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익 다락방의 문을 열었다. 쾌쾌하게 쌓인 먼지들 사이로 기어간다. 어릴적보다 더 비좁아졌어. 푸스스 웃으며 다가간다. 쥐고있던 작은 오르골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뚜껑을 여니,노래가 흘러나온다. 음침하고도 서글픈 오르골의 음색이 마치 너와 같다. 낡은 오르골은 얼마안가 수명을 다 하고 죽어버렸다. 미소지으며 태엽을 돌렸다. 다시 네 목소리가 들린다. 다락방 안에 희미하게 감도는 비릿한 향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시골의 풍경이 낮설고도 신기했다.차창에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하고 그저 외딴 시골의 풍경을 눈 안에 가득 담았다.탈탈거리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달리던 낡은 자동차가 멈췄다.창문 밖으로 환하게 웃고있는 백현이 보였다. "오빠!" "뛰지마,넘어질라-" 차에서 뛰쳐나와 달려가 안기는 나를,번쩍 들어올려 안는다.꺄르륵 소리내어 웃는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차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낸 아빠가 드르륵,캐리어를 끌고왔다. "어서와요." 백현의 뒤로 듣기싫은 목소리가 들렸다.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다가온 여자가 눈을흘겨 나를 잠시동안 빤히 바라보다가 아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아빠가 웃으며 여자의 입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가 떼어냈다.눈꼬리를 접어 웃어보인 여자가 집쪽으로 몸을 돌렸다. "먼 길 오느라 피곤하셨을 텐데,좀 쉬세요." 입술에 떡칠한 핏빛 립스틱이 꼴사납다.두 눈두덩이를 시커멓게 물들인 꼬라지가 역겨웠다.백현에게 안긴 채,커다란 집을 바라보았다.오래된 2층짜리 주택.정원에 있는 나무와 꽃들은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담벼락을 타고 올라오는 가시덤불이 보였다.여자를 따라서 집안으로 들어섰다.백현이 조심스레 나를 바닥에 놓아주었다.발이 닿자마자 삐걱 하는 듣기싫은 소리가 울렸다.인상을 찌푸렸다가 금새 표정을 바꾸곤 고개를 들었다.여자와 눈이 마주쳤다.나를 보고 있었던가?새하얀 피부에 핏빛 입술을 한 여자가 한참이나 표정없이 나를 바라보았다.표정없이.짐은 어디에 풀까?아빠의 목소리가 들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으며 방으로 안내한다. "네가 지낼 방 알려줄께.가자." 백현이 잡은 손을 이끌었다.2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삐걱거리는 계단의 소리가 거슬렸다.끼익-낡아빠진 나무 문이 내는 소리가 소름끼쳤다.백현이 그런 나를 알아채고는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상체를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무서우면 오빠가 가끔 옆에서 동화책도 읽어줄께." 나는 말없이 백현의 손을 꼬옥 쥐었다.상체를 일으킨 백현이 내 캐리어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인 백현이 방 문을 나서며 말했다. "옷 갈아입고 나와.밥먹자." 쾅.닫힌 문을 빤히 바라보다가 벽쪽에 붙어있는 침대로 기어올라갔다.곰팡이 핀 벽.오래되어 흐려진 전등.구석에 위치한 금간 전신거울.갈색 나무로 된 낡은 책상.검정색 나무로 된 커다란 장롱.그 옆에 낡아빠진 창문.흩날리는 더러운 커튼.무릎을 끌어모아 고개를 파뭍었다.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뭘 좋아하는지 아줌마가 잘 몰라서 그냥 다 준비했어.어떠니,입맛에 좀 맞니?" "..네." "아줌마라니,ㅇㅇ아,엄마라고 해라." "어머,그래도 그렇게 갑자기-" "해보래도?" "......엄마." "고맙구나." 여자가 역겨운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토악질이 올라오는게 느껴졌지만 참아냈다.테이블 위로 가득히 차려진 음식들을 보니 더욱 역겨워졌다. "잘먹었습니다." "ㅇㅇㅇ,뭐하는짓이야.얼른 다 먹어." "아빠,나 속 안좋아." "그래요.억지로 먹이지는 마세요." "그래도 차려준 성의가 있지.얼른 다 먹어.다 먹기전엔 못일어나." 울컥. 설움이 목에 턱 걸려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나를 꾸짖는 아빠가 밉다.쥐고있던 숟가락을 던졌다.계란말이며,국이며,몇몇 반찬들이 튀고 뒹굴었다.식탁이 어지럽혀졌다.순식간에 찾아온 정적.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빠가,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거칠게 나를 일으켜세웠다.울먹이는 목소리로 뭐라 말하기도 전에 고개가 돌아갔다. "버르장머리 없는 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씩씩거리던 아빠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손을 높게 들어올렸다.백현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빠를 제지했다.눈물로 뿌옇게 변한 시야 사이로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다.어라....저건. 웃고있는 얼굴. 환하게. 엄마가 돌아가신 후,아빠는 엄마를 대신할 새로운 여자를 만났다.여자는 젊고 예뻤으며,희고 고운 피부는 눈이 부시기까지 했다.아빠는 돈이 많았다.그렇다고 해서 허영심에 찌들어 있지 않았다.정기적으로 기부도 했고,저축해 둔 돈이 많았다.여자는 새하얗게 웃는 얼굴로 엄마의 빈 자리에 파고들었다.여자는 나보다 두살 위인 아들이 있었다.백현.여자와는 반대로 천사같은 아이였다.아빠가 여자와 단 둘이 만날때면 나는 백현과 놀수 있었다.엄마가 죽고 1년 뒤,아빠의 일이 망했다.순식간에 집을 잃고,직장도 잃고,모두를 잃었다.여자는 흔쾌히 갈곳없던 나와 아빠를 받아주었다.아빠는 저축해 둔 돈이 많았다.여자는 젊고 예뻤다. "눈은 장식이야?똑바로 안해?얼른 다 치워." 짜악 돌아간 고개가 얼얼했다.식탁을 치우다가 실수로 손이 미끄러졌다.산산조각나 뒹구는 접시조각의 파편 몇개가 발등에 박혔다.여자는 신경질을 내며 부엌을 나섰다.부엌 바닥에 쪼그려 앉아 깨진 접시조각을 주워담았다.설겆이를 하느라 퉁퉁 불어터진 손 여기저기에서 붉은 피가 새어나왔다. 여자와 한 집에서 살게되고 딱 1년 뒤,아빠가 돌아가셨다.장례식장에는 얼굴도 모르는 친척들이 찾아왔다.여자는 아빠의 영정사진 앞에서 펑펑 울었다.울다 지친 나를 백현이 꼬옥 안고 달래주었다.한참동안 통곡하던 여자가 쓰러졌다.구급차로 실려가는 여자의 모습이 스쳐갔다. 여자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걸쳐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여자는 자신과 백현의 새 옷을 샀다. 아빠가 죽고난 뒤부터 하루하루가 지옥이였다.죽고싶어 할 때마다 백현이 다가와 나를 꼬옥 안고 달래주었다.그런 백현 때문에 여자의 무차별적인 폭력을 견뎌낼 수 있었다.하지만 여자의 폭력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여자는 아빠의 돈으로 온갖 명품들을 사 치장하기 바빴고,여러 남자들과 난잡하게 놀아나는것도 모자라 남자들을 집에 대려오기까지 했다.비가 내리던 밤,악몽을 꾸고 거실로 내려오고 있었다.거실 소파 위에는 나체의 남녀가 뒹굴고있었다.여자였다.나를 재우다가 같이 잠들었던 백현이 나를 따라서 계단을 내려오다가 그 장면을 목격했다.백현은 오히려 내 눈을 가려주었다.그때 백현의 나이는 고작 12살이었다. 여자는 얼마안가 아빠의 돈을 모조리 써버렸다.반찬은 온통 풀떼기 뿐이었다.그 이후로 여자는 낮동안에는 술을 퍼마셨고,밤이되면 진한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그 다음날에는 냉장고에 계란과 햄이 놓여져 있었다. 백현은 강했다.한번도 울지 않았다.백현은 어른스러웠다.나는 그런 백현이 좋았다.폭풍우가 쏟아지는 밤에는 내 곁을 지켰으며,거실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신음소리가 내 귀에 들어오지 못하게 동화책을 큰 소리로 읽어주었다.다락방에 데려가 피아노를 연주해 주기도 했다.나는 행복했다.집안일과 끔찍한 악몽들과 여자의 폭력으로 인해 피폐해져 가는 정신에도,피멍과 온갖 상처들로 가득 차오르는 더러운 몸뚱이에도,백현의 환한 미소를 볼 때면 그저 행복했다.백현은 나를 끌어안고 속삭였다.괜찮아.다 잘될꺼야. 백현은 피아노를 잘 쳤다.다락방에 놓인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백현은,눈이 부시도록 빛이났다.천장과 바닥 사이의 폭이 좁은 다락방에서 상체를 조금 숙이고 의자에 앉아,우리는 하루종일 피아노를 연주하며 놀았다.백현의 목소리가 피아노 선율과 어우러 질 때면,폭풍우치는 밤도,나를 집어삼킬듯한 악몽도,두렵지 않았다. 여느 때 처럼 우리는 다락방에서 놀고있었다.다락방 구석에 있는 작은 문을 바라보던 백현이,문을 열고 그 안에있던 낡은 오르골 상자를 쥐어주었다.환하게 웃으며 백현은 말했다.자신의 친아빠가 처음으로 여자에게 준 선물이라고 했다.그날 여자는 세상 누구보다 예쁘게,환하게 웃었다고 했다.그 이후 백현의 친아빠가 사고로 돌아가신 뒤,여자가 밤마다 흐느끼며 꺼내보곤 했다고 덧붙였다.그리고 여자가 우리 아빠를 만나고부터는 한번도 꺼내보지 않았다고 했다.의아한 얼굴로 바라본 백현은 그저 환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여자는 자꾸만 말라갔다.거실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가 이제는 비명소리처럼 들렸다.새벽에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는데,여자의 방에서 소리가 들렸다.발소리를 죽이고 방문에 귀를 갖다댔다.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한참을 흐느끼던 여자가 지쳐 잠이 든 건지,울음소리가 멎었다.나는 한참동안이나 그렇게 방문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여자와 백현과 함께 식사를 했다.여자는 식사내내 알수없는 말을 했다.테이블 위에는 한동안 못보던 고기반찬이 놓여있었다.백현은 자꾸 여자를 힐끔거렸다.여자는 아빠가 죽고난 뒤 처음으로 나를보고 웃었다.어색하게 시선을 피하고 백현을 바라봤다.백현이 표정없이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표정없이.마치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나를보던 여자의 그것 처럼. 다음날 아침,거실에서 우리를 맞이한 건 통유리로 된 베란다에서 흘러오는 햇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여자의 몸뚱아리였다. 아니,정확히는 천장에 이어진 밧줄에 메달려 차갑게 식어있는 여자의 시체였다. 백현은 그 날 이후로 변했다.해가 떠있는 동안에는 여자가 내게 그랬듯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백현은 남자였다.여자의 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햇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백현의 피부에 내 피가 튀었다.입술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본 백현이,더러운 무언가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일어섰다.그대로 발을 들어올려 나를 밟아댔다.시간이 흘러 해가 자취를 감추면 백현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백현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이 새긴 상처들을 하나하나 치료해 주었다.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나를 품에 안고 토닥여주었다.괜찮아.다 잘될꺼야. 해가뜨면 백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잔인하게 변했다.햇빛이 몸에 닿기라도 할 세면 미치광이처럼 햇빛이 닿은 살을 쥐어뜯었다.쥐어뜯은 살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나는 몸의 상처가 점점 늘어갔다.그리고 그럴수록 백현의 폭력은 점점 심해졌다. 폭풍우가 쏟아지던 밤.백현이 내 상처를 치료하다 말고 흐느꼈다.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든 백현이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죽고싶어.죽고싶어.죽고싶어.처음보는 백현의 우는 얼굴이었다.백현은 계속해서 흐느꼈다.죽고싶어.죽고싶어.죽고싶어. 천천히 오르골 상자를 닫았다. 고개를 돌려 뿌옇게 먼지쌓인 피아노를 바라보았다.웃는 얼굴로 피아노로 다가갔다.뚜껑을 열었다.빨간 덮개를 겉었다.눈을 감고 연주를 시작했다.백현이 즐겨 연주하던 곡이었다.귓가에 백현의 목소리가 울렸다.푸스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어릴적의 나 보다 훌쩍 커버린 몸에,상체를 숙여야 했다.구부정한 자세로 구석에 있는 작은 문으로 다가갔다. 벌컥 문을 열었다. "오랜만이야,오빠." 백현의 손에 오르골을 쥐어주었다.살풋 웃으며 문을 닫았다.끼익,소름끼치는 소리가 다락방을 울렸다.몸을돌려 다락방을 나섰다.다락방에서 이어진 계단을 내려오는 내 등 뒤로,오르골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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