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친 정세운
w.핑크녤
정세운을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로 전학을 온 정세운은 그 당시 키가 나보다 작았고 덩치도 작았어서 소위 말하는 일진들의 먹잇감이 되기 딱 좋았었다. 나야 뭐 걔네들 사이에선 이미 또라이로 낙인이 찍힌 상태라 일진 나부랭이들이 차마 건드리진 못하는 애였고.
한두 번 정도는 그냥 그런가보다, 저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전학 온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까지 정세운을 건드리고 괴롭히는 모습에 게다가 찍소리도 못하고 걔네들한테 휘둘리는 정세운까지 보게 되자 정체모를 정의감에 불타올라 짱이었던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갈겼었다. 제 딴에는 여자애한테 얻어맞은 게 열 받았는지 손을 올렸지만 그 당시 내가 태권도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 아이는 머리통도 아픈데 손목도 꺾이는 대참사를 당했었다.
그때부터 였을까. 정세운이 김여주 바라기가 된 건.
그 날 이후로 정세운은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교실을 주름잡던 일진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으며 나는 본의 아니게 일진들을 물리쳐 준 정의의 사도로 등극해버렸다. 그 때부터 시작된 정세운과 나의 인연은 고등학교 1학년이 됐을 때까지 이어졌다. 같은 학교, 같은 반이라는 어마무시한 족쇄로.
6학년이 되고부터 쭉쭉 자라나던 정세운은 중2가 되고나니 키도 덩치도 나보다 2배 이상 커졌고 그 무렵부터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워낙 운동신경이 좋았던 건지 몰랐던 천재성을 갑자기 발견한 건지 하루가 다르게 실력도 쑥쑥 자라났고 고2 땐 청소년 국가대표로 발탁되기에 이르렀다. 아, 난 중학생 되고 태권도 그만뒀다. 엄마가 하나뿐인 딸내미가 허구한 날 싸움질만 하고 들어온다고 끊어버렸지. 아무튼 정세운이 국가대표가 되고나니 같이 노는 날이 적어지고 얼굴 보는 날까지 줄어들다보니 전보단 어색해진 것 같았다. 물론 나만. 정세운은 '여주는요?' '여주꺼도 주세요.' '여주랑 갈게요.' '여주가 이거 진짜 좋아하는데.' 이 패턴만 반복하는 김여주 바라기로 있어줬는데.
**
"여보세요?"
-"나 오늘 훈련 일찍 끝났어. 집에 다녀와도 된대."
"그럼 집에 가야지. 이모가 너 엄청 보고 싶어 하시잖아."
-"너는."
".....어?"
-"너는 나 안 보고 싶냐고."
"하하.... 오늘따라 왜 그럴까..."
-"뭘 오늘 따라야, 맨날 이랬는데. 그럼 이따 집 앞에 가서 연락할 테니까 나와."
"어, 알겠어..."
문제는 내가 정세운을 달리 보게 된 지 벌써 1년이 넘었다는 거다. 정세운은 그저 4학년 때 저를 구해준 내가 멋있어 보여서 강아지마냥 졸졸 따라다닌 게 습관이 되어버려 지금까지 저러고 있지만 난 그게 아니란 말이지. 하루가 다르게 잘생겨지고 목소리도 잘생겨지며 키도 커지고 어깨도 넓어지고 성격까지 남자다워지는 정세운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고통을 누가 알아 주냐고.
방금 전화만 해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뱉는 안 보고 싶냐는 말 한마디가 내 심장에 어떤 무리를 일으키는지 알 리가 없지. 알면 저렇게 못하지. 가장 친한 친구인 척 내 마음을 숨기고 정세운을 대하는 게 나한테도 못할 짓이지만 정세운한테도 못할 짓이다. 자꾸 어색해하는 날 보고 서운해 하면 나는 또 그걸 달래줘야하고 자기 기분이 좀 풀렸다싶으면 그 특유의 웃는 얼굴로 날 쳐다보는데 그러면 난 또 심쿵하니까 어색해지고. 매번 이 패턴의 연속이다. 정세운은 내가 입시 스트레스로 이러는 줄 알겠지만.
[나 집 도착]
[저녁만 먹고 바로 갈게]
연달아 날아온 2개의 카톡 때문에 괜히 또 심란해지는 기분이다. 아, 답장 빨리 안하면 또 삐지는데.
[괜찮으니까 천천히 먹구오셔]
괜찮긴 개뿔. 짝사랑을 하면 늘어나는 게 참 많다. 뻔뻔함이라던가, 쿨한 척이라던가 뭐 등등. 물론 그 중에 제일은 거짓말이지.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정세운에게서 이제 출발한다는 카톡이 왔고 그 때부터 시작된 심장의 아찔한 진자운동은 거울보기를 열 번, 머리 빗기를 다섯 번, 틴트 바르기를 두 번쯤 하게 만들었다. 이건 정세운이 평생 몰라야 할 모습이고.
[도착]
오늘은 부디 어색해하지 않길.
**
"아직 저녁엔 쌀쌀한데 뭐라도 걸치고 나오지."
"괜찮아, 별로 안 추워."
"이따 춥다고 징징대도 안 벗어준다."
"더럽고 치사해서 안 입어!!!"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어색해보이지 않겠지? 말 한마디가 이렇게 조심스러울 일이냐고, 흐어엉. 이런 내 상태를 알 리가 없는 정세운은 공원 쪽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고 나도 그에 발을 맞춰 걸었다. 그냥 같은 발을 내미는 것도 설레고 좋아서.
"야. 나 금메달 따면 소원 들어줘."
"그 얘기 하려고 온 거야?"
"겸사겸사."
"소원이 뭔데."
"금메달 따고나서 알려줄게."
"오- 자신이 좀 있나본데?"
"꼭 들어줬으면 좋겠어서."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뭐든지 다 들어줄게. 대신 절대 다치지 않기다?"
"알겠다-"
정세운은 내 말투를 따라하며 피식 웃고는 이내 내 뒤로 와선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 시작한다.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내리며 하나로 모으더니 커다란 손을 꾸물꾸물 움직여 머리를 묶어낸다.
"뭐야?"
"선물. 잘 어울릴 거 같아서."
"헐. 오늘 뭐냐, 너한테 이런 것도 받고."
"아니다, 그냥 오늘 말할래."
앞서 걷던 내 어깨를 잡아 돌리고 내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히더니 내 눈을 빤히 바라본다. 숨 막혀 죽을 거 같아.
"난 너한테 뭐야?"
"뭐? 무슨 질문이 그래?"
"대답해봐. 내가 너한테 뭔지 궁금해서."
"친구고, 가족이고.. 뭐... 그런 거?"
"그게 다야?"
"그럼...?"
"남자는 아니야?"
"어?"
"그냥 친구기만 해?"
"남자인 친구지..."
"넌 나한테 친구 아닌데."
"뭐?"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넌 나한테 여자였어."
"야, 재미없어. 그만해."
"뭘 그만하래. 이제 친구도 못하는데 사귀어줄 때까지 고백해야지."
"야, 정세운."
"잘 생각해봐. 내가 너한테 한 번이라도 진심이 아닌 적이 있었는지."
"................"
"바보같이 헬렐레 하면서 너 졸졸 따라다닐 때도, 태권도 왜 시작했냐고 물어봤을 때 이제 내가 너 지켜주려고 시작했다고 대답한 것도, 나한테 단 1분도 친구였던 적 없는 것도 진심이야."
"세운아..."
"근데 넌 아니야? 한 번도 내가 너한테 남자인적 없었어?"
"....내가 있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대답해봐."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있ㅇ,"
내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세운은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끌어올려 뒷목을 잡아당겼고 그대로 입술이 맞닿았다. 그저 서로의 온기만 나누는 입맞춤이지만 이 짧은 순간이 우리의 많은 것을 달라지게 할 시작의 첫 발걸음이 될 거 같다.
이렇게 세상 다정하게 웃어주는 세운이를 보니 그 발걸음을 내딛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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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하하
여러분 깜짝 놀라셔쬬!!!
갑자기 막 삘 받아서 써내려간게 이렇게 또 일을 벌렸네요
요새 포뇨씨가 눈에 막 들어와서 한 번 써봤어요
원래는 코드 블루에 등장시킬까 했다가 지금도 인물이 저렇게나 많은데 어디다가 또 넣냐 싶어서 그냥 단편으로!
여러분 이건 단편입니다(핵단호)
전 이미 써야할게 산더미.....
아직 후아유는 시작도 못했고 그나마 코드 블루는 C편이 마무리 단계이긴 한데 아무튼!!
그냥 가볍게 읽고 쉬어가시라는 겸 해서 올려봐써여'-'
저흰 그럼 길지 않은 시간안에 다시 만나기로 해요!
코드 블루 C 먼저 올게요!!
굳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