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라도 나 봐주세요."
"이게 내 대답이에요."
정세운은 그렇게 걸음을 옮겼다.
-8년의 짝사랑은 사람을 18년으로 만든다.-
임영민 / 정세운
널 완벽히 엿맥여 나에게 정이 뚝 떨어지게 하자. 사실은 이런 거창하고도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발칙한 년이었다면 애초에 초등학교 시절 정세운에게 고백했겠지, 아니면 오래도록 염탐만 해오던 정세운의 페북계정에 당당히 친구신청을 눌렀을 것 이다. 나는 내 생각만큼이나 정직하게 찌질했다. 그보다도 사실은 정세운이 이렇게 솔직하게 나와줄 지 몰랐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숨겼으면 했다. 내가 정세운에게서 그랬던 것 처럼. 멀리 도망치고, 외면하고, 이따금 열병을 앓고, 주변에 날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을 받으며 치유하고.
난 다행히도 곁에 있어준 나를 사랑하는 이가 임영민이었던거고.
정세운이 그렇게 가버리고 나서 나는 한 참을 그곳에 벙찐 채 서있었다. 그렇게라도 봐달라니. 동해바다 앞에 우두커니 서서는 동해바다가 바싹 말라버리는 걸 지켜보는 기분이다. 한 마디로 말해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짧은 시간동안 깊은 고민을 했다. 나와 정세운의 관계를 어떻게 끝맺으면 좋을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그냥 뭉툭한 결론을 내버리기로 했다.
그래, 알고는 있지만 믿을 수 없다고 하자.
마치 산타클로스처럼 말이다.
그렇게 나와 정세운의 관계를 싱겁게 끝내도록 하자.
믿을 수 없는게 아니잖아, 믿지 않는거지.
내 안의 무언가가 자꾸만 소리친다. 나는 두 귀를 꾹 막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정세운이 자꾸만 나에게로 걸음하는 사실, 정세운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나는 믿을 수 없는거다. 그래서 정세운을 여전히 사랑할 수 없는거다.
-
다시 가게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내린다. 콧등에 떨어진 빗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급한대로 주변 상가 처마에 가 비를 피했다. 이미 빗방울이 옷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빗방울을 털어내며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빗방울들은 더이상 떨어져 내릴 나날이 없는 것 마냥 포악하게도 내리쳤다. 매연으로 가득한 도시의 하늘을 죽죽하게 갈라내린다. 빗방울의 다소 잔인한 몸부림들을 눈에 담고 있으니 순간 가게에 혼자 있을 임영민이 생각났고,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빗 속으로 뛰어 들었다. 허겁지겁 뛰어 반은 젖은 상태로 가게로 다시 들어갔는데 임영민의 자리에 임영민이 없었다. 하지만 임영민 자리에 그대로 올려진 임영민의 지갑, 핸드폰에 조금 안심하며 친구에게 물었다.
"임영민은?"
"못 만났어? 화장실 간다더니~."
비아냥 거리는 친구에게 정색을 하자 친구가 조금 당황해서는 목을 큼, 다듬었다.
"..영민이형 화장실 간다고 나갔는데."
올라오던 길에 화장실이 있었고, 얼핏 봤지만 그 안에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새끼만 애초에 나대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을 사달이었다. 이 모든게. 애꿎은 책망의 화살은 자꾸 대가리를 틀어 이상한데 가 박혔다. 가게에서 임영민의 짐을 챙겨 나와 그를 찾았다. 속눈썹에 빗방울이 맺혀 눈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자꾸만 손가락으로 눈 앞의 빗방울을 밀어내며 주변 편의점에서 우산 두개를 사들고 다시 임영민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리 찾아도 임영민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근데 정세운 있잖아,
-놔라.
-…아니, 난 영민이 형 응원하는 입장으로서 한 마디 하는데,
-놓으라고.
임영민을 급하게 찾아 나서려는데 아까 내 팔목을 잡아오며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영민이형 한테 좀 잘해, 정세운한테도 확실히 하고. 둘 다한테 못할짓 하는거다 너
-…….
-…아무튼 오늘은 미안했다, 빨리가봐.
하여튼 저게 마지막에 감동적인 말 좀 하면 지가 뭐라도 된 줄 아나. 속으로 궁시렁 거렸지만 틀린 말 하나 없다는 거 다 알았다. 둘 다한테 못할 짓 하는 거라고. 임영민이 내가 정세운에게 느끼는 감정들을 몰랐으면 했다. 내가 정세운에게 느끼는 감정이 뭔지는 나조차도 잘 몰랐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잘 알아줬다.
'너 아직도 정세운 좋아하냐?' , '너 정세운 왜 그렇게 싫어하는데?'
그런 말들을 들을 때 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도 모르는 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걸까, 내가 정세운을 사랑하는건지,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건지, 미워하는건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주변 사람들이 안다면 임영민도 잘 알고 있을 거라는 것 이다. 항상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이니까, 모를래야 모를 리가 없었다. 임영민은 정세운에게 향하는 나의 감정들을 뭐라고 결론지었을까. 아마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감정보다 임영민이 생각하는 나의 감정들이 더 정확할 것 이다. 그는 나보다 더 나를 잘 알아줬으니까. 나보다 나를 더 많이 사랑하고, 챙겨줬으니까 말이다.
나는 어쩌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임영민을 고문하고 있었던 아니었을까.
-
결국 임영민을 찾지 못했다.
물방울이 흥건하게 맺힌 손목시계를 내려다 보는데 가게에서 나와 임영민을 찾기 시작한지 벌써 20분정도가 지나 있었다. 허벅지 근육이 서서히 아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통증 사이로는 기다렸다는 듯 추위가 빼곡하게 스며들었다. 사놓고서 뜯지 않은 임영민의 우산만 더 꾸욱 여며쥐었다. 춥다. 비로 흠뻑 젖은 곳에 찬 바람이 불으니 배로 추웠다.
그 동안 임영민은 이 추운곳에서 얼마나 나를 이렇게 기다려 줬던걸까.
임영민을 보고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 태양의 바로 아래에 있는 사람들 조차도 가지지 못할거라던 임영민의 밝은 그 웃음 말이다.
어쩌면 그 사람들은 충분히 가질 수 있었는데도, 그 웃음을 가지는게 너무 힘든 일이라 일치감찌 포기한 것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넌 그 웃음을 기꺼이 가지고, 따가운 가슴을 삼켜내면서, 그렇게 나에게 웃어준건 아닐까.
이젠 내가 그럴 차례인거다. 다리를 주무르며 하숙집에 가보기로 결심하고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나를 붙잡는다. 손이 차가웠다. 참 시렸지.
돌아보니 임영민이었다. 그는 나보다 더 푹 젖어있다. 앞머리에는 물방울이 뚝 뚝 떨어져 내렸고, 한 순간의 빈틈도 없이 힘겹게 몰아쉬어지는 그의 숨소리에서 그가 나를 찾는걸 한 시도 쉬지 않은 걸 알 수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입도 못다무는데 임영민의 손에 들린 우산 두개가 보인다. 둘 다 뜯지도 않고 비닐포장인 채였다. 일단 급한대로 내가 들고있던 우산을 임영민에게 씌어 주웠다. 내 정수리 위로 다시금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고, 임영민의 얼굴은 우산의 그늘로 인해 어두워 진다.
"너.., 왜 우산 있었는데도,"
"…내 게 아니였으니까."
그 말에 심장 비로소 멎는다. 임영민은 나와 정세운이 나가버린 가게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비가 온다는 누군가의 말소리에 급하게 돈만 들고 뛰쳐 나왔을 것 이다. 그가 산 우산 두개, 둘 다 임영민의 것이 아니라면 하나는 내것이고 하나는 정세운의 것 이었을거다.
"…기다리지 그랬어, 나 금방 갈거였는데."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다.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아서였다. 임영민은 손을 들어 내가 임영민 쪽으로 한 우산을 내 쪽으로 다시 기울인다. 나와 정세운이 함께 있다는 걸 알고도 이 빗속으로 뛰어 들어온 네가, 제 우산도 못사고 나와 정세운의 우산을 사버린 네가, 우산을 필 겨를 도 없이, 정세운과 함께 있을지도 모르는 나를 이 빗 속에서 찾아다니는 너를,
"가지마."
어떻게 떠날 수가 있겠어.
"이 말 못하면, 후회할 거 같아서 그랬어."
-
소나기인 줄 알았는데 비는 꽤 오래왔다. 얕게 왔다가 짙게 왔다가 제 색을 아무렇게나 바꾸긴 했지만 결코 멎지는 앉았다. 어느정도 진정이 된 임영민은 제 팔뚝을 감싸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차갑게 식은 그의 손을 꼭 잡아주며 일단 눈에 보이는 아무 상가나 들어가서 그를 비상구에 앉히고 일어서는데 나를 붙잡는다.
"금방 올게."
돌아보면서 그렇게 말하자 임영민이 잡은 손에 힘을 풀어내렸고, 나는 우산 쓰고 빗속을 다시 거닐었다. 가까운 편의점에서 바로 흔들어 쓸 수 있는 핫팩과 온장고에 넣어둔 두유 두어개를 사들고 돌아오는데 멀리서부터 임영민은 일어선 채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건 좀 못본 채 해줘도 되는데, 뻘쭘하다가도 멀거니 서서 내 쪽만 바라보는 영민이가 귀여워서 결국 푸스스 웃어버리고 말았다. 핫팩 따뜻하게 해 구석구석 붙여주고 두유까지 먹여준 다음 비가 좀 그칠만 할 때 손 꼭 붙잡고서 하숙집으로 향했다.
비도 오는데, 세운씨가 늦네, 우산도 안들고 간 것 같은데.
하숙집 아저씨가 베란다를 보며 하는 말을 애써 못들은 채 했다.
-
그 날 비는 하루종일 왔었다.
임영민은 그 날 이후로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그 날씨에 비를 맞으며 계속 뛰어다녔으니 어쩌면 당연한 처사였다. 첫 날엔 눈도 못 뜨고 앓더니 둘 째 날엔 눈은 겨우 뜨고 앓더라. 겨우겨우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한다는 말이 '그만 집에 가.' 였다. 나는 임영민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눈물을 줄줄 쏟아댔다. 혼자 이불 속에 쳐박혀서 기침을 토해내는 가녀린 그의 등은 눈물 없인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 바탕 울고 나면 더 억척스럽게 임영민의 곁에 붙어있었다. 임영민은 감기가 옮는다며 나를 밀어냈지만 나는 당당하게 임영민에게 죽도 먹여줬고, 아이스팩으로 뜨거운 몸도 식혀줬으며, 약도 꼬박꼬박 챙겨주고, 심지어 뽀뽀도 꼬박꼬박 해줬다.
처음엔 기겁하며 이불 속으로 숨어대던 임영민을 장난스럽게 발 끝으로 쿡,쿡 찔러대며 놀렸다. 영민아, 임영민아. 내가 그렇게 웃으며 부르면 임영민은 국내에서 제일 따뜻한 곳에서 재배되는 토마토마냥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빼꼼 이불 밖으로 내밀었다. 그런 그를 보면 자동으로 웃음이 피어 올랐다.
항상, 임영민은 됐다고 한사코 거절했지만 내가 억지로 우겨 그의 이까지 닦아주고 세수까지 시켜줬던 적이 있었다. 내가 쓰려고 가져다 둔 노란색 병아리 헤어밴드로 머리를 넘겨 고정시키고 임영민의 얼굴 위에 물을 적셨다. 흠뻑 적신 임영민의 얼굴 위로 거품칠을 해줬다. 거품으로 장난도 치고, 임영민은 웃다가 입에 거품이 한가득 들어간 적도 있었다.
임영민도 어느정도 포기했는지 이따금 나에게 의지했다. 기분이 좋았다.
임영민이 아프다는 이유 때문에 하숙집에 가는 횟수가 또 부쩍 늘게 됐다. 임영민네 부모님은 먼 곳에 계셨고, 임영민이 고작 감기 따위로 부모님에게 걱정 끼쳐드리는 건 싫다며 자신의 몸 상태를 알리는 걸 거부했기에 내가 옆에 있어주고 싶었다. 대부분 정세운은 집에 없거나 방에 있어서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집에 살아서 그런지 정세운을 아예 만나지 않는 건 불가능 한 일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애석하게도 우리는 크게 변한게 없었다.
화장실에서 임영민의 이마에 올려줄 물수건을 막 빨아서 나오는 길에 우연히 널 마주치면.
"안녕 세운아."
그렇게 건조한 인사를 건넸고,
"안녕하세요."
너도 그렇게 나에게 답변했다. 정세운은 곧 죽어도 반말을 쓰지 않았다. 전엔 나한테 잘만 쓰더니, 괜히 심통났지만 더 이상으로 정세운에게는 마음의 작은 어떤 부분도 내주지 않기로 결심 했기에 더 또렷하게 눈을 떠내야만 했다.
내 앞에 있는건 정세운이다.
내가 8년, 아니 9년동안 짝사랑 했던 정세운.
임영민과 1년을 함께하며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정세운.
그 정세운.
근데 그게 뭐, 어쩌라고.
내 사고는 약간 늘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진행법이라고 생각했다. 기승 전결 근데, 그게 뭐, 어쩌라고 식으로 최면을 걸어대서 일단은 정세운의 눈을 안피하고 마주볼 수 있었으니까. 정세운도 당당한 나에게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그나마 하숙집에서는 괜찮았다.
문제는 학교에서 였다. 그 날 그렇게 일이 터지고 우리 과에는 한동안 우리 셋을 주연으로 한 치정멜로극이 들끓었다. 3학년 임영민, 2학년 성이름, 1학년 정세운이 엮인 얘기 였으니 1,2,3학년 빠짐 없이 고루 즐길 수 있는 재미난 프로그램이나 다름 없었다. 우리의 소문은 25시간 항시 편성 된 프로그램 처럼 리모컨으로 채널만 맞춰주면 되는 것 마냥 터져 나왔다. 우리 셋이 없을 땐 음량을 최대치로 높혀 당차게 떠들어 대다가, 우리 셋 중 하나라도 등장하면 음량을 확 줄여 매우 조용히 떠들어 댔다. 근데 사람들은 곧죽어도 음소거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화가 났지만 화내지 않았다. 나와 임영민에 대한 소문은 생각보다 크게 들끓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 둘의 화제성까지 정세운이 끌어 안은 모양새가 됐다. 화제의 중심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정세운 이었다. 그 날 정세운은 대답도 없이 자리를 차고 나갔다. 그가 핑계로 들었던 조별과제 약속은 정세운과 같은 교양을 듣는 아이들의 증언으로 모두 허위사실인게 드러났기 때문에, 그리고 정세운은 2,3학년들 에게는 마냥 궁금하기만 한 새내기였으니 당연히 나와 임영민보다 배로 거론될 수 밖에 없는 불리한 위치였다. 악의를 담지 않은 불쾌한 농담들이 정세운의 주변을 둘러싸는게 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다들 정세운의 뒤에서는 이러쿵 저러쿵, 입방아를 찧어대면서 정작 그의 앞에 가면 물먹은 찐빵마냥 가만히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
하지만 정세운은 동요하지 않았다. 감탄에 감탄을 자아내게 할 만큼, 정세운은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단단한 사나이었다. 나를 보면 피하지 않고 항상 인사를 하는게 그가 충분히 단단한 사람임을 증명해줬다. 그가 한 번 고개를 숙일 때 마다, 나를 볼 때, 대화를 나눌 때 마다 거세지는 입방아의 진동이 여기까지 오는데, 내가 휘청일 동안 그는 물 위에 떠있는 것 마냥 매우 편안한 모양새였다.
'소문을 죽이는 건 무관심이다.'
언젠가 내가 절실히 느끼고 가슴 속에 간직해 온 인생의 팁 같은 거였다. 사실 그거 정세운에게서 배운 거다. '5학년 이름이가 세운이 좋아한대!!!' 학교가 떠내려가라 소문을 내고 다녔던 12살의 나. 그리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12살의 정세운. 축구공에 헛발짓만 해대던 정세운의 뒷통수를 보며 눈물을 머금고 깨달은 명언이었다. 정세운은 그 무관심으로 나를 818번 정도 죽였고.
우리 서로 피해다니자, 내 걱정을 그렇게 무시한 것도 모자라 이제 너에 대한 안좋은 소문마저 깔끔하게 무시해 버린다. 그 시절의 정세운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지어졌다. 가슴이 이따금 쓰라렸다.
-
우리 학과 학생들이 대거 듣는 강의 시간이었다. 1,2,3학년 고루 듣는 수업이라 나와 임영민, 정세운을 포함한 우리 과 사람들 여럿이 들었다. 임영민은 계속 몸상태가 안좋아서 수업 내내 샤프 하나 제대로 쥐지 못하다가 쉬는시간이 마련되자 마자 그대로 책상 위에 엎어졌고 나는 그의 등을 쓸어 줬다.
강의시간 때 찍어놓은 영상을 돌려보며 부족한 부분의 필기를 보충하는데 내 앞으로 음료수가 내밀어 진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단정한 셔츠의 단추부터가 나 정세운입니다, 하고 소리치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빠르게 고개를 돌려 옆 자리 임영민을 살폈다. 임영민은 미동도 없이 자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이어폰 한 쪽을 빼내고 고개를 들어 정세운을 눈에 담았다.
"마셔요."
정세운은 훅 치고 들어온다. 아찔하다. 내가 제대로 들은게 맞는지 의문이 들어 남은 한 쪽의 이어폰도 빼냈다. 미친게 틀림없다. 정세운.
고개를 내리자 밀키스 캔이 있었다. 내 돈주고는 잘 안사먹는 음료수였다. 정세운은 딱히 다른 설명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겨 제 자리에 앉았다. 지켜보고 있던 강의실의 모든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소나기가 흠뻑 또 다시 나를 적시고 간다. 술렁거리는 소리에 임영민이 뒤척였다. 나는 들고있던 샤프를 내려놓고 임영민의 머리를 두어번 쓸어내렸다.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본 임영민이 잠결에 비식 웃는다. 흠뻑 젖은 나를 정성스럽게 말려주는 웃음이다.
나는 다시 샤프를 고쳐잡고 필기를 하기 시작했다.
-
술자리가 마련됐다. 임영민과 나, 그리고 정세운. 셋을 초대하는 꼬라지 하고는. 딱 지금 일어나고 있는 핫한 이슈의 전말을 파헤치겠다는 사람들과의 기자회견 장이 될게 분명했다. 그걸 모르지 않을 임영민, 그리고 정세운이었다. 그런데 정세운은 당당하게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당연하게 가지 않겠다고 했다. 임영민도 나를 따라 가지 않겠다고 했다.
"왜? 너 정세운 땜에 그러지?"
한 동기의 말에 나는 이를 갈았다. 내 심기를 건드리는 말이 분명했다. 우리과에서 내가 정세운을 꺼리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정세운 조차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더이상 소문이 나는 걸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응."
정세운이 알려준 대로 소문을 죽이는 건 무관심이다.
하지만 되려 명확한 태도 역시 소문을 죽이는데 제격이다.
내 확고한 대답에 모임을 주선한 사람들이 되려 당황하기 시작한다. 정세운 때문이다, 정세운과 마주치기 싫다, 더이상 혼란 스럽기 싫고, 눈 앞의 임영민에게만 집중하고 싶다. 그런 의미를 내포한 확고한 내 대답에.
"안갈거야."
한 번 더 못밖고는 들고 있던 책을 들고 사물함으로 갔다. 정세운이 줬던 밀키스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사물함 안에 대충 쳐박았다. 가까운 곳 에서 정세운이 걸어왔다. 들고있던 책을 마저 사물함에 쑤셔넣고 사물함 문을 쾅 닫고 자리를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약속 했잖아요."
그가 나를 불렀고, 내 걸음은 기다렸다는 듯이 멈춘다.
"무슨 약속."
"나 봐주기로."
며칠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약속같은거 한 기억 없는데."
정세운은 내가 닫은 사물함의 문을 다시 열었다. 나는 거짓말 치지 않았다. 정세운의 일방적인 부탁이었고, 다소 잔인한 선택이지만 그걸 들어줄 지 말지는 내 자유였다. 정세운은 내가 방금 쳐박은 밀키스 캔을 꺼내 내 손에 쥐어준다.
"이렇게 쳐박아두면 마음이 편해요?"
정세운은 분명히 알고 있다. 내가 정세운이 신경쓰여 미치기 일보 직전인 것을.
"솔직해지는게 어때요."
그러니까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는거다. 결말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승자의 웃음. 분명 승자의 웃음이 분명한데 어딘가 시려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가 알고 있는 결말이 새드엔딩이라 그런 걸까. 그런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 난 여기에서 질 수가 없었다. 여기서 무너져 내린다면 돌아갈 곳은 없었으니까.
"나 임영민 사랑해. 솔직하게."
이제 됐지,
"여기서 뭘 더 솔직해질까."
내가 뭉툭 하게 넘겨 짚고 지나간 자리를 정세운이 뾰족하게 짚어준다면, 사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판사판이었고 도박이었다. 다행히 내가 아는 정세운은 굳이 남이 숨기고 싶어하는 사실을 뾰족하게 찌르지는 않는 사람이라는 거다.
"오늘 나와주세요."
역시나, 정세운은 내 약점을 짚지 않는 대신 핀트를 바꿔버리는 걸 택했다, 안도의 한 숨이 터져나오려던 찰나,
"영민이형을 사랑하면, 더 이상 나를 피할 이유 없잖아요."
정세운을 얕봤다. 정세운은 내 약점을 짚지 않는 대신 내 약점을 통째로 쥐고 제가 유리한 쪽으로 뒤흔들어 버렸다.
K,O.
또 다시 나는 K.O 당해버리고 만다.
-
그렇게 자리에 참석하는 꼴이 됐다. 나만 조용히 참석하고 빠르게 집에 가려고 했는데 임영민이 아픈 몸을 이끌고 따라 나섰다. 자리 선정은 역시나 좆같게도 나와 임영민의 마주편에 앉은 정세운이었고, 세 사람의 분위기만 묘하게 달랐다. 그 외에는 우리 셋의 분위기를 보고 재미있어 죽겠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점점 취하니까 노골적으로 말 걸어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옆의 임영민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임영민은 괜찮은 척 고기를 뒤적거리며 숨을 색색 내쉬었다.
"근데 정세운 너 언제부터 성이름 좋아했냐?"
훅 던져진 물음에 정세운은 그냥 웃으며 말없이 술 받아 마셨다. 대답 없으니 임영민의 표정이 굳어만 갔다. 아, 역시 오는게 아니였나. 답답한 마음에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만 툭툭 내려치는데 정세운이 그때 대답을 꺼낸다.
"안 좋아해요."
"……."
"좋아하면 안되죠, 옆에 남자친구 있으신대."
"야 그런게 어딨어~ 사람 마음이 그렇다는거지 뭐 걍."
명백한 거짓말이다. 그의 대답에, 자기 일 아니라고 존나 안일한 말을 해대는 주변사람들의 격려가 어이가 없었지만, 정세운이 단호하게 아니라고 연신 거절하니 그제서야 풀리는 임영민의 표정에 조금 걱정을 덜었다.
"근데 그럼 성이름 너는 정세운 왜 그렇게 싫어했는데?"
"나 안싫어했는데?"
그리고 불똥은 갑자기 나에게로 튄다. 내가 애초에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세운이 나를 바라본다. 거짓말 치지 말고 솔직히 말하라는 눈빛에 나는 작게 어깨만 으쓱 하는 걸로 응수를 뒀다. 뭐, 너도 거짓말 쳤잖아. 나도 치는게 어때서. 나의 그런 눈빛에 정세운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린다. 사실 정세운이 거짓말 없이, 정말 나를 좋아한다고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면 다 망하는 거지만. 정세운의 거짓말은 나를 위한 거짓말이었지만, 나는 나와 임영민을 위해 거짓말을 쳤다.
"아 니네 자꾸 피하기만 하니까 재미 없다."
"저도 선배들이 자꾸 이런것만 물으니까 재미없어요, 다른 얘기 없어요?"
"뭐래, 너네 셋 빼고 우리 지금 다재밌어."
"…그만가자,"
임영민이 내 손 잡아온다. 임영민 안그래도 몸 안좋은 것 같은데, 감기 기운에 붉게 상기된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가방 챙겨 일어났다. 여러시선이 우리를 따라붙었고 그 중 가장 집요한 것은 역시 정세운의 것 이었다.
"뭐야 벌써가려고?"
"응, 오늘 임영민 몸이 별로 안좋아서."
"아 진짜? 괜찮아요 선배? 이름아 얼른 들어가."
정세운은 말 없이 우릴 쳐다보기만 했고, 사람들이 우릴 붙잡았다. 다행스럽게 아까부터 안절부절 우리 셋을 지켜보고 있던 친구 한명이 득달같이 얼른 들어가라고 힘을 보태줘서 겨우 사람들을 잠재우고 걸음을 출입구로 틀 수 있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하숙집으로 향했다. 임영민의 몸이 나아졌다 싶었는데, 원점으로 돌아온 것만 같아 속상했다. 그는 안간힘을 써 멀쩡히 걷는 척 했지만 침대에 눕자마자 늘어져 달뜬 숨을 내뱉었다. 거실 티브이 밑 서랍에서 해열제 챙겨서 다시 방 문을 열자마자 임영민의 열기운이 훅 끼친다. 나는 작게 기겁하며 열기가 빠지라고 방문을 조금 열어두고 들어왔다.
물을 떠다 약을 먹이고, 겉옷 벗겨 옷걸이에 걸어 주었다. 할 수 있는데 까지는 다 해주고나서 수건 찬 물에 적셔 이마 위에 올려줬다. 이제야 좀 정신이 드는지 그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역시 그 자리 가는게 아니였는데, 끝까지 거절했어야 했는데. 잘못한 건 난데 임영민은 제 이마에 올려진 내 손을 끌어내려 잡으며 그랬다.
"고마워."
목소리는 퍼석하기 그지 없었다.
"내가 너라면 힘들었을거야, 내가 세운이 였어도 힘 들었을 거고,"
"……."
"지금도 힘들 거 아는데, 정말 미안한데, 조금만 더."
내 옆에 있어줘.
그가 입으로 전하지 못한 말이 가슴으로 전해졌다.
"있을거야."
임영민이 내 옆에 있다는 건 나에게 당연했다.
그런데 내가 임영민의 옆에 있다는 건, 임영민에겐 당연한 일이 아니였던 거 같다.
임영민은 이마에 올려진 내 손을 끌어내려 내 손등에 가볍게 입맞췄다.
제일 힘든 건 임영민 너 잖아.
임영민이 내 손등에서 입술을 떼자마자 내가 먼저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가 비식 웃음 지었다. 숨을 작게 들이쉬며 눈을 감았고 나는 그를 파고드는데 집중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그의 옆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뜨겁고도 달았다. 임영민의 열병이 온전히 나에게로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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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잠이 든 임영민의 이불을 다시 정리해주고 자취방에 돌아 가려는데 열린 문 틈이 보였다. 짧은 찰나에 생각이 잠시 멈추고 발끝부터 몸이 굳어왔다. 그러나 제일 굳게 가져야 할 것은 내 마음이었기에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 문 너머에 있을 너에게, 문을 밀자 역시 네가 있었다. 세어나오는 빛 이라고는 나와 임영민의 방 안에서 세어나오던 은은한 무드등 하나가 다였던 어두운 복도에서, 다 봤을거다. 나는 방을 빠져나와 임영민의 방 문을 조심 스럽게 닫았다.
내가 피해다니자고 그랬잖아, 네가 선택한거야, 나는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일부러 보려던게 아니라, 너는 이런 구차한 변명 하나 없었다.
이렇게라도 널 봐달라고, 그게 너의 대답이라고.
그래, 세운아.
"이건 내 대답이야."
내 말에 정세운은 한 참을 말이 없다가 손에 들고 있던 걸 내밀었다. 비닐포장이 되어있는지 부시럭 거렸다. 눈살을 찌푸려 자세히 보니 우산이었다.
"이거 쓰고가요, 밖에 비오니까."
그리고 그는 엉뚱하고도 뭉특한 말을 늘어 놓았다.
"…대답해준거 고마워서 답례로 주는거니까, 가져가줘요."
"…정세운,"
"이번 답례에는, 대답 안해줘도 돼요."
정세운이 고개 숙여서 웃는다. 안녕히가세요, 그렇게 말한 정세운은 다시 방에 들어갔다. 또 다시, 그 시리기만 한 웃음이다. 손에 들린 우산을 내려다 보았다. 평생 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숙집을 나왔는데 비는 지랄맞게도 매섭게 몰아쳤다. 조금 고민하다, 어쩔 수 없이 그가 준 우산의 비닐포장을 벗겨 주황색 우산을 머리 위로 썼다. 우산에 박힌 편의점 마크를 보고 조금 멀리에 있는 똑같은 편의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와서 보니 며칠 전 길었던 소나기가 퍼부었을 때 내가 우산을 사갔던 그 편의점 이었다.
불안감이 다시금 엄습한다. 제발 아니길 빌었다.
대충 우산을 접어 문 밖에 놔두고 편의점에 들어가 우산꽂이를 뒤졌다.
"우산 여기 있는게 다예요?"
우산 꽂이 뒤지는데 정세운이 준 우산이랑 똑같은 주황색이 없었다. 순간 당황해서 알바생에게 물었고 알바생은 계산대를 개키고 이 쪽으로 오더니 다시 친절하게 물었다.
"네, 뭐 찾으세요?"
"우산중에 주황색은 없어요?"
제발 아니길 빌었다,
정세운도 나에게 전해주기 위해 우산을 산게 아니길.
"아.., 주황색은 며칠 전에 소나기왔을 때 다 나갔어요."
간신히 매달려 있던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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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차 풀려서 지금 왔네요 미안해요.. 아 진짜 길고도 힘든 시간이었답니다.... 일주일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조.. 영민아..세운아..사랑해..0404..
제목만 거창하고 물러터진 우리의 818 여주..는 사실 제 능력 부족입니다.. 열심히 18년 적인 소재를 생각해볼게요.
아 참 암호닉은 항시 받으니까요! 많이 많이 신청해쥬세요 감사합니다ㅠㅠㅠ(관리는 제 뇌피셜..=정확하지 않다..)
글구 사실은 저도 818 남주 누군지 몰라요. 818은 뒷내용 생각 안하고 쓰거든요. 쓰차 당하기 전 취미는 818 남주 누구일 거 같냐는 독방글들에 닥센,닥민,어남포,어남팤 달고 다니기였어요 헤헷ㅋㅌㅋㅋㅋㅋ,,, 항상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