를 지으며 여자를 응시했을 뿐.
[아무것도 없잖아. 너. 조직도, 보스도.]
[...]
[이제서야 기억 나. 몇 개월 전에 우리 애들이 전부 헤집고 왔던 BTS파.]
[그리고 그 곳의 보스가 너겠지.]
[...]
[그래. 네가 항상 말하던 보스는 너 자신이잖아.]
[용케도 눈치챘네요.]
[대체 무슨 꿍꿍이야. 뭐하러 속인거야.]
[당신 말대로. 나 이제 조직도 내 자리도 없어요. 내가 돌아갈 자리가 없어졌어요.
그래. 니가 우리 조직을 전부 무너뜨린 덕에 난 내 아끼는 동생들을 잃었고 네 그 찢어죽이고픈 동생들 덕에 내 가족마저 잃었어. ]
[가족 일은 난 모르는 일이야...! 난...난...!]
[이제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네 말대로 난 조직도 보스도 없어. 그런 내가 어떻게 네 조직을 무너뜨렸겠으며 네 가족들을 죽이고도 잡혀들어가지 않고 여기 있겠어.]
난 네 주위 사람들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어. 그래도 네가 무너져 가는 꼴은 봤으니 그걸로 만족해. 그게 내 목적이었어.]
[...]
[너와 달리 손에 피 한 방울 뭍히지 않고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었으니 얼마나 현명해.]
[...]
[내가 느꼈던 고통을 잘 맛봤어? 이런 곳에 발담구고 있어도 사람을 잃는 건 아파. 언니.]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올려진 권총 한 정을 집어올렸다.
총구를 올리고 방아쇠에 검지를 걸어넣었다.
[그리고 이게 내 마지막 복수야.]
[왜...]
[안녕. 이게 내 마지막 인사야.]
방아쇠에 걸린 검지가 파르르 떨리니 남자의 수백번의 망설임을 잘 보여주었다.
[이 어둡고 외로운 곳에서.]
[완벽히 혼자가 되는 고통을 느껴봐.]
탕-
피가 낭자한 쪽은 남자의 쪽이었으며 바닥으로 몸이 낙하하는 것도 남자의 쪽이었다.
총구가 향한 쪽은 여자 쪽이 아닌 남자의 관자놀이었고 혼자가 되는 쪽은 여자의 쪽이었다.
[안 돼... 안 돼...]
그것이 남자의 마지막 복수였으며
완벽한 복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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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스가 시집
혼또니 스게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