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공동체 2ND PROJECT
청아(淸雅)
: 속된 티가 없고 맑고 아름답다.
W. 겨울
***
세자가 태어나던 날, 조선에는 엄청난 °풍운(風雲): 바람과 구름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용이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는 것, 세상이 크게 변하려는 기운°이 모여들었다. 백성들은 가히 9년만에 찾아온 먹구름과 장마기에 모두들 길목으로 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유례없이 길게 이어진 가뭄에 농작물은 물론 여린 백성들의 숨까지 경각에 달려 있었다. 그렇기에 당장 하늘을 드리운 저 검은 구름은 실로 중한 것이었다. 어느새 길목은 빗줄기를 향한 백성들의 간절한 염려로 채워졌고, 제 어미아비의 손에 무작정 끌려나와 바닥에 코를 묻은 어린아이들조차 부모를 따라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할 무렵. 궁 내에서 °청담종(淸談鐘): 궁궐의 좋은 소식을 알리는 종°이 울려퍼졌다. 청담종의 소리는 거짓을 조금 보태어, 외나라에서도 종의 잔진동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종의 크기는 궁궐 내 터 하나를 다 차지할 정도로 거대했고, 종 하나를 치기 위해서는 자그마치 병사 백이 필요했다. 급작스러운 청담종 소리에 놀란 백성들이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땅 위로 전해지는 울림만을 곧이 곧대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종소리는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쿵, 쿵, 쿵! 자그마치 세 번이었다. 청담종이 세 번 울리는 경우는 왕의 핏줄이 태어났을 때만이었다. 드디어 몸이 약한 왕비가 그 귀하신 몸으로 귀하신 몸을 낳은 것이었다. 그 순간, 하늘이 찢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비가 쏟아졌다. 어찌나 거센 빗줄기가 한 번에 쏟아지는지, 우레와 같던 종소리가 잦아든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백성들은 그토록 바라던 비소식에 저마다의 환호를 내지르며, 궁궐의 방향으로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일제히 절을 하며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뻗는데, 그 속에 한 여자아이만이 가만히 바닥에 귀를 가져댔다. 빗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종의 잔진동이 뒤섞여, 실로 간지럽고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는 제 희멀건 볼에 닿는 그 느낌이 연신 신기한지, 옥처럼 빛나는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누군가의 탄생을 대지와 천지 그리고 이리도 수많은 백성들까지, 축하해주다니. 부럽습니다.
궁에 태어난 아기씨가 세자라는 것은 더욱이 축하 받을 일이었다. 왕과 왕비는 자식이 없는 것만 제외하면, 어질고 유정한 사람들이었기에 백성들의 마음에 가득 차고도 넘치는 위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난 9년간 이어진 가뭄이 저들의 부족한 덕 때문이라며, 매일 같이 궁궐 내 연못에서 깊은 한숨 섞인 기도를 하고는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도 덕인지 아니면 세자 덕인지. 그도 아니라면 그저 때가 되어 내린 비 때문인지. 어찌 됐든 골치를 앓았던 가뭄이 해소 되었다. 덕분에 조금씩 모나기 시작했던 민심은 다시금 평안을 되찾았고, 국정은 온화해졌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탄할 수는 없는 법. 세자가 두 살 생일을 막 지나기 전에 왕비가 목숨을 잃었다. 원체 몸이 약해 아기씨를 출산한 이후로 어째 잔병이 늘어난다 싶었는데, 결국 숨을 거뒀다. 왕비의 죽음에 왕은 공석이 되어버린 왕비의 자리를 채울 생각은 커녕, 식음을 전폐하고 서재에서 나오는 법이 없었다.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알 리 없는 세자는 그런 제 아비 곁에서 제 어미와 똑닮은 웃음을 방긋방긋 지어보이며, 왕을 하루하루 살아가게 만들었다. 그러니 왕에게 그 세자가 얼마나 귀했겠는가. 왕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국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 모든 마음을 하나 뿐인 세자, 윤기에게 주었다.
*
새로운 왕비가 임명 되는 날이었다. 국정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에 있는 자의 손녀였다. 그 자는 제 욕심만을 위한 악행을 서슴치 않는 인간이었지만, 오랜 시간 궁에 몸을 담고 있었기에 내칠 수 없었다. 그를 내친다면 당장의 조정이 흔들리다 못해 사라질 것이었다. 그 자는 임금 다음으로 많은 것을 쥐었다고 알려질 만큼, 가진 것이 많았고 애석하게도 머리가 좋았다. 그러니 공석인 그 높디 높은 왕비의 자리를 그냥 두었겠는가. 제 어여쁜 손녀를 그 자리에 앉혔다. 아주 손 쉽게. 제가 가진 것으로 조정을 손에 쥔 흙이라도 되는 냥 주물렀고, 좋은 머리로 누구에게 아첨해야 할 지를 잘 계산했다. 그래서 아주 순조롭게 그리고 허무하게, 새 왕비가 책정되었다.
새로운 왕비는 세자를 증오했다. 왕으로부터 받아야 할 사랑과 마음이 온통, 세자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폐위한 왕비와 똑닮은 그 얼굴은 어찌나 보는 사람 마음을 이상하게 만드는지. 괜한 열등감이 피어올랐다. 그래서 그 작고 약한 몸이 잠든 사이, 괜히 보이지 않는 곳을 꼬집어댔다. 하지만 세자는 잠결에도 우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제 몸을 꼬집은 왕비를 멀뚱히 보면서도 울지 않았다. 그에 한기를 느낀 왕비는 세자를 의원에게 맡겼고, 의원은 세자의 몸 이곳저곳을 어루만지다가 말했다.
"°무통(無痛)증: 고통과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십니다."
나라를 이끌어갈 유일한 핏줄이, 무통이라. 백성들의 아픔을 제 것처럼 살피고, 국정의 온갖 흔들림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할 세자가. 그러한 세자가, 무통이었다. 감각도, 감정도 없는.
*
의원이 드나든 후로, 궁 내에는 빠른 소문이 퍼졌다. 소문의 주인공은 당연히 세자. 그리고 그 내용은, 왕세자가 소리를 듣지 못하신대! 소문이 어찌 그리 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소문은 어느덧 궁궐을 넘어 저잣거리까지 퍼져나갔다. 백성들은 세자의 소식에 탄식하다가도, 몸이 약했던 왕비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님께서 몸이 약하셨잖아. 그래서 왕세자께서도, 그러신 모양이다.
그렇게 세자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화 된 채로, 십육 년이 흘렀다. 궁에서도 그것을 바로 잡지 않았다. 세자가 무통증을 앓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는 것보다, 차라리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알려지는 것이 나았다. 임금은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잘 웃고, 남몰래 잘 울고. 감정이 건강한 그런 인간이었다. 그런데 제 사랑하는 아들은 울지도 웃지도 않는다니. 그것만큼 큰 병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세자의 나이는 열여덟이었고, 세자는 누구보다 제 자신을 잘 알았다. 그리고 그만큼 누구보다 제 자신을, 싫어했다. 아니, 솔직히 '싫다.'는 감정이 맞는 지도 몰랐다. 그저 거울 속에 자신을 보면 두 눈이 아릴정도로 질끈 감았고, 입술 한 번 깨물지 않은 채로 바늘로 제 발등을 쿡쿡 찔러댔다. 발등 위로 붉은 피가 조금씩 맺혔지만, 거짓말처럼.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세자는 제 몸 곳곳에 남겨진 무수한 흉터를 보며, 생각했다. 자신은 어떤 일에도 마음과 몸이 동하지 않는, 그런 괴물 같은 인간이라고. 그러니 차라리 그런 괴물 같은 인간 말고,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인간으로 남겠다고. 그래서 정말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궁 내에서도, 사찰을 위한 행차에서도. 저를 보는 이들은 하나 같이 땅을 향해 고개를 떨구고 있었지만, 입만큼은 멈추지 않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벙어리 세자. 벙어리 세자. 벙어리 세자. 고작 열여덟인 세자였지만, 세자는 그런 소리가 괜찮았다. 제가 괴물 같은 인간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니까.
그렇게 특별할 것 없이 행차를 하던 어느 날에는 고개를 빼꼼 들어올린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여인은 세자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서둘러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대뜸 친구에게 인사하는 것처럼, 작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보였다. 그 행동에 당황한 것은 비단 세자 뿐만이 아니었다. 그 행동을 한 여인도 조금 전 제가 무슨 행동을 한 건지를 뒤늦게 깨닫고는, 볼을 붉히며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세자는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저를 향해 흔들던 그 작은 손이 꽤 야무져 보였는데, 손 군데군데가 거뭇한 걸 보아서는 굳은 살 같은 것도 박혀 있는 것 같았고. 어디 대장간 같은 곳에서 일하는 여인인가 싶었다. 그래서 궁금했고. 사실, 그리 현혹될 만한 미모는 아니었다. 곱씹어보면 눈도 그리 크지 않았던 것 같고, 코도 오똑하지 않았고, 그리 몸선이 곱지도 않았는데. 왜 자꾸 잠을 못 이루게 하는 건지. 세자는 아마도 제게 대뜸 인사를 건넨, 그 여인이 그저 기이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라고 알려진 제게 그리 환하게 손을 뻗어 인사해준 자는, 처음이라. 아마도, 그래서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이상하다, 느낄 수는 없어도. 생각은 할 수 있으니. 그래서, 그래서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
세자의 열아홉 번째 생일이었다. 궁 내에서는 성대한 세자의 생일 잔치가 있을 예정이었다. 세자의 생일 잔치에는 왕비 세력이 초대한 궁궐 밖, 기생단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기생단 내에는 얼굴을 가린 채로, 가야금을 연주하는 여인이 가장 명성을 떨쳤다. 다른 기생들이 웃음을 판다면, 그 여인만큼은 제 솜씨를 판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그 솜씨가 매우 빼어났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세자에게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왕비 세력이 기생단을 초대한 의중은 되려 세자를 난처하고 곤란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높은 자들이 전부 모이는 그 곳에서, 다들 소리에 흠뻑 취해 웃어 보일 때. 세자만이 덩그러니, 그 속에서 제 스스로 버려졌다는 기분을 느끼게끔 만들기 위해서.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세자는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있게 됐을 무렵부터, 스스로를 버려진 사람이라 생각했다는 것을. 그래서 제 터 안에서 벗어나지 않고, 벗 하나, 스승 하나를 섬기지 않았다는 것을. 매일 같이 제 죽은 어미와 늙은 아비가 기도했던 그 연못에서, 새왕비가 제 몸을 꼬집어 생긴 상처들을 살피며. 울고 싶은데 울지 못하여, 그저 연못 깊이 들어갔다 나온다는 것을. 아닌 것을 아니라 말 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채로, 비릿한 물에 제 온 몸을 맡기고 가끔은 아주 오래 숨을 참으며 생각한다는 것을. 이대로 죽을 수는 없을까. 하고.
*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궁 내를 가득 채웠다. 세자는 왕과 왕비 옆에 놓아진 한껏 치장된 의자에 앉아,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왕은 무엇이 그리 놀랍고 신기한지, 사내 하나가 공중에서 빙그르르 돌 때면 환하게 웃고 박수를 쳤다. 또 구슬픈 해금 소리에 집중하며 눈을 떼지 못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에 관심없는 것은 세자 뿐이었다. 세자는 그들의 연주가 좋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몇몇 기생들이 연주하는 가야금은 °현: 가야금의 줄°과 지나치게 긴 손톱이 긁히는 소리로 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척 해야 했다. 감정이 크게 동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여전히 표정을 굳힌 채, 그저 가만히 시간을 흘려 보냈다.
"... 청아입니다."
그때였다. 악기를 연주하던 사람들이 물러나고, 작은 여인 하나가 혼자서 무대 가운데 섰다. 사람들의 말대로 얼굴을 천으로 가린 여인이었다. 여인은 눈만 내민 채로, 절을 하고 일어서서 말했다. 청아입니다. 청아, 청아. 여인의 이름인 듯 싶었다. 여인은 다른 기생 무리 속 여인들처럼 얄쌍하지도 않았고, 유일하게 보이는 눈이 그다지 예쁘지도 않았다. 다만 검은 눈동자가 참 깨끗해보일 뿐이었다. 세자는 이번 역시 다른 기생들처럼 현과 손톱이 긁히는 소리가 날 것을 예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제 손톱 밑 여린 살들만 잡아 뜯었다. 어느새 피가 흥건했지만, 아무도 몰랐다. 세자도. 세자는 제 손에 피가 묻는 것도 모른 채,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손만 만지작댔다. 그리고 여인이 연주를 시작하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을 뻔 했다. 손장난을 멈춘 세자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여인의 연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 덕분에 여인의 외형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여인의 손은 다른 기생들처럼 곱고 길지 않았다. 손톱 역시 짧았다. 그리고 물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현을 연주하는 여인의 손 곳곳에는 굳은살이 묵직하게 박혀있었다. 세자는 순간 생각했다. 그날 본, 제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인 여인을. 그리고 그 여인과 똑닮은 눈과 손을 가진, 제 앞의 청아라는 여인을. 세자는 연못 속에 들어가 숨을 참기라도 하는 것처럼,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저를 잠 못 이루게 했던, 그 어느 날의 여인이었다.
연주가 마친 청아는 서둘러 무대를 내려갔다. 다른 기생들처럼 아름답지 못한 제 모습이 늘 부끄러웠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궁궐에서, 그것도 세자 앞에서 보여야 한다니. 여간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청아는 잔치 중인 궁궐을 등지고, 뒷편의 정원 같은 곳으로 향했다. 커다란 연못 위로 비춰진 달이 고왔다. 청아는 연못 근처 바위에 앉아, 연못 위로 제 손을 뻗어 보았다가 제 얼굴을 비춰보기를 반복했다. 뭉퉁한 손도 퉁퉁한 얼굴도, 무엇 하나 예쁘지 않았다. 청아의 깊은 한숨에 잠 들어있던 잉어 몇 마리가 멀리 달아났다. 그리고 청아의 옆에, 사내 하나가 앉았다. 달빛 아래 사내는, 세자였다. 달빛 아래 세자는, 윤기였다.
윤기는 청아가 무대를 내려가는 순간부터, 시선으로 여인을 따랐다. 하지만 여인은 금세 모습을 감췄고, 윤기는 여인을 따라 자리를 벗어났다. 이미 제게서 벗어난 관심이었다. 사람들은 화려한 군무와 소리에 젖어있었다. 그렇게 여인을 찾아 돌아다니던 윤기는 연못 앞, 바위에 앉아 있는 청아를 발견했다. 청아는 달을 보다가 연못에 비춰진 제 모습을 보다가, 얼굴에 비해 작다 싶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윤기는 저를 눈치채지 못한 청아를 향해, 그날의 여인처럼 손을 흔들어보였다. 물론, 청아가 보지 못할 걸 알면서. 그날은 여인의 인사를 나 혼자 받았으니, 오늘은 내가 여인에게 인사를 주어야 했다. 그래야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인사를 마친 윤기가 청아의 옆에 앉았다. 청아는 제 옆에 앉은 이가 세자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서둘러 바위애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청아의 작은 손을 잡아챈 윤기 덕분에,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윤기는 제 손에 잡힌 손이 너무나도 작아, 답지않게 놀랐다. 하지만 그 의미를 이상하게 받아들인 청아는 제 손의 굳은살이 부끄러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에 제 얼굴을 묻었다.
"... 신기하시지요?"
"..."
"소리를 듣지 못하신다는 거, 저도 압니다."
"..."
"그래도, 그... 아까 제가 가야금을 연주했는데. 그 소리가 제법입니다!"
"..."
"그것을 연습하다 보니, 손이 이리 못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정말로!"
"..."
"제 연주를 들으셨다면, 이 손이 지금처럼 막, 그리 못나 보이지 않으실 텐데."
"..."
"... 참입니다. 거짓 아닌데."
청아는 이곳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저를 빤히 쳐다보는 세자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소리를 듣지 못해서, 내 손이 그리 못나 보이는 것일 거라며. 윤기는 작은 손을 휘휘 저어가며 변명을 늘어 놓는 여인이 신기해서, 여인을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여인의 얼굴은 위에서와는 다르게 천을 치운 덕분에 완전히 보였다. 그 얼굴은 백 일을 갓 지난 아이처럼 포동포동 했다. 몸에 살이 원체 없는 편인 윤기는 그런 여인이 신기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제게 말을 늘어놓는 여인도 신기했고.
"... 제가 이상하다 생각하고 계시지요?"
'아니다.'
"세자저하께서는 이리 좋은 곳에 사시니, 행복하시겠습니다."
'행복하지 않다. 그리 답하고 싶구나.'
"저하가 태어나시던 날, 온 백성이 기뻐했습니다."
'... 그저 후계자가 나타나서일 것이다.'
"저하가 태어나시던 날, 아주아주 오래 이어지던 가뭄이 장마로 해소 되었습니다."
'기록으로 보았다.'
"실은 제가 세자저하보다 나이가, 아주... 아주 조금! 더 있습니다."
'거짓일 것이다. 이리 아이 같이 생겨서는.'
"그날 제가 바닥에 귀를 대고, 궁에서부터 느껴지는 진동과 빗줄기가 떨어지는 소리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너무, 되게. 이상할 만큼, 마음을 간지럽혔습니다. 둥, 둥. 이런 소리와 툭, 툭, 타닥. 막 이러한 소리가 뒤엉켰는데."
'...'
"그게 너무 좋은 겁니다. 그래서 그날 그 소리, 그 느낌이 좋아서, 악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 그랬구나. 어쩐지 소리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마, 세자를 본 그날 인사를 했나 봅니다."
'너도 기억하는 구나. 그날을.'
"덕분에 연주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어서, 감사해서. 그랬습니다."
윤기는 청아의 입에서 나온, '덕분'이라는 단어에 흠칫 몸을 떨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늘 저를 따라다니던 말은 '때문에.'였는데. 너 때문에. 너까짓게 세자이기 때문에. 소리도 듣지 못하는 너 때문에. 이런 것들이었는데. 내 덕분이라니. 코끝이 시큰거렸다.
"늘 감사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었습니다."
"..."
"제 소리를 꼭 들려드리고 싶었는데, 소리를 듣지 못하신다고 하셔서."
"..."
"마음이 아립니다."
"..."
"그래도! 이 세상에는 소리보다 크고 좋고 예쁜 것들이 많습니다!"
대뜸 바위 위로 올라서서, 손을 크게 벌리고는 외치는 청아였다. 그래도! 이 세상에는 소리보다 크고 좋고 예쁜 것들이 많습니다! 윤기는 그런 청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살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찾아온 정적이었다. 청아는 처음 듣는 윤기의 소리에 바위 위에서 중심을 잃었고, 윤기는 제가 웃었다는 것에 놀라 청아를 바라보았다. 청아의 몸이 바위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연못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윤기는 그런 청아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저편에서는 사람들의 웃음 소리와 악기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데, 청아와 윤기가 있는 이곳에서는. 풍덩. 그리고 몇 초 뒤에 또 한 번, 풍덩. 하는 소리만 울려퍼졌다. 결국은 둘 다 빠져버렸다.
물에 빠져 허둥대는 청아의 허리를 잡아 끈 윤기가 청아의 손을 제 목에 둘렀다. 연못의 깊이는 윤기만 발이 닿을 정도였다. 청아는 발이 닿지 않는 것이 무서워, 큰 눈을 글썽이며 윤기의 목을 힘주어 감쌌다. 윤기가 세자라는 것을 잊기라도 한 듯. 윤기는 누군가 제게 이리 의지한 것이 처음이라 또 한 번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것들이 마음을 쿡쿡 찔러왔다. 누군가 아주 부드러운 털로 저를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달빛 아래 연못에 빠진 두 사람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 놓으시면 안 됩니다!"
"놓지 않는다."
"참이시ㅈ, 네?"
"놓지 않을 것이다."
"... 말씀, 말씀을 하시, 아니. 그... 제 말이 들리십니까?"
"들린다. 병아리 같이 조잘조잘, 말도 많더구나."
"... 소리를 듣지 못하신다, 그리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언제,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리 말한 적이 있더냐."
"... 사, 사람들이! 다들 그랬습니다!"
"다른 것을 감추기 위한 거짓이었을 뿐이다."
"무엇을 감추려고 그리 큰 거짓을 하셨습니까! 백성들이 얼마나 애통해 했는 지는 아십니까?!"
"... 나를 타이르는 것이냐."
"... 아, 아닙니다. 소인이 주제를 넘었습니다. 그저, 걱정이 되는 마음에. 그리 말한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 감춰야 할 것이 없어진 것 같다."
"... 네?"
"덕분이다."
"저, 저 말씀이십니까?"
"너를 놓지 않아도, 그래도 되겠느냐."
"당연히 놓지 않으셔야지요! 저는 헤엄도, 잠수도 할 줄 모릅니다!"
"나는 헤엄도 잠수도 잘 한다."
"그러니, 놓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여기서 죽기 싫습니다!"
"그러마."
"참이지요?"
생각해보면 윤기의 무통은 감각에만 작용했을 지도 모른다. 아픔을 못 느끼는 것은, 아주 특이한 경우 그럴 수 있지 않은가. 윤기는 그저 감각이 무딘 사람이었던 것이다. 좋으면 웃고 슬프면 우는, 그런 감정은 다른 이들과 같은.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외로운 세자라는 자리에서 저를 미워하는 이들을 피해, 제 터에서만 지내다보니. 하루하루를 똑같이 살아온 탓에, 제 감정을 돌볼 틈이 없었던 것이다. 문득 외로워져도 저는 감정을 못 느끼는 이라고 생각해서, 외로움이 아니라고 치부 시켜버리고. 슬퍼져도, 이건 슬픔이 아니라고 생각해버리는.
윤기는 저 하나도 스스로 버거운, 저 하나도 너무 많다고 느끼는. 아직 어린 열아홉일 뿐이었다. 그런 열아홉의 어느 날에 외로운 세자에게 날아든 청아는 열아홉의 사내 윤기에게 무수한 감정을 건네주었다. 좋고, 벅차고, 가슴 벅차는. 언젠가는 서럽고, 밉고, 원망하는. 그리고 또 언젠가는 다시 좋고, 웃는. 그런 사랑을 대뜸. 9년의 가뭄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19년의 긴 가뭄 끝에 두 사람이 소리와 소리로 만난 그날의 거센 빗줄기처럼. 모든 것을 적셨다.
연못 속의 무수한 문장들이, 수많은 기도들이 그들을 감쌌다. 느닷없이, 비가 내렸다.
"너를 오래도록, 놓지 않을 것이다."
"... 네?"
"너는 평생 헤엄도 잠수도, 할 줄 몰라도 된다."
"..."
"내 이리 너를 오래도록, 품에 안고 있겠다."
***
안녕하세요. 겨울입니다! 드디어 두 번째 프로젝트 제 순서인데, 대체 제 장르인 '치명적인 사극'은 어디에 있는 거지요? (광광) 사극 처음 써봐서, 너무 어렵고... 머리 아프고...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사극이니까... 반은 했다고 해주세요! (억지) 다들 귀한 시간 내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곧 제 작품으로 인사 드릴게요. 히히. ⚈้̤͡ 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