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 블랙
作 심연을.
EPILOGUE 1
지민의 컬러리스트 : 그거!
지민이 냉장고에 붙은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팔짱을 끼고 유심히 그것을 읽어내려가던 지민의 눈썹이 이리저리 파도를 그렸다. 입술을 자꾸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드는듯 이리저리 삐죽였고, 손은 고민하듯 턱을 만졌다. 옆에서 시리얼을 먹던 여주가 지민의 뒤에 다가갔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봐.”
여주의 눈앞에는 길다란 메모지와 지민의 삐뚤한 글씨로 쓰인 글씨들이 보였다. 뭔가 목록 같아 보였는데, 장을 봐 올 거리인가 싶어 읽었더니 그건 또 아니다. 지민의 등에 몸을 푹 기대고 냉장고에 얼굴을 가까이 했다. 지리산 가기, 여름에 제주도 가기, 정동진에서 일출 보기, 일몰 보기, 어쩌구 저쩌구. 시시콜콜한 것들 투성이었다. 여주가 아직도 인상을 잔뜩 쓰고 고민에 빠진 지민을 쳐다봤다. 이게 나를 옆에 두고 아주. 여주가 어깨로 지민을 툭 밀었다.
“박지민?”
“너랑 뭘 하려고 엄청 생각 많이 해놨는데 기억이 안 나.”
그렇게 말한 지민이 몸을 틀어 여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둘이 냉장고 앞에 나란히 서서 목록을 들여다봤다. 여주도 어느 새 지민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미간을 좁혔다.
“흠.”
“그치, 모르겠지.”
“여행지야?”
“아냐, 여행지는 아냐.”
뭐였지? 지민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여주가 어깨에 기대며 눈을 야살스럽게 접고 웃었다.
“너 머리 그렇게 넘길 때 진짜 잘생겼다.”
“…….”
그런데 지민의 반응이 영 시원찮다. 굳은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 보는 얼굴에 여주가 입꼬리를 싹 내렸다.
“뭐야, 이 뭣같은 반응은?”
여주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지민이 애써 메모지에 눈을 박는 게 느껴졌다. 미간에 주름을 잡은 그 얼굴이 마음에 안 든 여주가 지민의 양볼을 붙잡고 제쪽으로 휙 돌렸다. 지민이 힘을 주고 버텼다.
“얘 봐라. 누나 봐.”
“나 집중 좀 하자, 진짜.”
“왜 버텨? 수상하게? 너 잘생겼다니까?”
아예 귀에다 대고 말을 하자 지민이 질겁을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여주가 지민의 얼굴을 감싼 손을 놓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휘청대던 지민이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아일랜드 옆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여주가 지민의 위에 털썩 앉았다.
“이게 칭찬을 해도 지랄이야.”
내 칭찬이 싫어? 어? 여주가 지민의 뺨을 이리저리 밀며 캐물었다. 씨발, 환장하겠네. 속으로 웅얼대던 지민이 어지러운 시야에 고개를 천장으로 치켜들었다. 나 집중 좀 하자고, 제발…. 뜨거워진 낯에 지민이 이를 악 물었다. 그 움직임을 손바닥 아래서 느낀 여주가 더 가까이 붙었다. 아예 지민의 허리에 다리까지 두르고 매달려 취조 중이다. 참다못한 지민이 여주의 손목을 잡고 내렸다.
“민망하니까 그런다, 씨발!”
빼액 소리를 지른 지민이 씨근거리며 여주를 노려봤다. 그 눈과는 어울리지 않는 홍조며 손아귀에 느껴지는 귀의 온도에 여주가 큭큭대며 웃었다.
“너 잘생겼다고 하는 게 민망해?”
“그래, 그러니까 그만해.”
“한 번 얘기했다. 한 번.”
“그것도 네가 말하면 민망해.”
“이거 완전 부끄럼쟁이 아냐. 고양이보다 더 해.”
여주가 지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넌 그거 알면서 맨날 나 못 놀려 먹어 안달이지.”
지민이 옆으로 눈을 흘기며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얼마나 재밌는데.”
지민의 손이 여주의 허리를 타고 올라갔다. 뒷목을 감싼 손이 옆의 냉장고를 향한 여주의 고개를 휙 돌렸다. 눈이 커진 여주가 지민의 이목구비를 깎아내렸다. 지민이 아까 여주가 가지고 있던 장난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계속해, 왜.”
가까운 얼굴에 여주는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마주보며 이마며 귀를 연신 만져댔다. 지민의 미소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여주가 나지막하게 말을 했다.
“생각 아직도 안 나?”
“뭐가.”
지민이 여주의 목에 입을 맞추며 이로 살짝 물었다. 얼굴을 살짝 찌푸린 여주가 몸을 움츠렸다. 지민은 그 속으로 더 파고들어 자국을 더 깊게 내려는 것처럼 여린 살을 빨아댔다.
“안 나냐구. 아파.”
여주가 어깨를 쳐도 지민은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매달려 여주를 바싹 끌어안고 살을 괴롭혔다.
“생각났어, 하고 싶은 거.”
“뭔데?”
풀린 눈을 한 지민이 여주에게로 향했다. 타액으로 젖은 입술이 달싹였다.
“그거.”
“그거?”
“페인트 볼 쏘는 그거.”
“아.”
그게 뭐야, 우리가 대학생도 아니고. 여주가 그렇게 툴툴댔다. 그러면서도 내심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민을 만나고 여주는 부쩍 어린 때로 자주 회귀하곤 했다.
“근데 그건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중에 하고.”
“저 목록에 지금 할 수 있는 게 있긴 있어?”
“있지.”
입꼬리를 올려 웃은 지민이 여주를 안아올렸다. 여주의 목에는 다홍색의 자국이 남았다. 지민은 곧 같이 누운 침대 위에서 그게 제 입술의 색을 옮겨놓은 거라고 했다. 여주는 비웃었지만 지민의 입술이 계속해 스칠 때마다 그곳을 손으로 괜히 한 번씩 매만졌다. 자두색.
Walk the Moon - Shut Up And Dance
꼭꼭꼭꼭 틀어주세요!
/
좆같은 자두색. 씨발!
여주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지민이 자국을 남겼던 목가를 연신 비비며 거칠게 욕을 했다. 여주가 비비는 그 자리는 피부가 아니라 흡사 군복 같은 옷이었다. 지민이 진득하게 입을 맞췄던 그 자리는 그 두꺼운 옷으로 덮여있었고 그 자리에는 피가 오른 자국이 아닌 지민이 쏜 페인트공을 맞아 자두색과 비슷한 다홍색의 얼룩이 나있었다. 이거 은근 아프잖아. 한참 뛰느라 숨을 탁 뱉었다. 그 와중에도 뒤의 목조물에 페인트볼이 퍽퍽대며 터지고 있었다.
“박지민 너 진짜 뒤진다, 그러다!”
허공에 대고 지민에게 악을 썼지만 대답이 없었다. 아주 신났구만. 여주가 페인트볼이 장전된 장난감 총을 고쳐잡았다.
지민이 저번에 말한 ‘목록에서 빈 것’이란 페인트볼 서바이벌을 말하는 거였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그냥 고글이나 쓰고 방진복 같은 거 입고 공이나 던지는 건 줄 알았더니, 총을 잡고 두꺼운 마스크에 군복에, 방탄복 같은 조끼까지 입히길래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게다가 장소가 이딴 숲이라니. 여주가 신경질적으로 나뭇잎을 걷어찼다.
“누나 어디있어?”
이럴 때만 누나지? 여주가 입을 삐죽대며 포복 자세를 했다. 다 뒤졌어. 페인트볼 총을 바닥에 세우고 어깨에 견착한 여주가 조준경을 통해 페인트볼 경기장 안을 살폈다. 지민의 목소리가 난 곳 근처에서 낙엽 밟히는 소리가 났다. 여주의 총구가 그 소리를 따랐다. 여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민아~”
여주가 느긋하게 지민은 불렀다. 바람소리만 고요히 들리다, 불쑥 지민이 나무 줄기에서 튀어나왔다. 여주가 망설임없이 총을 여러 번 발사했다. 한 발, 두 발, 세 발, 네 발, 그리고 다섯 발! 어깨를 쥐고 주저앉은 지민에 여주가 벌떡 일어났다.
“아프지?”
지민이 먼발치서 씩씩거리다 쓰러진 몸을 일으켜 여주에게 페인트볼을 난사했다. 아! 야! 고글과 어깨를 맞은 여주도 바닥에 쓰러졌다. 꽤 아픈지 잇새에서 나오는 신음이 짙었다.
“…김여주.”
여주가 지민이 생각한 것보다 오랫동안 답이 없었다. 땅에 널부러져 하늘을 보던 지민이 고개를 들었다. 누운 여주의 몸이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간담이 서늘해진 지민이 총도 팽개치고 여주에게 뛰어갔다.
“김여주! 너 어디 맞았어, 어?”
지민이 여주를 흔들자 인상을 찌푸린 여주가 앓는 소리를 냈다.
“괜찮아?”
“…….”
“괜찮냐고, 여주야. 많이 아팠어?”
“당연히 괜찮지, 이 새끼야.”
어? 지민이 대꾸도 하기 전에 뒤로 엎어졌다. 고글이며 조끼에 페인트볼이 연신 둔탁한 소리를 내며 터졌다.
“아, 그만! 야이 씨, 사기를 치네!”
“네가 시작했잖아. 하고 싶다며? 페인트볼 그거 하고 싶다며?”
날 맞춰놓고 낄낄거려? 애인이 어깨에 총 맞고 윽윽거리는 게 웃겨? 웃겨? 여주가 페인트볼이 바닥날 때까지 지민의 온몸을 물감으로 범벅을 해놓았다. 지민이 손이며 다리를 들어 막는 시늉을 했지만 조금 가라앉아있던 색의 군복만 더 얼룩덜룩해질 뿐이었다. 지민이 다시 한 번 공을 쏘려는 여주의 손을 발견하고 그것을 잡아당겼다. 여주가 외마디 소리를 내며 지민의 위로 쓰러졌다.
“그만하자, 내가 졌어.”
지민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바람이 허공을 가르는 숲의 바람소리와 비슷했다. 여주가 그 말에도 총을 들어 마지막 한 발을 배에 쐈다. 푹. 욱신한 느낌에 지민이 확인하니 아주 밝은 분홍이었다. 그제야 둘의 고개가 힘을 빼고 툭 쓰러졌다. 헉헉대는 숨소리가 섞여들었다.
“네가 오자고 한 거다.”
“알았어, 알았어.”
한참을 뛰고 싸웠더니 지친다. 지민이 마른 입술을 연신 혀로 쓸었다. 물 마시고 싶네. 검은 장갑이 무슨 색인지도 모르게 어지러운 색들로 덮여있었다. 지민이 뿌듯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다 손등으로 땀방울을 닦았다. 그리고 제 위에 누운 여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밭은 숨이 코로 뿜어져 나왔다.
“우리 다시는 이거 하지 말자. 신상에 안 좋아.”
“어. 그러자. 그냥 물감이나 사서 그거나 칠하자.”
“그래.”
“진짜 애새끼도 아니고 뭐가 좋다고 이걸 이렇게 열심히….”
여주가 숨을 고르느라 말끝도 흐리며 팔을 툭 놨다. 녹초가 된 지민과 여주는 한참동안 누워있었다.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지민의 위에서 빙글 돌아 바닥에 털썩 누운 여주가 얼룩진 장갑을 공중에 들어 이리저리 뒤집었다.
“볼만 하네.”
“그래서 오자고 했지.”
“색칠놀이 한 번 거하게 한다.”
여주가 끙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어 마스크를 벗었다. 낙엽 위였지만 신경도 쓰지 않고 머리를 둔다. 지민도 따라 그것을 벗었다.
“지민아.”
다정한 목소리 지민이 옅게 웃으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여주도 따라 웃었다. 지민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왜? 하고 되물었다. 순간 다정하기만 했던 눈이 아주 악랄하고 익살스럽게 변했다.
“나 아직 안 끝났어.”
씨발. 곧 지민의 시야가 산더미 같이 쏟아지는 낙엽으로 가려졌다. 입으로 낙엽가루들이며 흙이 들어왔다. 여주 저의 말마따나 애새끼 같은 웃음소리를 내면서 저 멀리로 달아났다.
“애새끼도 아니고 다음엔 하지 말자며?!”
“다음에 하지 말랬지 지금은 안 한다고 안 했다?”
지민이 낙엽을 거칠게 치우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10분 남았다. 그 전에 잡는다.
“김여주 너 잡히면 진짜 가만 안 둔다.”
“지이랄!”
애새끼 같은 것도 나쁘지 않다. 뭔들 안 좋겠냐마는. 스치듯 그렇게 생각한 지민이 여주를 따라 달렸다. 바람은 시원했고, 자신은 얼룩덜룩 너저분하게 얼룩져 있었고, 아주 즐거웠다.
/
<에필로그의 에필로그>
“총이랑 마스크는 어디 놓으셨어요?”
“네?”
지민과 여주가 직원의 말에 서로를 멍청하게 쳐다봤다.
“얻다 놨어?”
여주가 물었다.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얻다 놨어, 우리?”
멀뚱한 눈으로 서로를 번갈아보던 세 사람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PAINT BLACK.
제가 최대한 회차가 늘어나면 26~8화에 아주 많으면 30화 정도라고 예전에 말씀드렸는데,
스토리나 지민이의 극뽁기상 완결은 24화에서 끝맺는 게 제일 좋은 것 같고 여주와 지민이가 연애하는 모습은 에필로그로 좀 더 보여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따로 분리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