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한 건 대부분 잘 보는 내가 하는 행동과 다르게 무서워하는 게 있다면 그건 좀비영화라고 단연코 말할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그랬다. 공포영화는 봤어도 좀비영화는 죽어도 못 봤다. 고등학교 땐 그런 적도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문학 선생님이 월드워즈를 보여 주셨는데 좀비들이 나올 때마다 나는 홀로 염불을 외웠다. 불교신자가 아닌데도 말이다. 그 정도로 나는 좀비영화를 질색했다.
당연히 김종현은 내가 좀비영화를 싫어하는 걸 몰랐을거다. 하필이면 김종현이 예매해 온 영화가 이번에 새로 개봉한 좀비영화였다. 방긋방긋 웃으면서 팝콘을 들고 서 있는 김종현을 힐끔 보다가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괜찮겠지...시발. 영화 시간이 다가올수록 괜스레 인중에 땀이 났다. 아 나 진짜 미치겠네. 그런 내 마음을 알 턱이 없는 김종현은 수줍은 얼굴을 하고선 스트로우로 콜라를 뽀로록 뽀로록 빨아댔다.
" 오빠. "
" 응..? "
" 좀비영화 좋아하나 봐요. "
점점 다가오는 영화 시간을 체크하면서 팝콘 하나를 집어먹으며 물었다. 일반화하려는 건 아니지만 보통 남녀가 첫 영화를 볼 때 좀비영화를 보는 일은 드물지 않나. 부드러운 팝콘이 입 안에 맴돌았다. 스트로우를 입에 물던 김종현은 살며시 고개를 숙이면서 배시시 웃어 보였다.
" 응..! 이짜나... "
" ...... "
" 여주 너두...좋아해? "
별안간 내게 좀비영화를 좋아하냐고 묻는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정색을 하면서 사실을 말할텐데 왜인지 김종현의 앞에서는 사실대로 말하기가 어려웠다. 기대에 부푼 얼굴로 날 바라보는데 어찌 저 얼굴에 대고 좀비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할 수 있겠냐고.
" 아 네. 저 영화 볼 때 좀비 안 나오면 안 봐요. "
이건 너무 허풍이 심했나 싶었는데 웬열. 김종현의 광대가 점점 볼록볼록 해지더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 통해써. "
" 네? "
" 하핫.. "
순진한 얼굴로 저리 좋아하는데 이제 와서 좀비영화를 보기 싫다고 하기엔...그래. 그까짓 거 그냥 눈 꼭 감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그래. 좋게 좋게 생각하자. 눈 앞에 보이는 김종현의 얼굴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여서 나는 별 수 없이 영화를 보기로 결심했다. 아마 김재환이 알게 되면 깜짝 놀랄 거다. 후. 심호흡을 간결하게 뱉어냈다. 제발. 좀비들이 별로 안 나왔으면 좋겠다.
빌어먹을 어니부기는 날 싫어한다
" 야 얘들아. 지금쯤 둘이 영화 보고 있겠지? "
" 응. 지금 막 시작했겠다. "
" 형, 형. 근데 무슨 영화 예매했어요? "
성우가 가져온 캐리어를 다리베개 삼아 재환이 벌러덩 드러누운 채 물었다. 성우 역시 재환의 옆에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키곤 소파에 앉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민현 쪽으로 몸을 틀었다.
" 아 맞아. 야 민현아 영화 뭐로 예매 했냐? "
" 종현이가 좋아하는 거. "
" 종현이 형 무슨 영화 좋아해요? 김여주는 좀비만 안 나오면 되는데. "
재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현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성우는 물론 재환이 민현을 알던 이래로 처음 보는 얼굴 표정이었다. 재환이 민현을 불렀다. 민현이 형? 하지만 민현은 대답도 않고 휴대폰 화면을 누르기 바빴다. 성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체념했다는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 큰일났네 큰일났어. "
" 형 왜요, 왜요? 설마 종현이 형. "
" 설마가 사람을 잡았네 잡았어. "
성우가 혀를 끌끌 찼다. 민현은 휴대폰 액정 속 예매되어 있는 좀비영화를 말없이 보다가 관자놀이 부근을 손으로 꾹 눌렀다. 망했다. 여주가 좀비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괴로워하는 민현을 보며 성우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갖다 주었다. 재환은 입이 벌려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학기 초 였을 거다. 이제 막 친해진지 얼마 안 된 동기들과 다 같이 휴게실에서 좀비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여주는 기겁을 하면서 재환의 몸을 사정 없이 때렸다. 악! 악! 아악!! 하도 소리를 지르기에 다니엘은 컹컹 웃으면서 그런 말도 했다. 여주야 너 발성 되게 좋다. 재환의 팔뚝에 가 있던 여주의 주먹이 순식간에 다니엘에게 향했다. 재환은 그 날 이후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김여주하고는 좀비의 좀, 자가 들어가는 영화는 다신 보지 말아야겠다.
" 여주 좀비영화 많이 안 좋아해? "
어느새 정신을 차린 민현이 혀로 입술을 쓸며 재환을 바라봤다. 재환은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 상상이상으로 안 좋아해요 형. "
" ...아.. "
" 저 김여주랑 좀비영화 같이 보고 팔에 멍 들었잖아요. "
재환은 아직도 그날 일이 선명한 듯 반대쪽 손으로 팔을 쓸었다. 성우는 그저 이 상황이 즐거워 보였다. 야 민현아 괜찮아. 가끔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뭐. 야 인마. 힘내. 말을 이으면서 민현의 어깨를 주물렀다. 민현은 처음으로 맛본 실패의 쓰라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얼굴이었다.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종현이 매번 여주의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빌어먹을 어니부기는 날 싫어한다
종현은 두 손을 공손히 맞잡고 화장실 앞에서 여주를 기다렸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여주는 종현에게 저 화장실! 짤막한 말만 남기고 여자 화장실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영화가 재미있었냐고 묻기도 전이었다. 종현은 슬슬 여주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종현은 제 옆에 여주가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콩닥콩닥 뛰며 요란스러운 운동을 했기 때문에 제대로 영화를 볼 수 없었다. 자꾸만 옆에 앉아 있는 여주에게 시선이 갔다. 몸은 가만히 굳어 있는 채로 눈만 도르르 굴려 여주를 바라볼 때면 여주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오물오물 거렸다. 같은 행동이 반복 될 즘 종현은 깨달았다.
설마, 여주가 좀비영화를 좋아하지 않는...건..가...? 불안함이 그득한 얼굴로 여주를 마냥 기다렸다. 발을 동동 구르기 직전에 다행히도 여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보다는 한결 나아진 얼굴 표정이었다. 종현은 여주의 옆으로 총총 달려가 평소에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던 여주의 얼굴 곳곳을 찬찬히 살폈다.
" 아. 영화 진짜 재미있었어요. "
종현의 눈빛을 읽은 모양인지 여주가 씩 웃으면서 머리를 넘겼다. 하지만 종현은 여전히 걱정 그득한 눈빛으로 여주를 바라봤다.
" ....괜차나..? "
종현의 시선이 조심스레 여주에게 닿았다. 여주는 입 꼬리를 씰룩이면서 종현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 안 괜찮으면 어쩌려구요 오빠. "
" ... "
" 저 진짜 괜찮아요. 배고프니까 우리 밥 먹으러가요! "
" ..으응? "
여주가 진짜 괜찮다니 다행이었다. 종현은 한시름 놓았지만 덧붙여 들리는 여주의 목소리에 잠시 이성의 끈을 놓쳐 버릴 뻔 했다. 영화를 보는 걸로도 모자라 밥까지 먹다니. 커플들만 할 수 있는 데이트 코스라고 전에 민현과 함께 본 TV 방송이 기억 났다. 종현은 예고 없이 콩닥거리는 심장의 운동을 진정시키기 바빴다.
" 오빠 덕에 공짜로 영화 봤으니까 밥은 제가 살게요. "
" 아, 안니 괜차나. 내가- "
" 사게 해주세요 오빠. 네? "
" ...녜.. "
웃으면서 말을 잇는 여주의 부탁을 감히 종현이 무슨 수로 거절을 할까. 종현은 그저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여주의 웃는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면서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하루는 아마, 종현이 군대를 제대 했을 때보다 더한 기쁨과 행복이 마음속에 두둥실 얹어지는 날이 아닌가 싶다.
빌어먹을 어니부기는 날 싫어한다
생각했던만큼 좀비영화는 무섭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거의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걸 수도. 눈을 질끈 감고 염불을 외웠더니 다행히도 소리까진 지르진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영화가 끝나고 화장실에 가서 휴대폰을 꺼내 들자 김재환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 야 너 종현이 형 안 때렸지? 어? 가당치도 않은 카톡은 보자마자 읽씹을 해주었다.
영화관 근처에 있는 파스타 집에 와서 각자 먹을 것을 시켰다. 나는 메뉴판을 보자마자 토마토파스타를 골랐는데, 김종현은 뭐가 그리 고민인지 한동안 뜸을 들였다. 오빠! 내 부름을 듣자마자 김종현의 고개가 단숨에 들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는데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결국 김종현은 필라프를 시켰다. 목살 필라프. 뭘 먹을 줄 아는 오빠네. 생각을 하면서 각자 앞에 놓여 있는 물을 마셨다. 슬쩍 김종현의 얼굴을 보는데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 ..... "
내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연달아 물만 마셨다. 참 신기하다. 분명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김종현에게 딱히 좋은 감정이 있진 않았는데. 특히나 내가 김종현을 귀여워하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꿀꺽꿀꺽 물을 마시는 김종현의 볼이 물 때문에 미어터질 것 같이 부풀어 올랐다.
" 오빠. 천천히 마셔요. 그러다 물 체 하겠어요. "
" 흨- "
내가 갑자기 말을 걸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김종현이 딸꾹질을 하면서 양 볼을 붉혔다.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콧구멍이 저절로 벌렁거리고 입 꼬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실실 올라갔지만 내가 웃으면 김종현이 분명 부끄러워할 것을 알기 때문에 참고 또 참았다. 아직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김종현을 바라보면서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오빠 제 물도 마셔요. 괜찮아요? 물음과 동시에 김종현의 작은 손이 꼼지락 거리면서 움직였다. 고개를 살살 들고 내가 건넨 물컵을 받아 든다. 꿀꺽꿀꺽. 이번에는 천천히 물을 잘도 마신다. 여전히 양 볼은 연분홍색을 띤 채였다.
빌어먹을 어니부기는 날 싫어한다
어쩌다 보니 내가 주문한 음식이 먼저 나왔다. 토마토 파스타 향이 강하게 코를 자극한다. 나는 파스타를 조금 덜어서 김종현에게 먹어보라는 시늉을 했다. 눈짓으로 말을 하니 눈짓으로 반응이 왔다. 김종현은 당황한 듯 동공지진을 보이며 파스타를 바라봤다.
"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
" 안니! 먹고시퍼. 머글 수 이써. "
굳이 먹기 싫으면 먹지 않아도 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보다. 김종현은 진심으로 파스타가 먹고 싶었던 것 같다. 결의에 가득찬 얼굴을 하고선 내가 건넨 파스타 면을 포크로 돌돌 말았다.
" 오빠 진짜 먹고 싶었나 봐요. 여기 토마토가 유기농이라 맛있는데 이것도 먹어 봐요. "
야무지게도 말았네 정말. 김종현이 돌돌 말은 파스타 면 위에 토마토 하나를 얹어 주었다. 김종현은 잠시 감동에 북받쳐 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촉촉하게 띠고선 숟가락을 입 앞으로 가져갔다.
" 으, 응..고마워 여주야아... "
말꼬리를 늘어뜨리면서 김종현이 파스타를 한 입에 넣어 먹었다. 오물거리는 입이 참 귀엽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입을 오물거리면서 눈웃음을 짓는다. 그 순간 종업원이 필라프가 담긴 접시를 들고 우리 앞으로 왔다. 김종현의 앞에 필라프의 접시가 놓여졌다. 나는 파스타 면을 돌돌 말면서 살짝 웃어 보였다.
" 오빠 맛있게 먹어요. "
여전히 입 안에 그득한 파스타 면과 토마토를 씹으면서 김종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숨을 한 번 토해냈다. 돌돌 말은 파스타 면을 입 안에 가져가려는데 김종현이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 시선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입을 벌렸다.
" 너두.. 마싯게 머거. 하핫. "
그리고는 제 것의 필라프를 적당량 덜어서 내 앞으로 조심히 갖다 주었다. 얼마 들어 있지 않은 목살을 모조리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김종현이 수줍게 건넨 필라프가 그랬다.
빌어먹을 어니부기는 날 싫어한다
민현은 콸콸 물을 틀어 놓은 세숫대에 수건을 적시곤 꽉 쥐어짰다. 화장실 밖에서 끙끙 앓는 종현의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민현은 물기를 싹 뺀 수건을 들고 종현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종현의 소 눈망울 같은 눈이 민현의 얼굴을 힘없이 바라봤다.
" 그래서 토마토를 먹었어, 종현아? "
" ....으응..여주가 줘써.. "
앓는 소리를 내는 와중에도 종현은 민현의 물음에 행복한 듯 얼굴에 웃음을 담았다. 집에 오자마자 안색이 안 좋더니 종현은 결국 침대에 철푸덕 누우며 앓는 소리를 냈다. 민현은 여주가 좀비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종현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이내 관두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충격을 받게 될 종현의 모습이 절로 상상됐기 때문이었다.
" 토마토 못 먹는다고 말하지 그랬어. "
" 어뜨케 그래.. "
열이 나는 와중에도 할 말은 다했다. 민현은 그러한 종현의 모습이 낯설다가도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어렸을 적 안 좋은 기억 때문에 토마토란 토마토는 일절 입에 대는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보면 종현이 여주를 정말 많이 좋아하나보다. 민현은 불현듯 종현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토마토쥬스를 건넨 민현의 호의를 종현은 일말의 고민 없이 거절했다. 미아내. 토마토는 시러해서. 그 때의 종현의 모습이 지금 누워 있는 얼굴과 겹쳐 보인다. 토마토를 싫어해서 입에 대지도 않던 종현이 이젠 먹기까지 한다.
" 여주가 그렇게 좋아? 토마토도 먹을 만큼? "
민현은 종현의 얼굴 위로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넌지시 물었다. 종현은 두 눈을 폭 감은 채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 미녀나 자꾸 당연한 거 묻지 말아져.. "
" 아- 당연한 거야 종현아? "
대답 대신 종현은 고개를 두 어번 끄덕였다. 그리고는 여주의 생각이라도 하는 듯 입가에 돋아난 웃음을 지울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조그마한 입술을 벌렸다.
" 이짜나 미녀나... "
" 응 종현아. "
느릿하게 종현의 눈이 떠졌다. 눈가와 입가에 웃음이 가득했다. 종현은 그저 행복한 웃음을 퐁퐁 피우면서 민현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 ...토마토가, 좋아져써. "
수줍은 종현의 귀여운 고백이었다.
꼭 넣고 싶었던 스또리입니다ㅋㅋㅋㅋㅋㅋ
종현이가 실제로도 토마토를 싫어하자나요..? 여주를 통해서 극-뽁-☆
뭐 실제론 여전히 종현이 토마토 안 좋아하지만 흑흑
도짜님들 제가 원래 더 일찍 오려고 했는데
임시저장 해 놓은 게 다 날아갔더라고요....? 울 뻔 했고요..? 흑흑
다음편은 지인짜 일찍 올게요 안 오면 제겐 죽음뿐이라고 말해주세요ㅎㅁㅎ
읽어주셔서 감사하고요 도짜님들 새벽에 잠깨워서 죄송합니다...^^..//
아 마자 글고 조만간 암호닉 정리 할겁니다 그럼 잘자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