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정호석] 난희 下 (完)
W.교수
그래.나는 아버지를 증오하게 됐어요.5년 전에 어머니가 폐병으로 돌아가시게 되면서부터 아버지는 변했어요.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겁니다.조국에 몸을 바치겠다고 한 건 다 어머니를 위한 입에 발린 거짓말 뿐이었고, 실은 돈과 재산이 가장 우선인 이기적인 사람이었던 거예요.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다음 해에, 아버지는 일본인에게 성을 팔고 나와 내 누나의 일본 이름을 지어왔어요.앞으로를 정호석 대신 타카히로로 살아가야 한다고.그러지 않는다면 더 이상 자신은 나의 아버지가 될 수 없을 거라더군요.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들고, 악을 썼습니다.그리고 아버지도 처음으로 내게 손찌검을 했어요.우리는 똑같이 마주보고 울었지만, 아마 그 눈물의 이유는 달랐을 겁니다.
"나는 나를 그렇게 거두고, 만들고, 키워낸 사람에게 버림 받은 것에 지독한 배신감을 느꼈어요."
"…나였어도 그랬을 거예요.그랬을 수 밖에 없었을 거예요."
난희는 호석의 어깨를 감싸안았다.넓고 든든해보였던 그가 그녀의 품에 가득 안겼다.
호석은 소리 없이 울음을 삼켜내며 난희의 어깨를 적셨다.난희의 작은 손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난희는 진심으로 호석을 동정했다.
"…난희씨."
"네, 호석씨.듣고 있어요."
그녀의 몸을 타고 호석의 목소리가 웅웅 울려퍼졌다.애매하게 난희의 어깨죽지에 얹어져 있던 그의 손이 등허리를 꽉 껴안았다.
난희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가 무슨 부탁을 해올지 알고 있었다.그리고 기꺼이.그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나를 겁쟁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
"호석씨같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아요.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일 뿐이고."
"……."
"당신은 나를 처음으로 설레게 했고, 처음으로 내 진심을 내어주고 싶어진 사람이야.그러니까 나는 호석씨를 위해서 기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게요."
나를 믿어주세요.처음 만났을 때처럼 난희는 호석의 소매를 걷어 얇은 그 손목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호석이 결심을 한 듯, 난희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나직히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를,"
"……."
"죽여주세요.난희씨."
그 부탁에 난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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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즈카의 둘째 도련님 알아?"
"이시즈카?"
달칵.소음기에 닫힌 총성이 안으로 먹혀 들어갔다.다음 사격을 위해 총알을 장전하던 난희의 시선이 과녁에서 멀어져 아까부터 제 관심을 돌리려는 정국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썹 사이가 일그러졌다.또 어디서 이상한 얘기를 주워들어 와가지고.정국은 난희의 매서운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작게 웃었다.
"암살 의뢰 했대.준 형한테."
"……상대는?"
"당연히 아버지겠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정국이었다.더 얘기해봐.한쪽 눈을 찡그려 가늠쇠에 초점을 맞추어내며 그녀가 물었다.
"글쎄.내가 들은 건 그게 단데."
"…진짜로?나 걸 수 있냐?"
"궁금하면 형한테 가서 물어보던지."
정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아쇠가 당겨졌다.타앙.눈 깜짝할 새에 과녁 정중앙에 여섯번째 구멍이 뚫렸다.
난희가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정국을 다시 돌아봤다.총구가 바닥을 향하며 그녀의 긴 치맛자락에 감겼다.
그 아래로 발목에 검은 나비가 아른거렸다.정국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에 가서 꽂혔다.
"너 내가 그 집안에 관심 많은 거 알지."
"…지금 반응만 봐도 알겠다."
"아는 거 싹 다 말해.나랑 계속 좋은 누나동생 하고 싶으면."
웃음기가 남아있던 정국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난희의 눈빛, 말투, 행동 그 모든 것에 예민한 그였다.
그녀를 알아온게, 사랑해온 게 가히 짧은 시간이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증거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단순히, 난희가 이시즈카에 갖는 관심이 고작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해.동족을 향해 총구가 겨눠지고, 탄피가 난무하는 전쟁판에서 도망쳐나온게 고작 일곱살 때였다.
한순간에 전쟁 고아가 되어버린 그녀를 다행히도 가여이 여겨 거둬준 군인 덕에 그녀는 삶을 연명할 수 있었다.
병사들이 머무르던 임시 기지에는 난희와 같은 아이들이 많았다.그 중 하나가 정국이었고, 낯선 사람들 통에 겉돌던 그를 친동생처럼 챙긴 것이 그녀였다.
둘의 사이가 친남매처럼 가까워지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열다섯이 되었던 해의 중간, 그 어느 쯤의 새벽.끊임없이 이어지던 전쟁이 잠시 그친 그때가 기회였다.난희와 정국은 달을 삼킨 강을 건넜다.
일제의 독재가 판을 치는 제 고향으로 향하면서도 그들은 행복에 겨워 자꾸 웃었다.허리 아래가 전부 강물로 푹 젖어 무거워진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국경을 넘어서 대한제국의 땅을 밟고, 그간 군인들의 일을 도와 조금씩 모아두었던 돈을 합쳐 경성 변두리의 마을에 터를 마련했다.
다행히 상해의 전쟁터에서 건너온 어린 두 남매를 수상히 여기는 어른이 없어 그들은 새로운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그들이 남준을 만났을 땐 난희가 열일곱이었다.근처 보통고등학교의 가쿠란 제복 차림을 한 남준이 그녀와 정국의 집에 먼저 찾아온 것이 그들의 첫만남이었다.
너희 소식 많이 들었어.듣기로는 군인들 손에 컸다지?초면에 이런 부탁해서 정말 미안한데, 난 지금 총을 쏠 줄 아는 사람을 찾고 있거든.
난희가 예의상 내온 보리차를 사이에 두고 건너온 낯선 이의 말은 익숙한 것들이었다.그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남준은 매일 같이 둘의 집에 들러 설득하기에 열을 올렸다.그는 체계적인 문무력 독립 집단을 만들고 싶어했고, 그 과정엔 난희와 정국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남준이 찾아온지 꼭 열흘만에 두 사람은 남준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했다.열 번의 새벽 동안 수도 없이 오고 간 의견 끝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남준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난희와 정국은 그와 함께 바다를 건너 대만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남준의 또 다른 동료였던 윤기를 만났고, 넷은 비밀독립단체 팻말을 걸고 일본인 및 친일 암살의뢰를 받으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의뢰를 받고 계획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남준과 윤기의 일이었으며, 실전에 투입되어 여러 가짜 신분 역할을 해내어가며 암살을 하는 것이 정국과 난희의 일이었다.
난희가 무용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도 개중의 하나였다.손쉽게 그녀에게 마음을 내주었던 일제의 모 영화사 사장이 무명의 무용가였던 난희를 위해 성대하고도 사치스러운 무대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 그것이었다.
난희가 유명해진 건 그녀와 동료들에게 양날의 검이 되었다.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나비처럼 움직이는 것을 더 좋아하던 난희에게는 기회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본인과 본인의 사람들의 정체를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그 공연을 마치고 임무대로 표적을 성공적으로 암살했다.그리고 당연히 원래의 제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허나 꿈을 꾸는 것을 멈추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던 탓에 처음으로 마음에 병을 얻었다.차마 무대 위에서 느꼈던 그 자유를 잊지 못했던 것이 연유였다.
그 재능을 안타깝게 여긴 건 난희 본인 뿐만이 아니었다.남준은 난희가 저들 때문에 숨어 지내야 하는 것을 마땅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저의 꿈을 위해 그녀는 이 일에 헌신하고 있었다.그것은 정국도, 윤기도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꿈을 밟아 뭉갤 자격은 없거든.그들이 택한 건 독배를 기꺼이 달게 마시는 것이었다.
독배를 마시는 순간 더 이상 예전같은 일은 반복될 수 없다.예전의 평범한 삶은 소멸된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욱이 진행되어야 할 일이었다.난희는 남준과 윤기의 도움으로 한 달 만에 다시 무대를 설 수 있게 되었다.
동경에서 가장 크게 열리는 선수권 대회였다.그녀는 보란듯이 다시 찾아온 기회를 낚아챘다.전과 달리 가짜 신분으로가 아닌 진짜 무용가가 되어 춤을 추었다.
다시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다.그 일은 난희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으니까.
"근데 누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기 일주일 전이었다.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싶었지만, 남준은 다들 기다렸을 거라며 귀환식 준비에 한창이었다.
일본을 돌며 공연을 마치고 오랜만에 돌아온 집에서 그녀는 근처를 산책하거나, 혹은 거실에서 남준이 읽던 신문을 읽거나, 윤기가 시키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했다.
그러다가 그것들 마저 모두 싫증이 나면 지금처럼 지하실로 내려와 사격 연습을 했다.
총을 놓은지 오래 되었지만, 총구의 서늘함은 언제든지 저를 찾아주기를 기다려왔던 것처럼 그녀의 손에 익숙하게 감겨들었다.
"내가 거절했어."
"뭐?"
"남준 형도 동의했어.지금 경성이 이시즈카 앞마당이라서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목에 줄 그어지는 거 한 순간이거든."
난희도 여느 다른 사람들처럼, 이시즈카의 악명은 귀에 박히게 들어 알고 있었다.신문에서든 주변에서든 가장 자주 들리는 게 그 집안의 이야기였다.
재산을 총독부에 팔아넘긴 수장 오다와, 베일에 둘러싸여 정체가 불명한 그 둘째 아들 타카히로.
그리고 그녀는 이상하게 그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아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남준에게 제 아버지를 의뢰했다는 것은 분명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의 이야기가 더 있으리라.
"국아."
"왜."
"지금 남준이 어딨어?"
난희가 총을 다시 원래 걸려있던 벽에 걸어두며 물었다.의자 등받이에 턱을 괴고 앉아있던 정국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 형이 갈 데가 서재 아님 옆 전당포 밖에 더 있어?정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난희는 성큼성큼 윗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그녀의 단호한 뒷모습에서 좋지 않은 기운을 감지한 정국이 뒤늦게 난희의 이름을 불렀을 때는 이미 문이 닫히고 난 후였다.
"아…진짜 누가 말려."
난희는 꼭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서 정의감이 불타오르곤 했다.정국은 걱정 어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들어올 때 기척 좀 내라니까.애 떨어지겠다.툴툴거리는 남준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순식간에 책상 앞으로 걸어와서 남준의 공책 위에 손을 턱 하니 얹는 그녀였다.
알겠지?저번에 나고야에서 찍은 사진도 대문짝만하게 좀 넣고.부탁한다 남준아.난희는 그가 대답할 새도 없이 등장할 때처럼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다시 혼자 서재에 남은 남준은 뒷목을 긁적대다가 그냥 그녀의 변덕에 익숙해지기로 결론을 내렸다.
긴 식탁 가운데에 유카타를 입은 오다가 앉았고, 그 왼쪽과 오른쪽에 호석과 난희가 자리했다.
하인들은 바삐 그들의 사이를 오가며 식사 준비를 하였다.단정하지만 고고한 멋을 품은 탁한 황갈색의 저고리를 여미며 난희는 수줍게 웃었다.
그러한 탓에 오다는 난희가 부모가 별 볼 일 없는 전당포 주인이며 춤실력과 수려한 외관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호의적일 수 밖에 없었다.게다가 조신하고 예의 바른 태도가 난희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특히나 오다같은 중년의 남성들이 무얼 좋아하는지, 어떤 부분에서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진 오다는 호석에게 난희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타카히로, 이런 아가씨와의 혼인이라면 나는 당연히 허락한단다.분명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네게 도움이 될만한 여인이다.
주변에서 부리나케 달려온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오다는 제 방으로 올라갔다.
난희는 문 앞에 서서 달빛으로 가득 찬 방 안의 호석을 주시하고 있었다.빚어낸 듯한 옆얼굴이 천천히 돌아서 그녀와 정면으로 눈을 맞추었다.
그제야 가만히 그를 보고 듣고만 있던 난희는 발을 움직여 호석의 앞에 멈추어 섰다.
"……."
나같은 겁쟁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신같은 사람들을 믿는 것 뿐이었는데, 거절 당하고 나니 삶의 목적을 잃은 것 같았고, 그 탓에 나는 나의 존재에 대해서까지 불신하며 지냈습니다.그러다가 신문에서 기적처럼 난희씨를 봤고, 난희씨의 발목에 있는 나비 문신을 봤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저 미의 목적으로 새긴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나는 알아볼 수 있었어요.내가 직접 의뢰를 넣었던 독립 단체의 상징이었으니까요.
호석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눈물이 고인 눈을 감추지 못하며 그는 쓰게 웃었다.
평소보다 일찍 장사를 접은 인력거꾼 김씨, 장씨는 허겁지겁 반쯤 열린 덧문 밑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미리 와 둘러 앉아있던 기생과 아낙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가 다시 흩어졌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 이야기에 대해 수근덕 댔고, 이시즈카 저택 앞은 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범인에 대한 추측과 소문은 수만가지로 난무했지만, 역시나 정확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씨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옮겨갔다.그러네.비가 오기 전에 그럼 우리 이만 일어나세.방 안의 담뱃불이 모두 꺼지고 사람들이 차례대로 가게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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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부턴 저한테 이런거 시키면 안 된다는 것을 아셨을 거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