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the gate-crasher), 02
"누나 갔다 올게. 문 잘 잠그고."
훤한 오후임에도 공기는 차가웠다. 흥수는 무심결에 바지 주머니에 손을 우겨넣으며 작게 하품을 했다.
신발을 신고 나서도 누나는 문간에서 그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다. 그리고 아마 그것은 그녀가 이리 머뭇댈만큼 예민한 화제, 적어도 듣기 좋지는 않은 이야기일 터였다. 흥수는 모르는 척 씩 웃으며 대답했다. 올라간 입꼬리와는 달리 뻣뻣이 굳은 뺨을, 과연 제 피붙이인 누나가 모른 척 해 줄지는 미지수지만.
"어. 나 애 아냐. 조심해서 다녀와."
"...그래. 그리고 흥수야."
그 다음에 올 말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웃는 얼굴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묻는다. 이 쪽이 훨신 편하다. 제 속을 다 까발려 보여봤자 누나도 자신도 상처만 받을 뿐이다.
"어?"
"학교..졸업 하자. 꼭."
누나는 한참을 망설이고 망설였을, 결코 마음 편하게 뱉어낼 수 없었을 말을 마침내 입 밖에 내었다. 밝은 어조를 띄고는 있지만, 그 속이 저때문에 얼마나 시커멓게 타들어갔을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뼈에 사무치는 죄책감으로 매일 느끼고 있었으니까.
흥수는 아무 말도 않은 채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
"..갔다올게. 끼니 거르지 말고 잘 챙겨먹어야 돼?"
누나도 어색하게나마 웃는다. 그 시간들이 지난 후에 남은 것은 이런 어색하고 불편한 순간들을 어떻게든 무마시킬 수 있는 미소뿐이었다.
"...응."
누나는 가는 길에 몇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나이 차이도 몇 살 나지 않는 남동생이 못내 걱정스러운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흥수는 누나가 돌아볼 때마다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자신은 어떻게 해도 누나의 근심을 덜어줄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웃음으로는 아무것도 덮을 수 없다는 것을 누나도 자신도 잘 알고 있으면서, 이럴 때마다 입술은 가장 손쉬운 해결책을 찾아 웃음을 짓는다. 아무리 웃어도, 세상이 떠나가라 크게 웃어도 병신, 그것도 축구선수가 꿈이었던 다리병신 남동생은 언제까지고 누나의 걱정거리로 자리한 채 잊을 만 하면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그날 으스러진 다리는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단지 축구를 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웃기는 모순이라고, 흥수는 생각했다.
축구가 내 일상이었는데. 매일매일 마주치는 가장 흔하고, 또 가장 좋아하는 것. 끔찍할만큼 좋아했던 것. 그게 내 일상이었는데.
누나에게는 한번도 말하지 않았다. 제가 얼마나 축구를 좋아했고, 축구부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얼마나 기뻐했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사라졌을 때, 다리와 함께 으스러져 쓰레기처럼 버려졌을 때 얼마나, 제가 얼마나. 죽고싶었는지.
픽, 하는 웃음이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입술 새로 비죽비죽 새어나온다. 문득 그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엿같다. 참 엿같은 일이다. 축구, 다리. 그리고 그 새끼. 셋 중 하나라도 떠올릴라치면 나머지 것들이 무서운 속도로 기억의 저편에서 들고일어난다.
축구공, 운동장, 축구부 입단에 대해 떠드는 코치의 얼굴, 몸 위로 쏟아지는 발길질과 제 다리를 내리찍던 그 발과 제가 내지른 짧은 비명, 그리고 그 새끼의, 저를 내려다보던 그 새끼의 한없이 당혹에 젖은 넋나간 두 눈.
학교에 다시 돌아갔을 때, 그 새끼의 책상은 이미 비어있었다. 아무데도 없었다. 자신만, 그저 망가진 다리를 끌고다니는, 한순간에 세상의 전부를 잃은 자신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빈 책상 앞에 섰을 때, 마침내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제 전부를 손아귀에 쥐고 사라진 그 새끼가 제 인생에서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했는지, 자신이 얼마나 그 개만도 못한 새끼에게 의지해왔는지를 알았을 때.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흥수는 학교를 나왔다. 담임은 너무나 쉽게 자퇴서를 결재해 주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알고있던 세상이 송두리째 바뀌고, 무너지고, 사라진 자리에 그대로 남을 자신이 없었다. 저를 주축으로 모든 게 달라져, 손댈 틈도 끼어들 틈도 없이 돌아가는 세상, 학교에 돌아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제가 저지른 짓에 우스울만큼 벌벌 떨던 그 눈과 마주하고서도 자신이 그새끼에게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 기대마저허섭스레기처럼 던져버린 놈을 그때까지도 친구로 여기고 있었음을.
소설이건 영화건 상관없이 고전적인 주제로 등장하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운동선수' 에게는 썩 잘어울리는 최후라고, 흥수는 가끔 생각했다. 영화 속의 주인공들과 다른 게 있다면, 그들은 고난과 역경을 헤친 끝에 부상을 딛고 꿈을 이루겠지만 자신은 여전히 이대로 남을 거라는 사실이라고. 다리병신으로, 안락사를 기다리는 경주마처럼. 그저 '참 대단했지' 하는, 영원히 과거형으로만 남을 쓰린 찬사에 젖어서.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아주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등을 기댄 자리에서 그대로 옆으로 무너진 듯 기역자로 웅크린 자세가 불편했다. 일어나 앉아 목이며 허리를 툭툭 쳐도 근육이 뭉친 것처럼 저릿저릿하기만 하다. 벽에 기대어 앉은 채 고개를 들어 이미 날이 저문 창밖을 바라보며, 흥수는 학교를 가지 않은 것, 제 누나의 애원에 가까운 부탁을 저버린 것에 대한 미약한 죄책감을 느릿느릿 곱씹었다. 그저 무기력하게 흘려보낸 시간들이 쓰리게 혀끝에 닿아온다.
무의식중에 입을 벌리고 잤는지 허옇게 바작바작 마른 입술을 무심히 쓸어보다가, 흥수는 문득 누나가 나간 뒤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움직이질 않아서인지 배는 그리 고프지 않지만, 입술과 함께 말라버린 입안과 목의 갈증은 침을 삼켜도 좀체 가시질 않는다. 방바닥을 짚고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흥수는 누나가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간 돈을 집어 주머니에 우겨넣었다. 오만원짜리 한 장. 지방에 내려갈 때마다 그랬듯이 밥도 밑반찬도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여있지만, 다시 덥히고 차려내기가 귀찮아 골목 끝 슈퍼에나 다녀올 심산이었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벽에 걸린 후드집업을 대충 걸치고, 점심 즈음 누나가 나간 뒤로 계속 내팽개쳐져있었을 스니커즈를 꿰어신는다. 문 틈으로 새어들어온 찬 공기에 뻣뻣해진 스니커즈 속 맨발이 잠시 꾸물거리다 제 자리를 잡는다.
문을 잠근 흥수는 몇칸 없는 계단을 날듯이 뛰어내려갔다. 성큼성큼 걸어 세네발짝이면 되는 마당을 걸어 그대로 대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아니, 대문이 평소처럼 멀쩡히 열렸더라면 그랬을 거란 소리다.
너무 놀라 짧게 들이킨 숨이 폐를 저미듯 쓸고 지나갔다. 대문을 밀려던 손은 허공에 붙박힌 채 움직이지 않는다.
대문에 누군가 기대 앉아있었다. 제 집 대문도 알아보지 못하는 주정뱅이들이 주저앉아 있거나 속을 게워내 놓는 게 처음은 아니었으나, 대문에 기댄 그림자만 보면 여전히 흠칫 놀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새벽 즈음에는 술이 깨어 비칠비칠 걸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괜히 사리분별 못하는 고주망태와 엮여 동네를 시끄럽게 만들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흥수는 조용히 뒷걸음질쳤다. 행여나 잠을 깨워 주정이라도 늘어놓을까 싶어 조심스러운 걸음이다. 조금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담을 넘어 뒤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에 흥수는 귀찮은 듯 미간을 구기며 뒤돌아섰다.
그때였다.
흥수의 발 밑에 부스러지는 시멘트 소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목덜미를 쓸고 지나가는 바람이 너무 시렸기 때문인지 문에 기댄 그림자가 쿨럭쿨럭 밭은 기침을 토해냈다. 억누르듯 이어지는 기침 사이사이에 드는 들숨에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앞을 바라보던 눈도, 내뻗은 발도, 후드 주머니에서 지폐를 만지작대던 손도 등 뒤에서 들려온 그 소리에 굳는다. 흥수는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섰다. 알고 있었다. 저 목소리를, 끔찍할만큼 잘 알고 있었다. 이를 악물며 짓이기는 신음도, 힘겹게 내뱉는 기침도 귀에 익었다.
흥수는 어느새 뒤로 돌아 그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문가로 다가간다. 옆 문을 밀어 여는 손이 조금 떨린 것 같기도 하다.
하하.
조용히, 이상한 열에 들뜬 듯 입꼬리가 찢어질 듯 당겨올라가고, 이내 작위적인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눈앞에 주저앉은 이는 미친듯이 연이어 터지는 웃음에도 미동조차 없다.
쾅.
다리가 대문을 걷어찼다. 발끝에서 치미는 둔통도 인지하지 못한 채였다. 그렇잖아도 녹슨 철문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끼익거린다. 평소같으면 누구 하나 창문을 열고 마주 소리지를 것이 분명한데도, 오늘따라 주변은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하다.
너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다.
흥수는 허리를 굽혀 조용히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얼굴에 와닿는 숨이 차고 가늘다. 씨발. 흥수가 작게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이미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래, 내가 어떻게 잊겠어.
그림자의 붉은 기 도는 머리카락 위로 부서지는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흥수가 이를 갈듯 씹어뱉었다.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 단 하루도 네 생각을 안 한 날이 없어. 달콤한 말들을 흘리며 멱살을 잡아쥐는 손이 거칠었다. 그 손 안에서 이미 더러워진 셔츠가 다 시 한 번 구겨진다.
흥수는 다시금 미소지었다. 호선을 그리는 입술도 흐릿하게 접히는 눈꼬리도 즐거움에 젖은 아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으나, 눈동자만은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를 못박힌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보고싶었어, 고남순.
셔츠깃을 움켜쥔 손이 문득 떨렸다.
제 손안에 쥔 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고개를 숙이며, 흥수가 조용히 한숨을 뱉었다.
푸르게 날이 선, 웅크린 등으로 고요한 파문이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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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류입니다:) 오늘은 2편을 들고 왔어요. 1편보다는 좀 더 길어진 느낌이져!! 어찌어찌 끼적거리기는 했는데 다음편부터 어떻게 진행을 시켜야될지..헣헣허ㅓ허헣ㅎ허ㅓ휴ㅠㅠㅠㅠ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가져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0^ 봐주셔서 감사드리고, 암호닉 넣어주신 독자님, 신알신 해주신 독자님 사랑해여ㅠㅠ 고자손이지만 열심히 놀려서 만족하시도록 노력할게요ㅠㅠ 담편에 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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