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환상
제6장 ; 비밀을 아는 자
질퍽하게 흘러내리는 몸에 새빨가기만 한 눈동자. 딱, 악마를 현실로 봤다면 저렇게 생겼다고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저들은 한 번 죽은 자들이다. 이미 육체를 떠났는데 심판을 받아봤자 무슨 소용인가. 영혼들이기에 이곳에서 '죽음'을 또 한 번 맞게 된다면 그것은 정한 오빠가 말하듯 아예 '소멸'이겠지. 그렇다는 건, 언젠가 다시 인생을 살아갈 기회를 아예 박탈시킨다는 얘기.
앞에서 시선을 막아 주는 원우 씨의 옷자락을 꾹 쥐었다. 뒤에서도 느껴지는 섬뜩함에 흘깃 눈동자를 굴리니, 어느새 사방에서 기어 나와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미 나보다 먼저 느낀 지훈 씨와 승철 오빠가 방어 태세로 칼을 잡았다. 그야말로 살벌한 눈치 싸움이었다. 평소에 내가 겪던 눈치 싸움과는 차원이 다른, 목숨이 걸린 위험한 내기.
"아, 몰라! 몸 쑤셔서 더 이상은 가만히 못 있어!"
"이지훈!"
기다림을 참지 못한 지훈 씨가 결국 정적을 깨고 달려 나갔다. 그와 동시에 괴기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검은 자들의 공격을 있는 힘껏 막았다. 위험하다며 나를 이끌고 숨으려는 원우 씨의 손을 잡아당겼다. 나를 막아줄 것이 아니라 저들을 돕는 게 더 나을 텐데. 더군다나 정한 오빠는 평소에 칼을 잡지도, 소지하지도 않는데.
"원우 씨도 싸워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정한 오빠보다 원우 씨가 싸우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정한이 형이 칼은 나보다 더 잘 다뤄요."
"네?"
"티스 씨만 걱정해요. 우린 괜찮으니까."
자꾸 어디선가 나타나 달라붙는 검은 자들을 처리하느라 숨는 것 조차 쉽지 않았다. 딸린 짐 때문에 남들보다 더 바쁘게 되어버린 원우 씨는 쉴 새 없이 칼을 휘둘렀다. 순영이는 싸울 수 있기라도 하지,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얼떨결에 원우 씨의 품 안에서, 거의 안긴 채로 움직이는 방향을 따랐다. 혼자 고군분투할 동안 이미 상황 종료를 한 일행들이 달려왔다.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너무 늦었나 봐."
"지금이라도 나온 게 어디예요. 그대로 박혀 있었어 봐, 완전히 속수무책이었지."
원우 씨는 숨을 고르며 자책하는 승철 씨를 위로했다.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지 주위를 둘러보는 원우 씨의 어깨를 건드렸다. 아까 싸웠던 자세 그대로 안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숨을 몰아쉬는 게 전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처음이라 너무 어색하거든. 저기 이제 놔도 되는데…. 내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눈이 곧 커다랗게 커지며 파도를 일으켰다.
"아, 아 미안해요."
갑작스럽게 몸을 쓴 탓에 금방 지쳐 다들 주저앉았다. 부적 있어봤자 쓸모없다며 투덜대는 지훈 씨의 말에 순영이도 조심스레 공감을 했다. 쓸 여유가 있어야 쓰지!
"어? 저기 누가 오는데?"
정한 오빠의 손짓 너머 뒷짐을 지며 유유히 한 남자가 걸어왔다. 한껏 여유로운 발걸음에 다들 긴장한 채 주시하고 있는데, 원우 씨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며 칼끝으로 그 남자의 심장을 가리켰다. 남자는 그 자리에 서서 한껏 목소리를 낸다.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네만 하도 안 오길래 내가 직접 왔네!"
"누군데 우릴 기다립니까"
"자네는 능력 쓸 줄 모르나. 알아서 보면 될 것 아닌가!"
잠깐, 저 사람.
원우 씨가 겨누고 있던 칼을 손으로 내리곤 승철 씨는 그 남자를 유심히 쳐다봤다. 분명 어디서 봤는데…. 지훈 씨도 낯익은 얼굴인 듯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갔다.
"형, 그때 점쟁이 노인네 아니에요?"
"어?"
"왜 그, 우리 둘 밖에 없었을 때 왔었잖아요."
찬 바람이 콕콕 살갗을 찌를 날씨, 숲 속을 정찰하고 돌아온 집 앞에 웬 노인이 앉아 있었다. 이곳에 올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지훈이 갸우뚱거리며 다가가자 감고 있던 눈이 번뜩 뜨이며, 턱- 하고 지훈의 손을 잡았다.
"누구세요? 여기 어떻게 알고 왔어요?"
"길을 잃어버렸네. 잠시 내 여기서 지내도 괜찮겠는가?"
길을 잃어버렸다고? 지훈의 눈이 승철에게로 향했다. 승철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덕분에 흐르는 정적. 난처한 듯 지훈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한참 흐르는 정적을 깬 것은 승철의 발소리였다. 저벅대는 발은 여전히 지훈의 손을 잡고 놓지 않은 노인을 지나쳤다. '들여보내지 않을 것인가 보다' 지훈은 생각하며 노인의 팔을 뿌리칠 찰나, 끼익- 하고 열리는 문에 두 사람은 미어캣 마냥 고개를 돌렸다.
승철은 따뜻한 차와 함께 담요를 건넸다. 역시, 될 사람은 뭐가 달라. 노인은 묘한 말을 하곤 뜨겁지도 않은지 벌컥벌컥 마셨다. 앞에서 신기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지훈을 힐끗, 보고는 펭- 하며 웃었다. 그것이 비웃음임을 인지한 것인지 지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의심이 많구나. 직업병을 버리지 못했군."
"뭐라고요?"
"그 직업병만 덜했어도, 자네가 여기 올 일은 없었는데 말이야."
"... 뭘 안다고 떠들어, 당신이."
"생전에 점쟁이였던 노인네한테 뭘 바라누."
"비밀을 모른 척 하려니 힘들었지?"
테이블 안으로 쥔 주먹이 파들거렸다. 이 노인네, 분명 길 잃어버린 거 아니야. 대체 정체가 뭐지? 싸 - 하고 올라오는 쓴맛에 입맛을 다시던 노인은 남아있는 차를 털어 넣고 일어섰다. 잘 마셨다며 나가려는 노인의 어깨를 승철이 잡았다.
"길 잃어버리셨다는 분이 길은 묻지도 않고."
"……."
"옷 차림이며 말투며 보아하니 현대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껄껄, 역시 자네는 뭔가 다르구먼. 그래, 길은 잃어버린 건 아니라네."
"그럼 대체 여기 왜 오신 겁니까."
"다시 보게 된다면 그때 자세히 알려주겠네."
"곧, 다함께 볼 것 같으니."
다음에 보자며 그대로 떠난 노인의 얼굴을 드디어 기억해낸 듯 승철이 손뼉을 쳤다. 이상하게도 노인의 말이 신뢰가 가서 그저 갈 길 가게 내버려 뒀는데, 정말 볼 줄은 몰랐다. 그때보다 더 늘어난 사람과 함께.
"따라오시게. 그때 마신 차, 보답은 해야지."
우리가 따라오든 말든 노인은 그대로 뒤를 돈 채 길을 걸었다. 뭐가 이렇게 상황이 갑자기 확 확 바뀌는지, 질리는 표정으로 승철이 한숨을 쉬며 자신의 일행을 데리고 노인의 뒤를 따랐다.
지훈 씨에게 점쟁이라고 불린 그 노인은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들였다. 승철 씨의 표정을 보니,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마음은 놓였지만 긴장을 풀 순 없었다. 정말 점쟁이라 다시 만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런 것도 다 알 수가 있는 걸까? 아니면 혹, 이 사람이 심판을…. 일단 다들 앉게.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자 기다렸다는 듯 어느 여자분께서 부족한 의자와 함께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셨다. 생김새가 매우 비슷한 것을 보니, 노인분과 가족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예술 하는 사람이 왔구나."
"네?"
"인간 말이다. 서양 말로 디자인이라고 하나?"
"아, 네. 패션디자인과예요."
"그 민속촌 지도 좀 주겠나? 확인할 것이 있어서 말일세."
어떻게 알았는지 놀라는 것도 잠시, 급하게 가방에서 꺼낸 팸플릿을 노인은 한 번 헛기침을 하고 테이블에 촥, 펼쳤다. 그러나, 그 지도를 보고 다시 한 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머물렀던 곳을 나오기 전까진 알록달록 색깔을 뽐내던 지도가 칙칙한 흑백으로, 알 수 없는 기호를 담은 채 자신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어, 이게 왜…."
"역시 눈치채지 못 했던 게로구나. 심판의 시작은 이 지도였는데 말이다."
"...!"
노인은 한참 전부터 우리를 기다렸던 것이다. 눈치 없는 나 때문에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이자 노인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자책할 필요는 없네. 당신보단 바뀐 기운을 눈치채지 못한 이것들이 잘못한 게지."
"뭐라고요?!"
"시끄럽다."
"일단, 너희들을 다시 찾은 이유를, 그리고 앞으로의 일을 설명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