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the gate-crasher), 01
너의 집으로 올라가는 길은 여전히 가파르고 어두컴컴했다.
부연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진 높다란 오르막길. 위도 아래도, 온통 허름한 철제 대문들과 파란 문패와 곳곳에 덩그러니 버려진 쓰레기봉투들밖에 눈에 띄지 않는 곳. 뒤를 돌아서면 담장 위를 걸어가는 고양이와 눈이 마주치고, 비탈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의 누렇게 빛나는 창문과 교회의 십자가가 시야를 메우는. 마지막으로 걸었던 중학생때와 변한 것 하나 없는, 끝내주게 눈에 익은 풍경이 왠지 우스웠다.
이 길만 그대로다. 너도, 나도, 너와 나를 둘러싼 상황들도 모두 끔찍할만큼 변했는데. 입술 새를 비집고 나온 웃음이 하얗게 얼어붙었다가 사라졌다.
사실 이리로 향하는 버스 안에 앉았을 때까지도 얼마나 주저했는지 모른다. 몇번이고 걸었던 거리가 창밖으로 빠르게 내달려 사라지는 것을 그저 멍청히 바라보고 서서, 손에 든 교과서를 만지작거리며.
지금도 대체 무슨 생각으로 버스에서 내려 이리로 걸어왔는지 잘 모르겠다. 습관적인, 거의 몸에 밴 것 같은 행동이었다.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누르듯이, 다치기전의 네가 공을 차듯이. 네가 그토록 익숙하다 여겼던 것들이 더이상 네게 당연한 것일 수 없게 되었을 때, 내 익숙함도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버티고 선 이 길을 아무런 어색함도, 망설임도 없이 오르는 나라니. 저기 켜지지 않는 가로등과 스프레이로 그려진 담벼락의 낙서와 턱끝까지 차는 숨소리도 모두 눈에, 몸에 익은 그대로다. 기억 끝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던 것들이 익숙한 공기를 맡고 들고 일어나 어찌해 볼 틈도 없이 다리를 움직인다. 그 골목길을 걸어올라가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까마득한 저 아래, 골목 어귀에서부터 너의 집을 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고.
네 집. 여느 집들과 다를 것 없는 대문과, 그 대문을 받치고 선 시멘트 턱과, 좁다란 마당 끝에 자리잡은 몇 칸의 낮은 계단과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이는 네 방문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네가 무엇을 어디에 숨겨놓았는지, 서랍 몇 번째 칸에 무엇이 들어있는지까지 온전히 그려낼 수 있는.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여전히 내게는 낯선 곳일 수 없는 너의 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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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순은 조용히 걸음을 멈추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그릇의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지직거리는 TV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지만, 그 앞에 버티고 선 대문 안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자리에 붙박힌 듯 서서 대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순은 괜스레 바닥에 신발 밑창을 비벼댔다. 바닥으로 떨어진 시선에 다 까져 더러워진 제 운동화가 눈에 들어온다. 이게 언제 산 거였더라.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다. 바람빠지듯 새어나온 입김이 하얗게 시야를 가렸다.
채 녹지도 않고 잿빛으로 얼어붙은 눈이 발밑에서 버석거렸다. 몇 번 발로 쓸어낸 자리에 물기에 젖어 거칠거리는 시멘트 바닥이 드러나자, 남순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줄이 끊어진 듯 덜컥, 하는 조심성없고 맥없는 움직임이다. 머리 위, 댓발자국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가로등 불빛이 슬금슬금 남순의 얼굴로 번져온다.
풀리다시피 한 눈과 함께, 얼굴에 난 상처까지.
터진 입술과 눈 밑, 부을 대로 부어오른 광대뼈. 옷에 스키드마크처럼 새겨진 잿빛 발자국들은 말 할 필요도 없고, 학교에서 걸치고 있던 점퍼는 어디에 있는지 휑하게 빈 목 언저리에도 누렇게 아물어가는 멍자국이 뵌다. 상처가 다 얼기라도 했는지 통증도 그다지 느끼지 못하는 듯, 세수하듯 뺨을 쓸어내리는 동작에 주저함이 없다.
손에 묻어나는 덜 굳은 피를 대충 바지에 문질러 닦고, 이내 다리를 아무렇게나 뻗은 채 벽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던 남순은 문득 다시 옆에 놓인 검은 비닐봉투를 집어들었다. 버스럭대며 봉투 안에 든 내용물을 싸매는 손이 발갛게 얼어 있었다. 온통 생채기로 뒤덮인 손으로 그 봉투를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고, 혹시 미끄러져 떨어질까 싶어 더러워진 교복 마이 안쪽에 넣어 단단히 붙들고 나서야 남순은 만족스레 고개를 기울였다.
추위에 발갛게 언 눈이 까무룩 감기고, 내내 목울대를 간질이던, 오래토록 어금니로 잡아 눌러왔던 이름이 잇새로 한숨처럼 새어나온다. 잊을만 하면 신물처럼 치밀어오르고 누르면 누를수록 비수처럼 제 속을 뒤집던 그 이름.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어린아이가 웅얼대듯 불분명한 그 세글자.
희푸르게 멍든 입가에 띄운 웃음이 이내 밤공기에 녹아 사라진다.
그리고 정적.
꿈꾸듯이 내뱉은 이름에 대답하는 것은 그 손 위에 내려앉은 정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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