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장난
上
채리
결코 평범하지 않은 시작이었다. 그 날 나는 (전)남자친구의 바람으로 인해, 그것도 침대에 뒤엉켜 있는 둘을 직접 목격하여 정신이 피폐해진 지 꼬박 일주일도 되지 않은 상태였고 옹성우 또한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한껏 우울해져 있는 나와 옹성우를 강다니엘이 불렀고 나는 술이나 퍼마시자 하는 생각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옹성우와는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고 강다니엘을 통해 알게 돼서 셋이서 아니면 만난 적이 없었다.
" …안녕? 오랜만이다. "
" 응. 오랜만이네. "
겹치는 친구가 많긴 했지만 따로 둘이 만나서 술 마실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강다니엘이 오기 전까지 조금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괜히 메뉴판을 건네며 안주를 고르고 술을 시키고 휴대폰만 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옹성우와 둘이서 이러고 있기는 뭔가 어색해서 술이 나오자마자 받아서 마셔버렸다. 옹성우도 이 어색함이 불편했던 것인지 제가 고른 술이 나오자마자 삼켜댔다. 그러고도 한 십 분 지났을까, 강다니엘에게 전화가 왔다.
" 야 왜 안 와! "
ㅡ 야 내 진짜 미안한데 급한 일 생겨서 못 갈 것 같다.
" …? 돌았냐? "
ㅡ 아니 진짜, 쫌 이따 연락할게. 미안. 진짜.
그렇게 전화는 끊어져 버렸고 옹성우 또한 나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화 내용을 다 들은 것 같았다. 하… 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풀까 하다가 눈 앞에 있는 술잔을 옹성우에게 내밀었다. 짠…하자. 어색하게 흘러나오는 말에 옹성우는 살짝 웃으며 잔을 부딪혔다. 그렇게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한 병이 되고, 두 병이……. 둘이서 셀 수도 없이 마셔댔다. 술에 취하면 말이 많아지는 나는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아무 말이나 해댔다.
" 야 내가, 뭘 봤는 줄 아냐? "
" 뭐 봤는데? "
" 아니. 시발. 남자친구가 연락이 안 돼서 걔 자취방을 갔더니! 존나 여자랑 뒹굴고 있는 거야! "
" 와 미친. "
" 근데 그 여자애가 내가 아는 동생이었어……. 진짜 좆같지 않냐. "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랬다. 옹성우도 웃긴 게 내 말에 다 리액션을 해 주는 거다. 그래서 나는 또 신나게 떠들어댔고. 그렇게 신난 나는 계속해서 술을 마셨고… 정신차려 보니 내 자취방이었다.
" 아 미친 머리 깨질 것 같네. "
그리고 내 옆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옹성우가 누워 있었다.
정말 놀라서 소리 지를 뻔했다. 곤히 잠든 옹성우를 경악에 찬 얼굴로 바라보다가 휴대폰에 진동이 울려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전화를 받았다. 강다니엘이었다.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고 하면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ㅡ 야 니 성우랑 같이 있나?
" …아니? "
ㅡ 왜 안 들어왔지. 애가 연락이 안 된다. 어제 뭔 일 있었나?
" 없었어. 야 나 바빠. 끊는다. "
ㅡ 아침부터 뭐가 바쁘,
옹성우가 들을까 봐 전화도 바로 끊어버렸다. 양치도 제대로 하지 못 하고 대충 가방을 챙겨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끼고 집을 빠져나왔다.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술에 취했던 나. 같이 취했던 옹성우. 그 날 따라 내 눈에는 옹성우가 평소보다 잘생겨 보였고… 나는 그걸 옹성우한테 말했다. 너 오늘 좀 잘생겼다? 하고. 옹성우는 기분 좋은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알아. 너도 예뻐. 하는 옹성우의 말에 나는 오히려 짜증을 냈다.
" 거짓말… 그럼 그 새끼는 왜 다른 년 만나냐고…. "
" 그건 걔가, "
" 야 내가 그르케 매력이 없냐? "
나는 옹성우에게 바짝 붙어서 눈을 반짝이며 나름대로 매력발산을 했다. 병신같이. 옹성우는 별다른 말없이 나를 내려보기만 했다. …예쁘다니까? 잠시 침묵하다가 나온 대답에 나는 더 짜증을 냈다. 이거 봐! 바로 대답 못 하잖아!
" 너 오늘… 잘못 걸려써. 나 취할 때까지 너 집에 못 간다? "
" 너 취했어. "
" 아니거든! "
취했는데 아니라고 우겨대며 계속 마시던 나와 나를 따라서 마시던 옹성우 둘 다 결국 취해버렸고 나보다 아주 조금 제정신이었던 옹성우가 나를 데려다 주기로 했다. 택시에서 무사히 내린 나는 옹성우에게 거의 기대서 집에 도착했고 옹성우는 나를 침대까지 올려놓았고 그대로 집으로 가려고 했다. 근데 내가. 미친 김여주가 옹성우를 잡았다. 가지 말라고. 허리를 꼭 안고서 놓지를 않았다.
기억이라도 안 나면 얼굴에 철판 깔고 행동할 텐데 이건 뭐… 하나도 빠짐 없이 기억났다. 옹성우와 입을 맞추던 순간, 품에 안겨 옹성우를 재촉하던 순간까지. 미쳤다 진짜. 얼굴이 붉게 타오르는 듯한 느낌에 보는 사람도 없는데 고개를 숙였다. 미친년. 언젠가 한 번 사고를 칠 줄 알았지만 이따위로 대형사고를 칠 줄은 몰랐다. 불안한 마음을 대변하듯 다리가 덜덜 떨렸다. 아 자취방은 언제 들어가지.
비록 그 자취방이 내 자취방이긴 했지만 옹성우가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고 혹시나라도 마주칠까 무서워서 며칠은 친구의 집에서 빌붙어 살았다. 민폐인 걸 알지만 친한 사이였고, 그 친구는 내가 실연의 아픔으로 이러고 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별 불평 없이 나를 받아줬다. 나는 지금 전 남자친구는 안중에도 없었다. 실연이고 나발이고 친구의 친구와 잤잤을 시전했다는 사실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고 강다니엘에게 오는 연락을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며칠 연락을 무시하니 강다니엘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았고 이쯤되면 옹성우와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해서 다시 내 자취방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잊어가고 있었는데 강다니엘이 또 술 마시자고 연락이 왔다. 며칠 전부터 자기 피한 거 안다고 이번에도 연락 씹으면 진짜 뒤진다, 뭐 이런 내용으로…. 아무리 그래도 내 친구를 잃을 수는 없으니까 강다니엘을 만나러 갔다.
" 그 날 너희, "
" ……. "
" 싸웠지. 그래서 둘 다 서먹하게 구는 거 아니가. "
" ……. "
" 니는 왜 내 연락도 씹는데. 성우가 니 자꾸 찾았는데, "
" 아니? 아무 일도 없었는데. "
" …아무 일도 없었다고? "
근데 거기에 옹성우도 올 줄은 몰랐지. 내 뒤에서 옹성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하게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면 자꾸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아 모른 척 강다니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강다니엘은 제 촉이 맞았다며 역시 둘이 싸운 게 분명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옹성우는 왜 부른 거야?
" 내가 제일 친한 애 둘이 싸우니까 마음이 안 편해 가지고. 좀 화해하라고 불렀다. "
" 아니, 안 싸웠다니까? "
" 그럼 뭔데. 왜 그러는데. "
" … 그냥 싸운 걸로 할게. "
나이가 몇 갠데 싸우고 그러는데. 강다니엘은 낄낄거리며 내 잔에 술을 채웠다. 이 눈치없는 새끼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며 원샷을 때렸다. 옹성우의 시선이 내게 닿는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계속 술만 마셔댔다. 아니. 솔직히 그래. 사람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잖아. 나도 옹성우도 하룻밤의 실수로 치부하고 넘기면 될 일이었다. 그냥 그러면 다 되는 건데. 나는 그 생각으로 강다니엘의 잔과 옹성우의 잔에 술을 채웠다.
" 오늘 다 정리하고 가는 거다. 알겠지? "
" 오, 그래 나와야지. "
" 그래. "
그래. 그렇게 또 미친년 마냥 마셔대다가 또 필름이 끊겨 버렸고 데자뷰처럼, 나는 내 자취방에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욕설을 내뱉으며 눈을 떴고 내 옆에는 나와 같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옹성우가 누워 있었다. 그때와는 달리 눈을 뜬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일찍도 일어난다. 내 당황스러운 심정과 달리 차분한 목소리에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인상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는데 머리에 두통이 오면서 어제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나는 그때처럼 술에 취했고 그때처럼 옹성우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때처럼 우리는 침대로 향했다.
" 미친년인가 진짜. "
" 일어나자마자 하는 말이 험하네, 자기야? "
" …미쳤냐? 자기야? "
" 기억 안 나? 어제 네가 그랬잖아. 나보고, 나랑 계속 있고 싶다고. "
" …내가? "
" 그래서 내가, 그럼 나랑 사귈래 했더니 좋다고 달려든 게 누군데. "
빌어먹게도 옹성우가 말하자마자 기억이 떠올랐다. 진짜 그랬다 내가. 침대에 누워서 나는 옹성우를 끌어안은 상태로 같이 있고 싶다며 칭얼거렸고 옹성우는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그럼 나랑 사귈래 하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좋다고 입술에 뽀뽀를 퍼부었다. 기억이라도 나지 않으면 모른 척할 텐데 이건 진짜… 너무 미친 짓 같았다. 아니. 그러면 옹성우는 왜 내 미친 짓에 장단을 맞추고 있는 건데?
" 그야, 재밌으니까. "
……. 옹성우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내 자취방에서 바지만 입은 채로 커피를 타는 모습이 제법 자연스러웠다. 설마 그 날도 저렇게 커피를 마시고 갔던 건가. 내 머리로는 옹성우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했던 미친 짓들도 이해가 안 가는데 옹성우는 나를 뛰어넘는 미친놈인 것 같았다. 내 미친 짓에 장단 맞춰주는 이유가 뭔데 대체? 나로써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고 그냥, 옹성우를 보기 드문 또라이 그렇게 기억하기로 했다.
" 사귄다고? 둘이? "
" 그래. "
" 진짜 미친 거 아니가, 왜 사귀는데?! "
" 그야, ……좋으니까? "
우리가 사귄다는 옹성우의 말에 강다니엘은 펄쩍 뛰었다. 아니, 아니…… 둘 다 이별한 지 얼마 안 돼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가? 하는 말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래.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면 이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다고. 술 마시고 몇 번 자게 되었고 그걸 계기로 사귀게 된 게, 미친 게 아니면 뭐냐고. 나는 도저히 옹성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옹성우가 나를 좋아한다 라는 가정이 있다면 가능한 일이겠지만 옹성우가 나를 좋아하는 건 절대 아닌 것 같았거든.
" 여기가 네 집이야? 작작 찾아와. "
" 내 집은 아니지만 내 애인 집은 맞지. "
" 개소리 하네 진짜. "
" 싸가지 없게 말하면서도 들여보내 주는 거 존나 마음에 드는 거 알아? "
그리고 나도 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연애감정은 아니었다. 약속이 있어서 밤 늦게까지 놀다가 막차가 끊겨 집에 가지 못한 옹성우가 우리 집을 찾아오면 나는 욕을 하면서도 들여보내 주었다. 옹성우는 내가 그럴 걸 알기 때문에 계속해서 찾아왔고. 정말 싫으면 그냥 문을 열지 않으면 되는 건데, 나는 그러질 않았다. 옹성우 말대로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재밌었거든. 평범한 관계는 아니잖아? 그렇기 때문에 더 매력적인 것이고.
이를 테면 불장난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금방 꺼질 줄 알았다. 옹성우와 나 사이에 생겨난 불장난 같은 관계가. 금방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미친 불길은 꺼지긴 커녕 더욱 불타오르고 있었다.
ㅡ
下편은 조금 기다리셔야 올라옵니다. 분량 너무 길어져서 당황,, 한 편 안에 끝내려던 단편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