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윈터
[500] Days of WINTER
집애
* * *
"뭐야! 왜 문 안 열어줘!! 춥다추워!"
수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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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은 장식이지? 얼마나 연락을 많이 했는데!"
"미안, 원래 집중하면 신경 안 쓰는거 알잖아. 왜?"
"급하게 갈 곳 생겼어. 그러니까 이제 일 그만하기."
남은 커피를 원샷한 수정이 받침이의 코트와 숄더백, 휴대폰을 챙기며 받침을 일으켰다. 어리둥절한 표정에 대답을 해주기도 바쁜지 가면서 얘기해준다며 얼른 차로 향했다. 말없이 휴대폰을 건네준 수정이는 핸들을 잡았다.
[ 집애고등학교 17기 1-4 제 6회 동창회!!
불참자는 개인적으로 연락해주세요!!
(단, 이동혁을 납득시키지 못 한다면 불참 불가)
지각비 X 불참만 하지 말기
7시부터 집애클럽 2층 SVIP룸 통~째로 빌렸음!! 꼭 와라!
회비는 각자 알아서 30000원 이상 50000원 이하
드레스코드 X
- 이동혁 (오전 9시 단체문자 발송) ]
장문의 메세지였고 내용은 동창회였다. 동창회는 처음이라 떨리는 마음, 오늘 이 꼴로 몇 년만에 애들 만나기엔 자존심 안 사는 생각도, 2시간 후면 시작이라는 두근거림. 많은 느낌과 생각이 겹쳐서 마음을 물들였다. 그리고 한편으론 불안했다. 애들이 날 기억 못 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걱정말라며 주차를 하는 수정이였다.
"지금 우리가 걱정할건 시간이 부족한거. 그게 다야."
샵에서 1시간, 옷을 고르는데 40분, 또 다시 수정의 쥬얼리샵을 가 목걸이를 고르는데 20분. 2시간을 빼곡 채우고 다소 빠듯한, 꽤 늦은 출발을 했다.
* * *
받침이 한국을 다시 들어온 것을 모르는 재현의 3주는 평소보다 힘들었다. 첫째는 마감이 겹쳤던 직원들의 기사 내용을 다시 정리하느라. 둘째는 여자 좀 만나보라는 아버지의 말씀. 셋째는 첫째와 비슷한 이유였던 일. 이 셋이 주로 재현의 머릿속을 뛰어다녀 골치 아프게 했다.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일에 치여 사는 것이 나쁘지 않은 생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편집장님! 이번 파티 참석 여부 알려주시래요!"
"..우리 팀에선 누가 가요?"
"지희 선배는 그때 약속 있다해서 선배빼고 다 참석이요!"
"그래요? 그럼 저도 이번엔 참석할게요. 전체 명단 나오면 알려줘요."
"네엡-"
여기서 말한 파티란 전년도 매출 탑 3에 들었던 매거진 에디터, 임직원, 또는 그 매거진이 최고 매출을 기록했을 때 표지모델인 연예인이 참석할 수 있는 나름 위엄있는 행사라고 할 수 있다. 매번 불참을 한 재현은 이번엔 무슨 생각인지 처음으로 참석이라는 긍정적인 답을 했다. 아마 이 긍정을 이끌어내는 이유 중 큰 도움을 한 것이 아침에 온 동혁의 메세지일지도.
평소보다 머리도 더 공들여서 했고, 넥타이 색을 고르는 것부터 향수까지. 나름 공들인 보람이 있는지 편징장실로 들어오는 내내 여직원들은 물론 남직원들도 재현에 대해 속닥거리기 바빴다. '오늘 정편집장님 미쳤어. 착장 걍 죽어. 향수도 찰떡.' 이런 속닥거림이 대부분이었다.
"오늘은 마감도 했는데 오랜만에 정시 퇴근 할까요?"
팀원들이 환호가 재현을 둘러싸고 팀 밖으로까지 흘러 나왔다. 누굴 위한 정시 퇴근인지, 사실 재현은 조금은 본인을 위한 이기적인 정시 퇴근이라고도 생각했다. 오랜만에 내 추억들, 그 가운데 날 좋아해준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니까.
* * *
"그거 영화 좀 잔인하더라. 넌 무서운거 잘 못 봤으니까 다른 영화 봐."
몇 년전의 그 시절 아이들의 특징까지 세세히 기억하는 재현은 당연히 사랑받았다. 사랑받는 사람 주위엔 사람이 몰리기 마련이고 지금도 물론이다. 자연스럽게 재현을 중심으로 그룹이 만들어졌고 재현 바로 옆엔 세희가 자리하고 있었다. 둘은 졸업을 하고도 꾸준히 연락을 이어온 사이였다. 물론 한쪽이 일방적으로 엄청난 연락을 해서 이뤄낸 결과였다.
"왜 나는 인터뷰 안 해? 나도 나름 스타 쉐프잖아."
"친구 인터뷰할 생각은 없네요. 너도 술 적당히 마셔. 또 속 안 좋다고 아침부터 전화할거지?"
"치, 알았어."
그 아침부터 전화한 것도 다 네 목소리 들으려고 했던건데. 바보. 세희는 속으로 생각하며 술과 함께 넘겼다. 역시 술을 마시던 재현이 눈치챈 것이 하나 있었다. 강슬기랑 박수영은 있는데 정수정이 이 자리에 없다는 것. 술을 물론이고 이런 자리를 빠질 애가 아닌데. 그런 재현의 궁금함을 대답이라도 해주는 듯 마침 문이 열렸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다들 잔잔히 술잔을 넘기던 타이밍이라 주목을 받기 딱이었다.
"미안미안, 조금 늦었지? 데려올 사람이 있어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들어오는 수정의 뒤로는 이 자리에서 처음 보는 얼굴인 받침이 있었다.
"..어떻게 몇 년만인데 생각했던 반응이 아니네."
받침이 생각했던 극적인 만남에 어울리는 시끄러움은 정확히 3초 후부터 시작됐다.
솔직히 믿기지 않았어. 별로 울지도 않는데 눈물이라도 나올 것처럼 벅찼어.
나와 눈이 마주치고 웃어주는 받침, 네 모습은 여전했어. 스타일이나 분위기가 많이 변했지만 한 가지 바뀌지 않던 건.
내가 좋아했던 17살의 이받침. 그 자체가 변하지 않았다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