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성
8
"자기 의지가 있다면, 못만들건 없잖아?"
도영의 말에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민형은 자기들이 이곳에 나타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그녀와는 어떤 관계로 이곳에 온건지 알 수 없었다. 사실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도 그녀는 현재 다시 돌아왔으나 그 이유를 물을 수 없는 상태였다. 민형에겐 이미 전부터 물어봤으나 그도 알 턱이 없었다.
"이상하긴 했지."
".... 무슨 말이야?"
"기억 안나? 창조주가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었을 때."
"......"
"하자드에 다가갈 수 있던 사람은 황자, 민형이 밖에 없었어."
모두 그 때의 사건을 다시 떠올리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끔찍한 사건이었다. 다신 일어나선 안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온 이상 다시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현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역시."
"똑같이 하겠지. 그 때처럼."
충분히 가능성있는 이야기였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물불가리지 않는 민형이, 또 한번 희생하지 않을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자드는 악랄하다.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현실세계로 뱉어낸다. 자신의 상상 그 모든 것이 이루어져있는 이 곳에 빠졌을 때, 그녀는 현실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 때마다 환상에 젖어있는, 허상에 젖어있는 그녀를 깨우기 위해 몸 속에서는 저항 작용으로 일종의 공포심을 만들어냈다. 것이 이 곳에 머무는 그들이 말하는 '하자드'가 되었다. 3일에 한 번이면, 그녀는 하자드에 빠진다. 그녀가 깨어나도록 그동안에 겪었던 모든 공포심을 조장한다. 자드에 먹혀 괴로워하는 창조주를 그 누구도 편하게 보지 못했다. 하자드에 대적하지 못했던 이유는 단 하나.
그 곳에 들어가는 순간, 허상 속 젖어있던 사람 또한 공포가 된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야 할 이 곳은 그 순간부터 공포가 된다.
아무도 그 곳을 건들 수 없던 이유.
그들 모두 그녀가 만들어낸 하나의 허상이기에.
"민형이가 허상이 아니라면 어떡할건데."
".........?"
"민형이만, 그냥 창조주가 민형이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그래서 민형이에게 그런 능력을 준건.."
"기억 못하는 척하는거야, 아님 정말 기억 못하는거야."
"........."
"천러, 기억 안나?"
===+==
Taeil Point,
그녀가 이 곳에 마지막으로 왔던 날이었다. 이곳의 그녀는 현재 열아홉살. 정말 너의 열아홉이 이럴까, 하며 너를 지켜보는건 설레는 일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무도 모르게 창조주는 또 누군가를 만들어냈다. 그 아이는 창조주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황자와 있을 때는 저 멀리서 그 둘을 바라보곤 했었다. 그녀가 황자를 보며 기뻐하면 멀리서 보며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었다. 그 순간 알아챘다. 저건 그녀가 일부러 만들어낸게 아니라는걸. 감정 속에서 자연히 만들어진거란걸.
저 아이는, 사랑이었다.
창조주는 그 아이를 끔찍히 여겼다. '천러' 라는 이름까지 지어주며 친동생 마냥 다정히 대했다. 저렇게 지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민형이가 하자드에 빠지던 날, 그 애가 재현이를 붙잡고 오열하던 날.
'도영아, 제발 그러지마.'
'미안, 미안.'
도영이가 달려와 그녀에게 입맞추던 순간. 천러는 그대로 하자드에 휩쓸렸다. 그렇게, 천러는 창조주에게 하나의 공포가 되어버렸다. 아니, 공포이기 이전 망각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지 말았어야했다.
'... 괜찮아, 꿈일 뿐이었잖아.'
도영이는 그 아이에게,
'잊어도 괜찮은거야.'
망각의 입맞춤을 해선 안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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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대실을 나와 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어딘지도 모를 그 곳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 달렸다. 어쩌면 잊고 싶어서 달리는 것도 같았다. 천히 걸으면 걸을 수록 날 바라보던 도영의 그 눈빛이 자꾸 생각났다. 그 눈빛을 생각하면 전날 밤 일이 생각났고, 전날 밤을 생각하면 천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깊어져만 간다.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안됐다. 이 생각이 깊어지기 전에 달리는데 집중해야 했다.
"천천히 와도 되는데."
얼마나 뛰어왔을까, 잠깐 숨고르는 사이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그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아직 만들지 못해서, ... 좀 더 천천히 오길 바랐는데."
"..........."
"... 하랑한테 물어보기라도 하지 그랬어요. 뛰지 않아도 됐,"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요?!!!"
결국 언성이 높아졌다. 얼굴을 마주하자 마자 왠지 모를 안도감과 짜증이 밀려왔다. 이상하게도 황자, 그와 있으면 내 맘대로 되는게 없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꿈 속이라면서, 그는 항상 예상치 못한 일, 아니 생각하지도 못한 감정을 소비하게 만든다.
"하나부터 열가지 다 모르겠어요."
알고 싶다. 묻고 싶다.
"어찌되었던간에 지금의 난 여기가 처음이잖아요. 무슨 상황인지, 알려줘요. 말하기 힘들어도 알려줘요."
'너가 생각하는 친구는 도대체 뭐죠?'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이 내내 걸렸다.
'....... 안녕, 창조주.'
그가 그렇게 날 바라본 것 또한 내내 걸렸다.
"... 부탁할게요."
前,
이 곳은 나의 상상. 내가 생각한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곳.
머리 위로 부는 바람이 기분 좋은 곳. 햇살을 받고 싶을 때 원하는 만큼 느낄 수 있는 곳.
무지개가 보고싶거든,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적당한 보슬비 내리는 곳.
"여기 있었네, 한참 찾았잖아."
"어? 우리 황자님이네?"
"옆으로 가봐, 나도 눕게."
"야!! 거기 내 자리야!!!"
"먼저 누운 사람 자리지."
"아씨 이민형!!!"
"쟤넨 또 저걸로 싸우냐?"
"질리지도 않아요, 쟤네는."
"나도... 나도 같이 있을건데..."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이만큼이나 있는 곳. 특히나,
"....... 자꾸 보면 부끄러운데."
"..... 봐, 봤어?"
"느껴져. 너가 나 보는거."
"........."
"그래도 괜찮아. 너 좋을대로 해."
단순히 나의 꿈 속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그가 있는 곳. 이 곳이 바로 나의 상상. 내가 생각한 최고의 이상적인 곳이다. 언제부터인진 몰라도 이 곳에 빠질 때마다 본래의 나이가 아닌 고등학생 정도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재현이는 그런 날보며 아니라고, 맨날 아기같다고 칠칠맞다는 둥 잔소리를 한다. 뭐, 조금 인정.
"꿈에서 깨고, 기억나는 건 있었어?"
"...... 아니, 없었어."
사실 요즘 우리에겐 고민거리가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곳에 있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 더 심각한건 이젠 깨어나서도 그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매번 꿈에서 깨도 그들의 얼굴이 선명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까지 생생했다. 다시 잠에 들어 그들과 놀고, 일어나면 엄마에게 꿈 속에서 있던 재미난 일들을 말해주곤 했다. 근데 어느샌가부터 그런 모든 기억이 사라진거다. 다시 꿈 속에 들어와도 전일을 기억해내기가 힘들었다. 누군가 있었는데, 누군가와 정말 재밌었는데. 감정만 남을 뿐, 선명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다.
"너가 컸다는 뜻이야."
"....... 내가?"
"어른들은 바닥에 기어가는 개미 한마리 신경 안쓰지만, 유난히 어린 아이들은 잘찾아내고, 또 그거에 엄청 신경 써. 혹시나 밟을까 요리조리 피하면서. 그리고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또는, 작은 기억 하나에도."
"더 이상 마냥 어린 애가 아니라는 뜻이야. 현실 세계 속 너의 나이가."
언제나 태일은 저렇게 현실적인 말을 툭툭 내뱉는다. 다정한듯 하면서도 말 하나하나엔 날 다그치는 것만 같다. 태일과의 첫만남도 그랬다. 모르는 것 투성이인 내게 그는 갑자기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게 무슨 꽃이더라... 방울.. 무슨 방울이었는데.'
'은방울꽃.'
'.........?'
'기억났지? 이름.'
그는 내 기억의 일부였을거다. 수없이 복잡하게 꼬여있는 내 머릿속 기억들은 모두 그의 모습이 되어있는 것 같았다. 왜냐면, 그는 언제나 나의 해답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러면 앞으로 어떡해?"
"어떡하기는. 자연스러운거야."
"... 그러다 잊으면. 여기를 모두 잊어버리면..?"
"......."
"싫어, 나 그런거 싫단 말이야."
이곳은 나의 것. 그리고 유일하게 이들과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곳. 아무도 올 수 없는 유일한 나만의 공간인데, 내가 잊어버리면 다시 오더라도 이 곳의 추억들은 기억 못할거다. 그게 싫었다. 얼마나 소중한데, 얼마나 중요한건데 나에게.
"매번 하자드로 빠져들어가면 너도 알지 못하는 무서운 기억들이 가득해. 다 집어삼키는 것 같단말야. 그게, 그게 여기의 기억까지 먹어버리면 어떡해."
"..... 하자드가 없으면, 넌 여기 갇히고 말아."
"............"
"가끔은 꿈과 현실을 확실히 구분지어놔야해. 바로 지금같은 때에."
"......... 내가.. 너희를 잊어도 괜찮아?"
"... 응."
그 순간 태일에게 바랐던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그리고 분명 그도 알았다. 자신이 내뱉은 말이 내가 원하는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일은 꿋꿋이 더욱 확고하게 내게 말했다.
"그게 당연해. 꿈이니까."
아니, 그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건 그게 아니야.
"..... 너무해."
"....."
"... 미워."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한번도 이렇게 뛰어본 적이 없었다. 근데 이상하지, 그렇게 뛰는데 다리가 아픈 것보다 목구멍이 아팠다. 시야가 흐려져 제대로 뛸 수도 없었다. 빈말이라도 해주지. 그 누구라도 아니라고 말해주면 좋았을텐데.
'......... 내가.. 너희를 잊어도 괜찮아?'
'... 응.'
괜찮지 않을거면서. 잠에서 깨는 그 순간을 누구보다 못보면서. 거짓말이나 치고.
"... 안잊을거야."
똑똑히 기억해서, 잊지 않도록. 절대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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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만에 인티 연재라 어색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느낌이에요 ㅠㅠ 천천히 8화부터 업로드 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