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정호석] 난희 上
W.교수
탁월하게 아름다운 것.
이시즈카 가(石塚家).경성에서 악명 높기로 유명한 친일 가문이었다.안국동 네거리로 올라가는 길목에 우뚝한 기와지붕 저택이 그들의 본거지였다.왕가의 것처럼 우뚝 솟은 대문은 이시즈카의 사기를 과시하는 듯 했으며, 유려한 자태의 담청은 행인들의 기를 죽임과 동시에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할 정도의 위엄을 뽐냈다.제작년 쯤부터 경성에 더 이상 이시즈카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공연, 영화, 경영 심지어는 교통까지 다 그들의 손아귀에 있었다.이시즈카의 수장인 이시즈카 오다가 총독부에 재산 절반을 바쳤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지만, 사실 그 진상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진실을 파헤치는 것보단 본인들의 목숨이 더 소중했기에, 사람들은 쑥덕거리는 것에서 제 본분을 그쳤다.
여기.옆 동네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한 양담뱃집.
금일 장사를 접은 인력거꾼 몇과 근처 술집에서 일하는 기생 몇, 그리고 동네 아낙 몇이 둥그렇게 앉아 있다.
그들은 담배를 나눠피며 최근 가장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소식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 소식 들었어요?이시즈카 차남, 혼삿길에 오른다던데."
"들었지 그럼.그 엄청난 소식을 누가 모르려구."
자욱한 담배 연기 아래로 경성 바닥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미스테리한 사내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이시즈카 타카히로.한번도 대문 밖의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을만큼 비밀스러운 남자였다.외출을 할 때에는 항상 마차를 탔고, 심지어 마차의 창은 늘 암록색 커튼으로 단단히 닫혀 있는 채였다.그래서 타카히로를 둘러싼 소문은 지나치리만큼 현실적이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이를테면 뿔이 난 괴물이라던가, 눈이 마주치면 돌이 되어버린다던가 하는.아니면 오히려 눈을 떼지 못할 정도의 미남이라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었다.뭐가 어찌 됐건 확실히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분명한 소문들이었다.
" 그런데, 어떤 용기 있는 처자래요?이시즈카의 짝이 된다니.웬만한 깡 아니면 엄두도 못내볼텐데."
"그 여자라던데, 그그, 왜, 단성사 윗동네 수은동 전당포 첫째 딸.춤바람 나가지구, 요번에 전국대횐가 뭐시긴가 나가서 우승했다던디."
모여앉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같은 뜻의 탄성을 내질렀다.아, 그 아가씨.알다마다.
인력거꾼 김씨가 담배연기를 뻐끔뻐끔 붕어처럼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기생 하나가 놀란 얼굴을 하고 되물었다.
"동경전국대회 나가서 무용으로 우승했다던 김난희 말하는 거죠?그 예쁘장하게 생겨서 분위기 야실야실한 애."
그들이 모두 타카히로를 당연히 알고 있는 것처럼, 난희 역시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터였다.다 무너져가는 집안을 나비같은 손짓 하나만으로 돈방석에 앉혀놓은 기적이라고 다들 입을 모아 얘기해대니 모를 수가 없었다.기생의 말마따나 난희는 예쁘장하고 분위기가 오묘했는데, 목덜미가 희고 긴 머리칼에 얄쌍한 눈매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정말 대단한 처녀지.인력거꾼 장씨가 말했다.그는 역에서부터 조선호텔까지 여러번 인력거를 몰았던 며칠 전을 떠올렸다.
"둘이 어쩌다가 눈이 맞은 걸까?더군다나 타카히로 그 친구는 밖을 나돈단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조선호텔 입구 앞에는 붓으로 거칠게 휘갈겨 쓴 대자보 하나가 기세 좋게 펄럭이고 있었다.
「 꽃같은 맵시 나비같이 뛰노는 김난희양의 무용 - 조선호텔 1층 그란드홀. 일곱시부터 」
장씨는 손님에게 돈을 거슬러주며 그 문구를 눈으로 훑어읽었다.
그리고 입구 계단 위에서 양복을 입고 신사들과 악수를 하고 있던 오다를 발견했다.
공연의 후원이 이시즈카구나.두 남녀의 만남의 시초를 충분히 어렵지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하여튼간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겠지.원래 잘난 놈들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니까."
그들이 담배방에 둘러앉은지 어언 한 시간도 넘게 흘렀다.
어둑해진 바깥을 둘러 본 아낙 하나가 집에 가보겠다 일어서자 다들 해산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만 떠들고 내일 생각해서 가서 쉬자구.모임이 파하자 담뱃집의 덧문이 내려갔다.웅성거리던 골목에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이시즈카 저택의 응접실에는 불이 들었다.소문의 두 주인공이 저녁 만찬을 위해 모인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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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석하게도, 타카히로는 소문만큼이나 괴상한 생김새를 한 청년이 아니었다.오히려 그 반대라면 반대였다.그는 길을 가다 마주친다면 한 번 더 뒤를 돌아볼만큼 단정하고 고고한 분위기를 가졌으며, 성격 또한 모나지 않고 서글서글했고,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가르침을 받아온 예의와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사내였다.
그의 시중을 드는 집안의 하녀들의 말을 빌려오자면, 선하게 처진 눈꼬리와 입매가 매력적인, 힘이 바짝 들어간 어깨와 허리선이 근사한 장정이라 하였다.
베일에 싸인 타카히로라는 청년은 사실 어디에 내놓아도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신사였다.
그런 그가 외출을 꺼려하고 공식석상에 제 존재를 노출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타카히로 도련님."
아침 식사가 담긴 쟁반을 든 하녀가 그의 방 문 앞에서 정중하게 그를 불렀다.곧 안쪽에서부터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문고리가 달그락대며 문이 열렸다.
이시즈카에서 시중을 들기 시작한지 채 삼일도 되지 않은 그녀가 긴장감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그의 앞으로 쟁반을 내밀었다.
조식입니다.하녀의 떨리는 손을 보고 냉큼 쟁반을 받아든 그가 물었다.
"우리 집에 온지 얼마 안 되었나요?"
"예?예…오, 오늘까지 삼일 째입니다."
"어쩐지."
그의 상냥한 목소리와 말투에 그녀가 용기를 가지고 힐끔 고개를 들었다.
잔뜩 겁에 질린 앳된 얼굴이 그의 동공 안에 비쳤다 황급히 사라졌다.타카히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을 땐 나를 타카히로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럼 어떻게…,"
한 손으로 능숙히 쟁반은 받쳐든 그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내 이름은 타카히로가 아니고, 정호석입니다."
닫힌 문 앞에서 벙쪄있던 그녀가 한참같은 찰나 뒤에 붉어진 귀끝을 하고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왔다.
그와 일면식이 없는 사람이 그를 처음 만나는 순간의 대화와 미소, 그리고 동경.그것은 이 저택 안에서 가장 많이 번복 되어온 장면이었다.
그는 제 일본식 이름과, 친일로 명성이 드 높은 제 집안과, 그걸 자랑스레 여기는 아버지가 지독히도 증오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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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살과 천 조각 아래 살이 살아 움직였다.온갖 자태로 쉬지않고 동작을 바꾸어갔다.그녀의 공연을 보는 삼십분 내내 가슴이 파도치듯 출렁이며 요동쳤다.천부적인 몸매와 세련된 표현력, 순진해뵈는 처녀의 곡선미를 예술로 표현하는 것.그것이 눈 앞에서 실제로 일어났다.나는 감히 주장하겠다.일제시대 문화정치 개국 이래, 예술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완벽히 소화해낼 수 있는 여인은 김난희 하나 뿐일 것이라고.
구월 이십칠일.-김난희양의 귀국 기념 무용공연, 해성극장 일곱시부터.
빳빳이 펼쳐져 있던 신문 위로 눈동자가 번쩍 빛이 났다.
"아버지."
저녁식사가 한창이던 테이블 위, 식기와 그릇이 부딪히는 소음 사이로 생기가 도는 호석의 목소리가 튀었다.그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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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경성일보의 1면은 일제의 독재정치를 옹호하는 친일성 투고글 및 자질구레한 기사 대신 통 난희의 이야기로 가득해졌다.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 경성 바닥에서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끌어모으는 유일이 그녀 뿐이었기 때문이였다.조선인 최초의 여자 무용가.그 수식어는 일반인들에게 가히 대단하게 비춰졌고, 실제로도 대단한 것이었다.그녀의 무대를 본 사람들이라면, 조선인 일본인 할 것 없이 으레 입을 모아 칭찬했다.경성이 피워낸 한 떨기의 꽃.어떠한 기자의 김난희 찬양론에 가까운 기사에는 그러한 표현까지 사용될만큼, 그녀는 경성을 대표하는 얼굴이 되었다.
난희는 동경선수권대회에서 보란듯 우승컵을 거머쥐고 귀국한 후에 이시즈카의 후원을 받아 성대한 귀환 기념 공연을 열 수 있게 되었다.분장실에 앉아있는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 일본인 매니저 류이치상에게 전해들은 소식이었다.이시즈카 가문에서 네 공연을 후원해주시겠대.그 연유는 류이치상도 알지 못했지만 나쁠 것이 하나 없는 좋은 일이었기에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덕분에 장소도 자그마한 이름 모를 극장에서 조선호텔로 바뀌었고, 화장과 의상의 질도 확연히 높아졌다.그녀는 거울 앞에 앉아 다시 한 번 틀어올려 묶은 머리를 정리했다.훤히 드러난 어깨와 쇄골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빛을 받아 하얗게 빛이 났다.
공연 30분 전.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네, 들어오세요.옷매무새까지 정리한 그녀가 막 일어선 참이었다.조심히 문이 열리고, 겨울밤 새벽달처럼 쌀쌀한 안색의 얼굴이 비춰졌다.처음 보는 낯선 이였다.그는 자신을 이시즈카 가의 둘째 아들이라 소개했다.입술 새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악수를 청하는 손은 곡선으로 뻗어져 있었다.그녀도 그를 둘러싼 소문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그러한 소문들과는 전혀 딴판인 얼굴과 이미지를 가진 그가 단번에 마음에 들었다.자신을 타카히로가 아닌 정호석이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것까지도.
"오늘 공연 잘 하시라는 말씀 드리려고 들렀습니다."
"감사합니다.혹시 후원을 청해주신 게 호석씨인가요?"
"그렇습니다.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거든요."
공중에서 부딪힌 시선이 섬광같았다.
난희는 호석의 너른 품에 안기는 상상을 했다.난생처음 긴장이 아닌 설레임으로 가슴이 뛰었다.
단단하게 잡혀있던 두 손이 떨어지고 맞닿아있던 두 시선도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편하게 준비 마저하세요."
그가 뒤를 돌았다.반듯하게 잘린 뒷목 위의 새카만 머리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어깨에서 딱 떨어지는 재봉선의 양복.
호석의 정수리부터 구둣발 끝까지 난희의 시선이 훑어내려왔을 때 호석은 이미 열린 문 사이로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 호석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그리고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겼다.
성큼성큼, 덧신만 신겨져 있는 맨발으로 걸어가 그의 팔목을 움켜쥐어 돌려세웠다.놀란 눈이 다시 저를 비췄다.단정한 눈썹에 산이 생겼다.
"오늘 밤에 만날 수 있을까요?"
"…저랑요?"
"네.열시에 남촌에서 봐요.같이 술 마셔요."
호석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미미하게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은 그녀가 그러쥔 그의 손을 얼굴께로 가까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손목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호석의 손목에 분홍빛의 입술자국이 남았다.
그의 귀와 목이 온통 붉게 달아올랐다.손을 놓자 황급히 셔츠 소매를 끌어올려 그녀의 표식을 덮는다.
"그럼, 진짜 가보겠습니다."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문을 닫고 사라지는 호석이 귀여워서 난희는 소리내어 웃었다.
호석이 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진 복도에 등장한 류이치 상이 분장실 안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연 전에 매일 같이 청심환을 챙겨 먹는 애가 웬일로 저리 편하게 웃고 있을까.아마 그는 그 안에서 난희와 호석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평생 모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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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귀환 기념 공연은 성황리에 무사히 끝이 났다.호석은 2층의 맨 가운뎃 자리에서 그녀의 공연을 관람했다.호석에게 난희의 무대는 살아생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충격으로 다가왔다.분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도 맨살을 가감없이 드러낸 의상에 눈 둘 곳을 정하지 못하긴 했었지만, 무대 위의 그녀의 모습은 그보다 백 배 쯤 더 과감했다.높게 위로 뛰는 동작에서 흩날리는 허벅지 위의 짧은 치맛자락과 팔을 들 때마다 드러나는 겨드랑이가 유난히 그랬다.몇 주 전 신문 1면에서 읽었던 기사의 문장 하나하나의 묘사에 지극히 공감 하는 바였다.그녀의 손끝부터 발끝까지, 예술이 아닌 곳이 단 한 부분도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북적이는 호텔의 현관을 빠져나와 호석은 마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나중에 아버지가 저를 찾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약속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사실이었다.그는 한 순간, 하룻밤만에 그녀에게 빠져버린 자신이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모순적이게도 이해할 수 있었다.그의 인생에 그렇게 과감하고 매혹적인 여성은 처음이었으니까.그녀는 확실히 여느 여인들과 다른 구석이 있었다.어쩌면 그간 소망하던 제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바람에 넘어간 가르마를 정리하고, 중절모를 깊게 눌러쓴다.자꾸 거울에 비치는게 제 모습이 아닌 난희의 얼굴이라서 목이 화끈거렸다.
회중 시계의 짧은 시곗바늘이 10을 향해갈 수록 그는 조급함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소매 밑에 여전히 남아있을 그녀의 표식은 차마 확인해보지도 못할만큼, 부끄러웠다.
처음으로 제 두 발을 사용해 뒷대문 밖으로 발을 내었다.긴 코트 자락이 다리에 휘감겨왔다.깃을 여미며 그는 남촌을 향해 걸었다.
나오기 전 확인했던 시간은 아홉시 사십이분이었다.
조금 재촉해 걸으면 충분히 열시 안에 그녀와 약속했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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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촌의 광교 위.뛰어오다시피 걸음한 탓에 호석의 숨이 가팔랐다.시계 바늘의 위치를 확인하고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난희가 온몸을 가리고 있다고 한들 못알아 볼 리가 없는데.그가 비뚤어진 모자를 다시 바로쓰고 혹시나하는 마음에 다리 아래까지 내려다보려던 순간,
"쉿."
등 뒤에서 나타난 하얀 손이 그의 입을 막고 허리를 단단하게 감았다.놀란 호석이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난희가 깔깔 웃으며 호석의 어깨를 잡아당겨 제 쪽으로 몸을 돌려냈다.많이 놀랐어요?굳이 묻지 않아도 호석의 표정이 모두 말해주고 있는 터라, 그녀는 그의 팔에 자연스레 제 팔을 끼워넣으며 사과했다.미안해요, 밤 중에 너무 심한 장난을 쳤네 내가.광교를 가로질러 남촌 거리일대로 내려와서야 호석은 하얗게 질린 얼굴에 혈색을 되찾았다.
"내가 자주 가는 곳으로 가도 괜찮을까요?"
말쑥한 키와 몸매의 두 남녀는 밤중에도 시선을 톡톡히 잡아끄는 중이었다.연이어 지나가던 일본 순사들이나 행인들이 그들을 여러 번 돌아보자 호석이 불안감에 아랫닙술을 씹었다.난희가 잡은 호석의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우리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요.덧붙여진 그녀의 말에 호석은 옅게 웃었다.그래요.긍정의 의미를 담은 미소였다.
"난희 아가씨, 오랜만이네요."
호석은 난희를 따라 가는 게 거리 전부가 마법에 걸려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한참 골목골목을 돌고 내리막길을 밟아서야 비로소 발이 멈추었다.회칠된 벽 위로 비뚤한 지붕이 얹어져 있는 반지하의 건물 앞이었다.백열등 전구가 힘겹게 깜빡거리며 간판을 비추었다.천년의 봄.그 글자를 입 안으로 굴려볼 새도 없이 호석은 난희에게 이끌려 들어갔다.예상 외로 아늑하고 세련된 내부를 둘러보며 호석이 감탄하고 있을 때,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둘러 입은 여인이 불쑥 튀어나오며 두 손님을 맞았다.난희와는 아는 사이인지 친근히 인삿말을 건네왔다.
"옆에 계신 잘생긴 신사 분은 누구?"
"글쎄, 그건 아직 저도 잘 모르겠어요.마담, 가장 안쪽 방으로 내어줄래요?"
여인이 흥미롭다는 듯 씩 웃었다.이 쪽으로 쭉 가면 있는 맨 끝 방으로 들어가세요.늘 마시던 걸로 가져다 주면 되겠죠?눈이 마주친 호석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성에 이런 곳도 다 있구나.사실 가 본 곳보다 안 가 본 곳이 더 많은지라 그저 모든게 신기할 뿐이었다.문이 닫히고, 여인이 들어와 앞에 각각의 술잔을 내려놓고 나갈 때까지 방 안에는 어색하지 않은 정적이 흘렀다.호석은 난희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봤다.난희는 어깨에 두르고 있던 숄을 풀어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호석의 잔에 술을 따랐다.
"호석씨."
"네."
"제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아요."
아닌가요?모든 걸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미소였다.호석의 앞으로 잔이 내밀어졌다.독하지 않은 양주였다.
그녀의 손에서 병을 넘겨받아 이번에는 호석이 난희의 잔에 술을 채웠다.그 행위에 집중해있던 호석의 입이 나지막히 열렸다.
"할 말이라는게, 한 두가지가 아니라서.어떤 것부터 하면 좋을까요?"
잔이 허공에서 크지 않은 소리를 내며 부딪혔고, 이어 각 주인의 입술 안으로 술을 흘려보냈다.
난희가 노골적인 시선으로 호석을 마주보며 몸을 그에게 더 가까이 당겨 앉았다.
호석은 그런 그녀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대신 애정을 느꼈다.이 마음이 내일도 모레도 그대로일 것 같았다.
"우리 만난지 몇시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
"아버지를 증오하죠?"
어쩌면 예상했었던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난희의 뻗어진 손이 호석의 손을 쥐었다.
여성의 손과 비교해도 손색 없을만큼 곱디 고운 살결이 그녀의 손 안에 가득 담겼다.
"이 일 하게 되면서 아는 일본인이 아주 많아졌거든요.어쩌면 세간에 떠도는 소문보다도 더 많이 호석씨를 알고 있을지도 몰라.
처음엔 독립운동가셨다죠?어떤 연유로 하루아침에 일본의 개가 되기를 자청하셨는지 짐작 가는게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어보고 싶어서."
난희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푸르고 붉은 조명 아래에서도 그녀의 얼굴은 환히 빛났다.
호석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턱과 볼을 조심히 그러쥐었다.주문을 속삭이듯, 그녀의 입술은 계속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말해줘요.어쩌다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그렇게 팔아 넘기게 됐는지.그리고 왜 아직까지 당신은 그 밑에서 아버지를 이용하고 놀아나고 있는지."
"……난희씨."
"궁금해.타카히로."
한 뼘도 채 남겨두지 않았던 두 사람의 거리가 단번에 좁혀졌다.
복숭아를 베어물듯 부드럽게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졌지만, 호석의 눈은 범의 것처럼 형형히 빛나며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말해주면, 나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해요."
"……."
"나를 사랑할 수 있어요?"
난희가 지금까지 당돌했던 기색과 달리, 조금은 긴장한 안색을 비췄다.
그녀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떨리고 있었다.호석이 시선으로 그녀의 눈, 코, 입을 차례대로 훑어내렸다.
"당신이야말로,"
이번엔 난희가 먼저 호석에게 입술을 맞대었다.
"나를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것은 그의 물음에 대한 긍정의 대답이었다.호석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 안으며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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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편은 이번주 일요일~다음주 금요일 사이에 업뎃 될 예정입니다 ㅠ_ㅠ
최대한 늦어지지 않도록 빨리 들구 오겠습니다!
역시 분수에 맞지 않는 글을 쓰려니 힘이 드네요...흑흑
논필터의 풀버전을 올릴 수 없어서 넘나 아쉬워줍니다ㅠㅠ
요즘 날씨도 덥고 습한데 다들 불쾌지수(? 조심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 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