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내가 왜 친구야?
Writer. 저편
"웬일로 일찍 나왔네. 어제 늦게 자는 것 같더만."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 뒤에서 달려와 확 어깨동무를 걸치는 바람에 가뜩이나 아침이라 힘없는 몸이 앞으로 격하게 쏠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박우진이다. 거의 넘어지기 직전인 내 팔을 녀석이 확 잡아당겨 자신의 옆에 세웠다.
잠와서 뒤질 것 같다. 사실은 어젯밤, 계속 질질 짜기만 하다가 결국엔 잠을 못 잤거든. 아, 물론 그 긴 시간동안 정말 울기만 한 건 아니고 뭐… 갤러리에서 박우진이랑 찍은 사진을 본다던지, 아님 페이스북으로 박우진 계정을 염탐한다던지, 아니면… 까지 했는데 돌연 박우진이 걸음을 조금 빨리 해 내 앞에 섰다. 당연히 내 걸음은 녀석에 의해 막혀버렸고. 그렇게 이른 아침이라 사람도 몇 없는 길목 한가운데 마주보고 우뚝 섰다. 뭐… 뭐야 근데. 너 왜 그래, 하고 묻기도 전에 녀석이 내 턱을 살짝 잡아 내 고개를 들어올렸다. 자동으로 녀석과 눈이 마주치고, 자기가 만들어 놓은 상황임에도 조금 쑥스러웠는지 피식 웃던 녀석이 불쑥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내 박우진이 내 턱을 놓고, 반댓손으로 내 눈을 톡톡 건드린다.
"눈은 왜 이래 부었는데. 울었나."
"……."
"많이 아프면 말을 하라고 좀."
아, 아침에 붓기 뺄려고 별 짓을 다 했는데 여전히 부었나 보네. 그런 내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박우진이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다 뒤로 메고 있던 자기 가방을 앞으로 메곤, 뭔가를 꺼내 내게 건넨다.
"자, 약."
"…엥? 나 이 약 먹는 거 어떻게 알아."
"네가 저번에 우리 집에 놔두고 갔다이가. 그래서 똑같은 걸로 샀지."
…나 주려고 이걸 사 왔단 말이야? 네가 왜.
그러거나 말거나 박우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손목에 약봉지를 걸쳐주더니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내 등을 살살 떠민다. 뭘 그래 보는데. 자, 가자.
또 바보 같이 울컥, 뭔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 날은 무슨, 다 거짓말인 걸 너만 몰라 너만.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아픈데. 누구 때문에 밤새 잠도 못 자고 울기만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자꾸 날 챙기며 신경쓰는 박우진이 미웠다.
차라리 누가 이제 다 끝난 일이라고 내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더 이상 미련 갖지 않고 깔끔하게 접을 수 있을 텐데.
그냥 네가 한 번 더 말해 줬으면 좋겠다. 우린 친구라고. 불쌍한 네 '친구'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서 이러니까.
02 나는 매일매일 아파.
"말 걸지 마라…"
"뭐야, 얘 열 나는데?"
정한별이 내 이마를 짚어보더니 열이 난다며 깜짝 놀란다. 그 말에 천유림도 내 이마를 짚어본다. 돌아오는 말은 같았다. 미친, 진짜 열 나네. 빨리 보건실 가. 아픈 척 했더니 진짜 아픈 사람이 되어 버렸나 보네. 웃기지도 않아서 한숨만 내쉬었다. 어쩐지 아침에 잠깐 몸이 좀 춥다 싶더라니. 이 싱그러운 여름날 나는 누구 때문에 시름시름 앓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매 순간순간 다가오는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아프게 만드는 것만 같다. 이를 테면 박우진이라던지, 박우진이라던지, 아니면 박우진이라던지.
1교시부터 체육이었다. 시간표 진짜 개같아.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데, 하필이면 오늘은 남자 반이랑 체육을 같이 하는 날이라. 그리고 그 반이 하-필이면 박우진네 반이라.
웬만하면 그냥 수업하려고 했는데, 조금 지나니까 진짜 머리가 막 지끈거리면서 너무 아픈 거다. 그냥 체육 한 시간 빠지고 보건실에 누워 있어야겠다 싶어서 1교시 시작종이 치기 직전 선생님께 보건실에서 한 시간 쉬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운동장에서 학교로 올라가는 도중 마침 운동장으로 내려오던 박우진과 딱 마주쳤다.
"…뭔데, 니네 체육 아니가."
"어? 아…나 보건실 간다고."
"……."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날 보며 표정을 굳힌 박우진이 내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이 그새 더 많이 나는 건지 손을 대자 마자 인상을 찌푸리는 녀석이다. 그 정도인가. 그러더니 한숨을 내쉰다.
"좀, 아프지 말라고."
"……."
"……니까."
"…응?"
"아니다. 빨리 올라가라. 푹 쉬고."
아프지 말라는 말에 또 바보 같이 심장이 뛴다. 말을 끝마치고도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며 한숨만 내쉬는 박우진에게 종 치겠다고, 빨리 가라는 한 마디만 하고 먼저 그 옆을 지나쳐갔다. 더 마주하고 있다간, 내가 힘들어질 것 같아서.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전에는 너를 보고만 있어도 행복하던 내가, 어느덧 너를 보고 있는 게 힘겨워지고.
…머리 아프다. 그만 생각할래.
'……니까.'
그나저나 묻혀버린 말은 무엇이었을까. 나에게 뭘 말하려고 했던 걸까. 분명 알고 나면 또 별 거 아닌, 별 뜻 없는 말이겠지만 난 괜히 그게 또 맘에 걸려. 네 말 하나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게, 내 마음이었으니.
***
"야, 일어나."
"……?"
"1교시 끝났다."
"아…"
보건실 침대에 눕자 마자 그대로 잠에 든 건지,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쉬는 시간 종이 친 후였다.
그나저나 왜 날 깨우는 게 박우진인 건지. 나 깨우려고 일부러 온 건가. …뭐래, 지나가다가 그냥 내 생각이 나서 잠깐 들른 거겠지. 매사에 기대를 거는 내 꼴이 참 말이 아니다 싶었다. 박우진이라는 사람 하나로 단순한 내 사고회로가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져 가는 게.
내가 일어날 생각도 않고 가만히 자신을 쳐다만 보고 있으면 괜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내 팔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기는 박우진이다. 일어나자.
"약 먹었나."
"응, 먹었지…"
"몸이 아직도 뜨겁네. 니 그냥 조퇴해라 오늘."
"……."
"이래 있다가 쓰러질라."
나를 일으켜놓고 내 가방을 대신 든 박우진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먼저 잡아놓고도 자신의 행동에 놀란 건지 금세 놓아버리긴 했지만. 이상해, 이 분위기. 오히려 헤어지고 나서 더 날 잘 챙겨주는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인 건지. 우리 반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박우진의 말에 순순히 그 뒤를 따랐다. 한쪽 어깨엔 내 가방, 다른 어깨엔 자신의 가방을 멘 채로 내 앞에 걸어가는 녀석의 뒤통수가 듬직해 보였다.
그래서 고개를 숙였다. 또 아프다.
***
오기가 생긴 건지, 그냥 독해진 건지 용케도 야자까지 모두 마친 내 몸 상태는 만신창이였다. 오죽하면 수업하는 선생님들마다 날 보고 조퇴하라고 권유했을까.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고.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사실은 그냥 더 아파버려서 확 입원이라도 해 버리고 싶은 맘이었다. 그러면 박우진을 조금은 덜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야, 데려다 줄게. 가자!"
"됐어, 나 괜찮으니까 먼저 가."
"야, 니 진짜 제정신이가."
"…박우진?"
"내가 조퇴하라고 말했잖아."
얼마나 골골댔으면 우리 반 애들까지 알더라, 니 아픈 거. 내 앞에 선 박우진이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를 더 내리깔고 말하는데, 지금 몸 상태가 말도 아닌 처지라 쟤가 뭐라는 건지 잘 들리지도 않고. 반쯤 감기는 눈꺼풀에 힘을 잔뜩 주고 녀석을 올려다봤다.
"고3이 조퇴 많이 해서 좋을 거 없잖아."
"…그게 니 아픈 거보다 중요하냐고. 지금 니가 조금 아픈 게 아니다이가."
"왜 나 걱정하는데?"
"…뭐?"
그때 나도 모르게 계속 혼자만 생각하던 속내가 입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박우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 내게 되물었다. 왜 걱정을 하냐니. 말한 나도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고, 잠시 우리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박우진과 친구한 이래로, 이렇게 어색했던 순간이 또 있었을까. 얼음장 같은 이 분위기를 깨려 잘못 말했다고, 뭐라고 한 마디 하려던 그 순간.
"…걱정되니까."
"……."
"아까도 말했지만."
"……."
"……니 아픈 거 보고 있는 거 힘들다."
박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된다고. 내가.
네가 한 말들에 나는 또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아픈 거 보는 게 힘들다, 그 말이 내게 어떤 뜻으로 다가올지 넌 모르겠지.
이내 버스가 도착했다. 머뭇거리던 내가 먼저 녀석을 지나쳐 버스에 올라탔다. 아픈 거고 뭐고, 지금은 박우진과 마주하고 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급선무였다. 어색한 건 어색한 거고, 괜시리 붉어지는 얼굴을 숨기고 싶어서. 녀석은 알 리 없을 내 마음을 들킨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자꾸 들어서. 그런 내 신호를 느낀 건지 뒤이어 버스를 탄 박우진은 내 옆이 아닌 뒷자리에 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해 놓고 또 기대하게 만드는 네가 싫다, 나는.
***
버스에서 내리자 또 다시 어지러운 머리에 바닥에 주저앉을 뻔한 걸 박우진이 뒤에서 잡아줬다. 대충 고맙다고 말한 뒤 다시 앞장서서 걸어가려고 잡힌 팔을 놓자 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고, 결국엔 넘어지고 말았다. 몸이 말을 안 듣네. 바보 같이 중얼거리며 웃고 있는데 박우진이 한숨을 내쉬고는 제 가방을 앞으로 메더니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등을 내밀었다. ……뭔데.
"업혀."
"…뭐래, 됐어."
"잘 걷지도 못하는 게 어떻게 집까지 걸어가려고 하는데."
"아, 걸어갈 수 있ㄷ…"
"화내기 전에 업혀라."
점점 낮아지는 목소리에 살짝 위압감을 느낀 내가 마지못해 녀석의 등에 몸을 맡겼다. …가볍지 않을 텐데 의외로 가뿐하게 날 들어올린 박우진이 우리 집과 자신의 집이 나란히 있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치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걷는 동안 박우진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끔 가다 한숨을 쉬는 것 외에는. 난 이쯤 되니 정말 아프다 못해 정신까지 왔다갔다 거려서 뭐라고 말을 하긴 하는 것 같은데 뭐라는 건지는 나 자신도 알 수가 없다. 근근이 녀석이 대답을 해줬던 것 같기도 한데. 거기까진 기억이 나질 않으니.
"넌 그냥 내 걱정을 하지 마… 짜증나니까."
"왜 짜증나는데."
"몰라……? 자꾸 사람 헷갈리게 하잖어…"
"……."
"아, 왜 이러냐 진짜… 나도 참 웃긴다……"
그 다음부터는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아마 잠에 들었나 보다.
***
그 애가 날 보는 시선
01 OO이 놓친 말
"좀, 아프지 말라고."
"……."
"걱정되니까."
"…걱정되니까."
"……."
"아까도 말했지만."
02 OO이 놓친 맘
"야, 다 왔다."
"……."
"…뭔데, 자나."
OO의 헛소리가 멎어들 때즈음 우진은 OO의 집 앞에 도착했다. 업힌 OO에게 다 왔다고 말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새 잠이 들었나. 혼자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던 우진이 OO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OO의 엄마가 나왔다. 어, 우진아! 네가 왜 OO이를 업고 와? 얘 어디 아파? 그 말을 듣자 마자 우진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너 뭐냐 진짜, 너네 엄마도 너 아픈 거 모르시네. 왜 이렇게 미련해.
잠든 OO을 침대에 눕히려 OO의 방에 들어온 우진의 시선을 문득 사로잡은 사진이 하나 있었다. OO의 책상 한구석에 놓인 액자. 중학교 졸업 때 자신과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낯익으면서도 이제는 어쩐지 낯설어진 교복을 입은 OO과 자신이 담긴 그 사진을 우진은 한참동안 쳐다봤다. 우진은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었고, OO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지가 먼저 내 좋다 해 놓고."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고 진짜 그런 줄 아나, 니는."
OO을 침대에 눕힌 우진은 눈을 감고 있는 OO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이내 옆에 놓여있던 자신의 가방을 메고 방을 나선다.
더보기 |
힉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기분이 좋아진 저능 삘탄 대로 하루종일 글만 썼더니 세상에 하루만에 2화를 다 써버리기...! (아무말) 처음 올리는 글인데도 좋게 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ʃƪ) 그나저나 마지막 우진이 시점은 무얼 뜻하는 걸까요...? 우진이도 여주를 좋아하는 거니...? 뭐야뭐야 이거 뭐야 ㅠ0ㅠ...! 하나 알려드릴 수 있는 건 우진이는 표현고자 여주보다 한수 위인, 그냥 표현을 아예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 그럼 3화에서 봐용 여러분들 안녕안녕 빠빠이 ❀.(*´◡`*)❀. ♥암호닉♥
[0226] [수 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