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라는 거야... ”
정말 어쩌라는 걸까. 뜬금없는 고백을 받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혼란스러웠다.
나를 쳐다보다가 병실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다니엘에 나도 한숨을 쉬며 일어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왔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강의건이.
이 생각만 반복하며 집에 도착하니 혼란은 배로 커졌다. 좋아한다. 이 한마디만 뱉고 그냥 들어가 버린 널 어쩌면 좋을까. 분명 계획하고 했을 말은 아니었을거다.
홧김에 뱉어버린 고백에 후회하고 있을 네 모습을 상상하니 한숨이 나온다. 너나 나나 정말 멍청이다. 둘 다 자기감정에 못 이겨 입부터 여는 멍청이들.
소파에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하는데 눈에 들어온 건 티비 앞 테이블에 놓여있는 사진들이었다. 가족사진을 제외한 모든 사진에는 너와 함께였다.
더럽게도 많이 붙어 다녔네.
[누나 일어났어요? 해장하러 갈래요? - 16 박우진]
타이밍도 참... ‘나는 다니엘을 좋아하는가’라는 주제로 혼자서 끙끙 앓고 있다가 도착한 카톡에 잠시 고민을 멈췄다.
그래, 어제 흑 역사 제대로 쓴 것 같은데 어떤 일이 있었나 물어나 보자. 국밥을 먹으러 가자는 말에 바로 약속을 잡았고 화장을 할까 고민하다 그냥 마스크를 쓰고 나갔다.
“ 누나, 괜찮아요? ”
“ 아, 놀래라... ”
언제 도착한 건지 뒤에서 나타난 우진이에 놀라 다시 주저앉을 뻔했다. 하체 운동이 좀 필요하겠네 워너밤. 이래서는 안되겠어.
자리를 잡고 멍 때리고 있는데 물을 건네주며 다시 한 번 괜찮냐며 물어보는 우진이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을 마셨다. 아니야, 안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 그래서 내가 어쨌다고? ”
“ 음... 리나 선배한테 따졌고... 그리고 바로 넘어질 것 같아서 업고 왔어요. 딱 코너 도려고 하는데 그대로 쓰러져가지고... ”
“ ... 많이 무거웠지. 미안... 밥은 내가 살게.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
“ 괜찮아요. 그러다가 집에 왔는데 누나가 계속 비밀번호 틀리게 말해서 다니엘 형한테 연락드렸어요. 그래서 집에 들어오니까 누나가 방에 들어가서 우당탕 소리 나고 그러다가 한참 있다가 나와서 다시 토하고... 물먹고 또 토하고... 진짜 속 괜찮아요? 누가 봐도 오늘 술병 나겠다 싶었는데. 한 5시 넘게 계속 그랬어요. ”
그렇게 덤덤하게 말하지 말아줘...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어버리고 싶다 진짜... 끊겼던 필름을 세세하게 이어 붙여주는 우진이에 조용히 마스크를 올려 썼다.
22년 흑 역사 중 가장 최고의 흑 역사를 만들었구나 내가. 나가 뒈져라 진짜.
“ 다니엘 형이 뭐라고 안 했어요? ”
“ 어? 어... 뭐... 좀 빡친 것 같기는 한데... 풀어줘야지 뭐. ”
근데 쉽게 풀릴 것 같지가 않아. 정확히는 지금 걔 얼굴도 못 보겠다. 묵묵히 밥만 먹는데 도저히 넘어가지가 않는다.
지금 이 상태에 먹으면 체할 것 같아 천천히 먹고 있는데 선호에 대해 물어본다. 말해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살짝 고민하다 선호가 아프다고 하니 열심히 움직이던 입이 멈춘다. 어디가 아프냐고 집요하게 물어보는 우진이에 입원을 했다고 하니 다시 한 번 입이 멈춘다.
“ 병문안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갔다 왔어요? ”
“ 아, 어... 새벽에 갔다 왔어. 지금 다니엘이랑 성우 오빠랑 있어. ”
“ 같이 갈래요? 저 혼자 가기는 좀 그런데... ”
“ 혼자 가도 상관없지, 뭐.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 내가 말해줬다 그래. ”
“ 다니엘 형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
“ 일은 무슨 일. 없어. ”
“ 그럼 같이 가요. ”
남자의 직감이라도 있는 건지 무슨 일 있냐는 물음에 반사적으로 없다고 했더니 돌아오는 건 같이 가자는 말이었다. 빠지지도 못하게 만드네...
지금 다니엘 마주치면 눈은커녕 얼굴도 못 보게 생겼는데... 똘망똘망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우진이에 고개를 푹 숙이며 긍정의 사인을 보냈다. 그래, 나도 모르겠다.
아기와 너
W. 22개월
“ 어, 우진이 왔어? ”
“ 안녕하세요, 형들... ”
“ ...... ”
“ ...... ”
병실 앞에서 스스로 기합을 주고 문을 열었지만 보이는 다니엘에 눈은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아... 역시 오지 말 걸 그랬나.
한숨을 쉬며 병실을 나가는 다니엘에 괜히 눈치가 보였다.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성우 오빠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우진이에 나도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어제 늦게까지 술 마셔서 형 화난 거예요? ”
“ 글쎄... 아마 선호 아픈 게 처음이라 그런 게 아닐까? 아, 너밤이는 최리나랑 한 건 했다며. ”
“ 그게 어째 여기까지 소문이 났나 봐요...? ”
“ 뭐 소문이야 빠르니까요. ”
그래도 내 흑 역사가 이렇게 빨리 퍼질 줄은 몰랐지. 보조 침대에 앉아 곤히 자고 있는 선호 손만 잡고 있는데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아, 들어온 건가.
차마 돌아볼 용기가 없어 선호만 보고 있는데 머리 위에 뭐가 얹어진다. 뭔가 싶어 고개를 위로 올리니 무표정의 다니엘과 함께 꿀물이 보인다.
멍하게 보고만 있으니 침대 위에 얹어두고 다시 나간다. 많이 불편한가. 옆에 앉아있던 우진이와 성우 오빠에게도 들려있는 걸 보고 뜯어 마시니 조금속이 풀리는 것 같다.
역시 따뜻한 꿀물이 최고야... 속을 달래고 있으니 회진 시간인 건지 복도가 시끄럽다.
주치의 선생님이 들어와 언제까지 입원해야 하는지, 상태는 어떤지 이야기를 하는 데 잠에서 깨려는 건지 조금씩 칭얼거리는 선호를 안아 드니 몸이 뜨겁다.
열이 쉽게 안 내려간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과 함께 주사가 놓인다. 아, 나까지 아픈 기분이다. 선호를 다른 곳을 보게 하고 나마저도 눈을 돌리는데 엄청나게 운다.
맞은 곳을 문질러주는 우진이와 달래려는 성우 오빠에도 계속 울어대는 선호에 열이 더 오를까 봐 걱정돼 일어나서 병실 안을 돌아다니며 토닥거렸다.
조금 있다가 그치자 티비를 틀어 보여주니 어린이 애니메이션이 나온다. 타요, 코코몽까지는 알겠는데 못카트는 또 무엇일까.
그래도 얌전히 품에 안겨서 보는 선호에 아침과 약을 먹이고 해열 시트까지 이마에 붙이고 나니 조금씩 웃는다.
“ 이제 조금 괜찮나 보네. ”
“ 그러게요. 다행이다. ”
“ 다니엘 형은 어디 가셨어요? ”
“ 뭐 잠깐 집에 갔다 오거나 아니면 이 근처에 있거나 하겠지. ”
“ 오빠도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실래요? 새벽부터 오셨다면서요... ”
“ 그럴까. 어차피 오늘 약속이 하나 있어서 집에 들어가 봐야 하기는 해. ”
“ 형같이 들어가요. 저도 잠깐 나온 거라. ”
“ 아, 그래? 그럼 한 5분만 있다가 나와. 잠깐 전화하고 차 빼고 있을게. ”
“ 넵. 조금 있다가 내려갈게요. ”
“ 잘 가요 오빠. 고생했어요 진짜. 제가 밥 거하게 사드릴게요. ”
“ 사 주지 말고 해줘. 나중에 집들이나 해. ”
“ 꼭 해드릴게요 그럼. ”
알겠다며 먼저 나가는 성우 오빠에 꾸벅 인사를 하고 나니 우진이가 빤히 쳐다보며 다니엘과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 일은 일이지. 근데 조금 큰일이라서 그렇지.
고개를 저으며 별거 아니라고 하니 한숨을 쉰다. 꼬맹아, 넌 또 무슨 한숨이야. 답을 갈구하는 눈빛에 의견 차이라고 하니 고개를 젓는다.
“ 그냥 의견 안 맞는 일이 아닌데? ”
“ 아닌 데는 반말이고 임마. ”
“ 요? ”
“ 아이, 진짜... 별거 아냐. ”
“ 눈치 없다는 소리 자주 듣죠. ”
“ 내가 얼마나 눈치가 빠른데. 2년 동안 학생회 일한 짬밥이 있어. ”
“ 아닌데? 진짜 아닌데? ”
“ 맞는데? 진짜 맞는데? ”
“ 눈치 없으니까 이 삼각관계도 모르죠 지금. ”
“ 무슨 삼각관계. ”
“ 나, 형, 그리고 누나. ”
“ ...누나 놀릴래? ”
“ 들켰나. 형 보니까 나랑 있어서 질투하는 거 아니에요? 질투하는 거 치고는 표정이 좀 심하게 안 좋기는 했는데. ”
“ 몰라, 나도. 아, 모르겠다 진짜. 아, 아오. 아! ”
“ 선호 놀래요. 쉿. ”
별 소득 없는 말만 반복하다 답답한 마음에 살짝 목소리를 높이니 가만히 누워있던 선호가 살짝 몸을 움찔거리다 내 쪽으로 돌아눕는다.
괜히 선호에게 찡찡대니 방실거리며 손을 내 볼로 가져다 댄다. 우리 선호 덕분에 누나가 살아요. 누나는 선호 없으면 안 되나 봐.
손에 볼을 부비다 갑자기 진지하게 나를 부르는 우진이에 고개만 돌리니 턱을 괴고 쳐다본다. 뭐야... 말해봐...
“ 누나는 어때요, 다니엘 형. ”
“ 뭐가 어때. ”
“ 남자로 어떻냐고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요? ”
“ ...너까지 왜 그러냐. 몰라. ”
“ 전 누나도 형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누나가 혼자 감정을 인정 안 하는 건 아니에요?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쟤는 친구야. 그러니까 이건 친구로서 좋아하는 거야.
그런 생각들. 제가 그랬거든요. 이건 후배로서 선배를 동경하는 거다. 뭐 이런 건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거더라고.
“ ...아, 저번에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했던 거? ”
“ 네. 근데 접으려고요. 1년 정도지만 뭐 가능성 없는 걸 알아서. ”
“ 뭐야. 그냥 접지 말고 고백이라도 해. 아깝잖아. ”
“ 어휴, 다니엘 형이 누나 때문에 속 많이 썩었겠어요. 전 갑니다. 우리 선호 아프지 말고 알겠지? ”
“ 고생했다 너도. 나 때문에. ”
“ 맞아요. 고생했죠. 갈게요. ”
닫힌 문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한 번 헤집어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전학 가기 전에도 그랬지만 전학을 온 후에도 넌 항상 내 옆에 있었다.
내가 남자친구가 생기면 알아서 연락을 줄이고 차이고 오면 같이 술잔도 기울이며 욕도 했다. 같이 시험공부를 하고, 같이 수능을 치고, 같이 졸업을 하고, 같이 입학을 했다.
한바탕 선배들에게 깨질 때도 옆에서 묵묵히 날 잡아줬고, 성적이 올라 기쁠 때도 축하한다며 옆에 있어줬고 돌아보면 항상 넌 내 옆에 있었다.
“ 내가 멍청이네... ”
선호를 보며 고민하고 있는데 혼자서 꼬물거리다 잠이 오는 건지 내 손가락을 꼭 쥐고 눈을 감는다. 아니 이 인간은 어딜 갔길래 아직도 안 와...
얼굴 보고 말이라도 해야 될 것 같은데.선호를 재우고 나서도 오지 않는 다니엘에 찾으러 가야 하나 싶어 일어났다.
“ ...... ”
“ 아, 깜짝이야. ”
그렇다고 바로 문 앞에 있을 줄은 몰랐지.
---
“ ...... ”
“ ...... ”
“ 아, 선호는 주치의 선생님이 오셔서 열 내려가고 이틀 정도만 입원하자고 하셨어... ”
“ 어, 고생했다. ”
어색하다. 우리가 같이 있던 시간 중 이렇게 어색한 시간이 있었을까.
2인실이지만 환자는 선호 혼자뿐이라 다니엘은 반대편 보조침대에, 나는 선호 보조침대에 앉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겨우 꺼낸 선호 이야기에 짧게 답이 돌아왔다.
또 할 말이 뭐가 있을까. 이렇게 말할 주제가 없었나. 이 상황에서 왜 고백했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볼 자신도 없고.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 그리고 아까 막말해서 미안해... 진심 아니야. ”
“ 안다. 내도 미안타. ”
“ 아냐, 내가 더 미안하지. 안 그러기로 해놓고 또 그랬으니까. ”
“ 잘 아네. ”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씩 웃고 있는 다니엘이 보인다. 뭘 웃어 멍청이야... 지금 사람 속은 타들어가는데.
어이가 없어 똑같이 웃으니 내 옆으로 와 눈을 맞추는 다니엘에 본능적으로 침대 끝으로 붙었다. 다가오지 마. 경계의 눈빛에 다니엘도 어깨를 으쓱거리며 선호만 본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뭔가 찜찜하지. 불안한 마음에 다니엘의 옆모습만 보는데 갑자기 야, 하고 부른다. 뭐, 왜. 무슨 얘기 하려고 또.
“ 연애할까. ”
“ ...어? ”
“ 아까 너무 내 말만 하고 도망친 것 같아서. ”
“ ...... ”
“ 연애하자, 워너밤. ”
아까와 다른 목소리에, 다른 분위기다. 첫마디에 저절로 떨어진 고개는 다시 들기가 힘들었다. 고백을 듣고 충분히 달아오른 얼굴이 여태 계속하던 고민의 답을 내려 주었다.
“ 대답은 없나. ”
“ ...그래. ”
“ 어? ”
“ 해보자, 연애. ”
나도 너를 좋아하나 보다.
22개월입니다!
Hㅏ... 정말 이번편을 쓸 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엎기도 많이 엎고... 수정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결국 제 한계가 와버렸네요 하하하
우진아 미안하다 하하하하 순식간에 여주는 원래 그랬지만 엄청난 눈치 고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괜히 미안하네요 여주에게... ㅎㅅㅎ... 물론 우진아 내가 정말 미안해 넌 나랑 연애하자 (도망)
아무튼! 드디어 14화만에 여주와 다니엘이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박수)
앞으로 꽁냥꽁냥하는 이야기를 열심히 이어갈테니 재밌게 봐주세요!
사랑합니다 독자님 모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