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지금 안 계실 텐데…"
평소보다 무거운 발을 이끌고 2층으로 향하는 내게 가정부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 목소리에 내가 뒤돌아보자 그녀는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슥슥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방금 전에 나가셨어요."
휴대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3시 50분. 이 타이밍에 나갔다는 건 분명 나를 만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알려줘서 고맙단 의미로 가볍게 목례한 후 그의 방으로 향했다. 기다리면 오기야 하겠지. 막무가내로 지어낸 짧은 생각이었다.
방을 구경할 만큼 그에 관해 궁금한 것도 없고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주인 없는 방을 보니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내부는 둘은 커녕 셋이 써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넓었다. 그리고 그 공간엔 허전할 만큼 가구가 적었고, 그 가구엔 또한 놓여진 것이 없었다.
어제 왔을 때 몰래 두고 간 문제지가 떠올라 그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럼 그렇지. 속을 암만 찾아봐도 종이 쪼가리조차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어제보다 넣어둔 담뱃갑만 더 늘은 것 같았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이나 만지작대었다. 그래봤자 황민현 전화번호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게 끝이지만.
어제 그렇게 쫓겨나듯 방에서 나오니 황민현이 마당 벤치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바래다 줄 테니 차에 타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가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던 그 날 그 영화관 엘레베이터가 떠올라 씁쓸한 웃음이 났다. 지금의 그는 어른인 지 한참이었고, 기사가 따로 필요한 고등학생 소년이 더 이상 아니었기에.
집으로 가는 내내 정적이 흘렀다. 지하철로는 30분인데 승용차를 타니 시간이 짧았다. 집 근처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선뜻 말을 뱉지 못했다. 나는 운전석에 앉은 그를 보는 대신에 곁눈질로 그의 차를 살폈다. 새 차 냄새가 가시지 않은 걸 보니 조선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했다.
"과외 한 지는 얼마나 된 거야."
그가 일본어로 물었다. 나는 대답 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추었다. 그 역시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겉으로는 대충 별 의미 없는 것처럼 물었어도 나는 그 속 뜻을 알았다. 친일 가문을 그렇게나 증오하던 너가 왜 거기에 있었느냐고 묻는. 그것에 덜컥 기분이 나빠졌다. 모두 피해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걸 알았지만 화를 걷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공격적으로 받아쳤다.
"물어볼 게 그것뿐인가."
"여주야."
"몇 년만에 돌아와서 할 말이 고작 그런 거밖에 없는 거예요? 선배는?"
칼같은 내 목소리에 그의 눈이 곧 애처롭게 변했다. 여주야. 그가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 눈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계속 마주 보고 있으면 눈물부터 날 것 같아서. 그러면 이 원망도 서운함도 허무하게 다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물어볼 건 되게 많은데. 어떻게 지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팠던 데는 없는지."
그가 말을 이었다. 한 자 한 자에 심장이 쿡쿡 쑤셔왔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 대화하기 힘들면, 기분 조금 나아졌을 때 연락 줘. 기다릴게."
그런 내 맘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그가 차분히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연락을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느냐고.
07. 옹성우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불이 온통 꺼져있어 앞이 보이질 않았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홉 시 반. 방에 인기척에 없는 걸 보니 그는 아직도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집안 사람들에게 눈도장은 찍었으니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단 생각이었다. 나는 앉아서 졸고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책상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어차피 나가려던 참이라 방등을 켤 생각도 않았다. 가방을 챙긴 후 휴대폰 라이트에 의존해 조심조심 문으로 나아가던 찰나, 문이 덜컥 열리더니 빛이 확 쏟아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역광에 가려진 옹성우가 보였다.
첫 날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선 술냄새가 났다. 그는 내가 무어라 말을 건네기도 전에 비틀대며 내게 다가왔다. 그의 뒤로 문이 밀려닫혔다. 빛이 조금씩 죽었다. 나는 그와 어둠 속에 갇혔다.
"눈에 띄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만취한 채 일어를 내뱉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오며 읊조렸다.
"마쓰야마에 쳐넣을 거라고도, 했을 텐데."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으나 그가 나와 마주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더니 내게 안기듯 기대었다. 알코올 향이 뒤섞인 그의 냄새가 확 풍겨왔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양팔을 잡고선 그를 내게서 떼내려고 애를 썼다. 문이 완전히 닫히질 못한 까닭에 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힘이 어찌나 세고 몸은 또 어찌나 무거운지 그는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그를 계속해서 밀어내며 내가 힘겨이 말했다.
"오늘은 많이 취하신 것 같으니까. 내일 오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몸에서 차츰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휴대폰으로 라이트를 비춰 금세 곯아떨어진 듯한 그를 침대까지 밀었다. 그가 그 위로 쓰러지듯 누우니 매트리스가 덜컹거렸다. 나는 눈을 꼭 감은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에 이렇게 화가 나있는 건지 그의 미간엔 힘이 잔뜩 실려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는 그 위로 조심스레 갖다대었다. 분명 잠든 줄 알았는데. 그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끌어당기는 힘이 세서 하마터면 그의 위로 넘어질 뻔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내가 놓으라고 소리를 덜컥 질렀다.
"남의 얼굴 이렇게 막 만져도 되는 건가."
그가 살풋 웃으며 말했다. 차오르는 민망함에 내가 계속 발버둥치자 그는 곧 손아귀에서 힘을 빼었다. 그리고는 침대 위에서 저를 쳐다보고 있는 내게 말했다.
"만나게 해줘."
그가 붙잡고 있었던 왼쪽 손목이 화끈거렸다. 그의 난데없는 요청에 나는 화내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그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쿠니히로 히메시."
침대에 놓여있던 내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화면이 켜지자 액정 빛이 잠시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머리맡에 서있는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저 표정. 언젠가 분명 봤었던 표정인데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쿠니히로 히메시라는 이름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입을 한번 더 떼었다.
"김재환."
그 이름 석 자를 내뱉는 그의 두 눈이 일렁였다. 나는 머리맡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