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반인반수들과 동거 중
Bonus ep. 다니엘의 생일파티
<3년 전>
흔히들 슬럼프라고 하지요. 2년 전부터 인공수정 반인반수를 만드는 족족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 마지막이 P-22라는 거지요. 출근을 하자마자 계획서부터 펴들고 다시 읽어 내렸습니다. 계획서 상으론 전혀 문제가 없거든요. 근데 자꾸 인공수정 반인반수들이 죽어나가는 겁니다. 정말 빡치게... 몇 번이고 다시 본 계획서를 다시 보다가 보고서를 작성해나갔습니다. 이제 온점만 찍으면 끝나는데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배진영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의 공허한 눈빛, 축 쳐진 표정을 보고 단번에 느꼈죠. 또 실패구나. 아니나 다를까 혀로 입술을 한 번 축인 배진영이 담담히 말하는 겁니다.
"김여주 연구팀장님. W-8이 새벽에 심한 발열과 구토 증세를 보이다 8시 경 사망하였습니다."
"아, 그럼 폐기처분하세요."
대답은 쉽게 했는데... 너무 짜증이 납니다. 아... 지금이 제 인생 최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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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시간이 흘러 짧은 바늘이 12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지금 낮이냐고? 아니요. 밤입니다. 계속 계획서를 다시 확인했고 보고서를 정독하고 있거든요. 민현이 만들고 작성한 실험보고서를 가져와 비교도 해봤고 지성 선배에게 FS-24 실험 보고서도 받아서 분석까지 해봤습니다. 전혀 다를 게 없어요. 정말 정석 그대로 했단 말입니다. 단 1g의 오차도 없이요. 생전 처음 느껴보는 답답한 느낌에 의자에 깊게 기대며 천장을 바라보았습니다. 정독하던 게 있으니 인공수정 반인반수를 만드는 약의 공식이 천장에 막 써질 정도네요. 그렇다고 눈을 감아버리면 더 생생히 공식이 써지는 통에 다시 눈을 떴습니다. 짜증나. 어차피 이렇게 고민해봤자 나오는 게 없으니 그냥 퇴근이나 해야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연구원 가운을 벗는데 뜻밖의 노크소리가 들렸습니다. 벌써... 12시가 넘었는데... 누가... 이 시간에...?
"들어오세요..."
작은 나의 대답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 어쨌는지 다시 노크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뭐야... 무섭게 왜... 되는대로 연필꽂이에 있던 커터칼을 집어 들고 방패로 쓸 보고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쪽에서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들어오라 말했죠. 살짝 문이 열렸습니다. 곧 활짝 열리는 문틈으로 다니엘이 보이는 겁니다. 아이씨... 겁나 놀래라.
"놀랐잖아."
"정말? 아, 미안. 고의는 아니었어."
"...아직도 퇴근 안 하고 뭐해?"
"직속 선배님께서 퇴근을 안 하시는데 한낱 후배가 퇴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야아, 융통성 있게 갔어야지. 얘가 미쳤나봐..."
"미치진 않았고. 누나, 우리 술 마시자."
어쩐지 뒷짐 지고 있더라니. 술 마시자며 건넨 편의점 봉지 안엔 초록 병들이 가득했습니다. 인생 뭐 있겠습니까. 마시고 죽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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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한 다니엘이 마른안주도 사온 덕에 제대로 술판이 펼쳐졌습니다. 안 그래도 답답해서 술 마시고 싶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딱 사왔네요. 덕분에 오늘따라 술이 아주 답니다. 따르는 족족 원샷을 때리며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데 제 술잔에 다시금 술을 가득 따라준 다니엘이 슬쩍 웃으며 장난을 칩니다.
"커터칼은 왜 들고 있던 건데?"
"아니... 솔직히 지금까지 퇴근 안 한 연구원이 있을까 싶었지..."
"누나 있잖아."
"나는... 일이 자꾸 안 풀리니까 짜증나잖아."
일 생각에 또 짜증이 나네요. 다시 술잔을 들고 원샷 때렸습니다. 크으... 절로 나오는 소리에 다니엘이 제게 오징어 다리를 건네네요. 받아들고 씹었습니다. 아주 환상의 조합이에요. 소주와 오징어. 다시 한 번 제 잔에 가득 술을 따라준 다니엘이 이번엔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거 왜 안 되는지 알아?"
"너 알아?"
"응. 알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비우는 다니엘에 어서 술을 따라 주었습니다. 두 손으로 받아든 다니엘이 또 히죽 웃습니다. 장난인가 싶어 허탈한 그때 다니엘이 허를 찌르는 말을 했습니다.
"누나 혼자 모든 걸 감당하려고 해서 그래."
"뭐?"
"누나 지금 딱 술 먹고 싶었지? 그거 왜 그런지 알아? 힘드니까 그런 거야. 힘드니까."
"......"
"......"
"누나가 나한테 그랬지? '힘들면 기대라, 다 해결해줄게.'라고. 그래서 작년에 나 진짜 힘들었을 때 누나한테 기댔잖아. 그래서 누나가 해결해줬잖아. 그럼 지금의 누나는 누구한테 기댈 건데?"
다니엘의 마지막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힘들었던 적이 없습니다. '힘들다'라는 감정이 생소할 정도로요. 제 능력으로 누군가를 도와줄 줄만 알았지 도움을 받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거든요. 그런 제 상황이 인지되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막 나오는 겁니다. 너무 놀라 고개를 숙였죠. 다니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탁자 끄트머리에 있던 티슈를 뽑아 제게 건네주는 겁니다. 복잡한 머릿속에 그저 티슈만 꽉 쥐고 있으려니 다니엘이 직접 제 옆으로 왔죠. 곧 1년 전 제가 그랬듯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 줍니다. 그런 그의 손길이 너무나 따뜻해서 복잡한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마음이 녹아버린 만큼 감정이 격해져 울음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더라고요. 그저 아무 말 없이 제 등을 쓸어줄 뿐인 다니엘이 처음으로 믿음직해지는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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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진정이 됐습니다. 그리고 쪽팔림이 찾아왔죠. 크흠, 헛기침소리가 울음소리 뿐이던 연구실을 메우자 다니엘이 똑같이 헛기침을 하는 겁니다. 곧 다니엘이 슬쩍 제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습니다.
"이 분위기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나 오늘 생일이다, 누나."
"....뭐?!"
머쓱 하긴 한가 봅니다. 아니, 지금 지 생일날 내 고민이나 풀어주고 있질 않나... 생일상이라기엔 지나치게 술상이질 않나... 아... 정말 직속선배로써 최악이네요. 고개를 푹 숙이고 쉬는 한숨엔 술 냄새까지 흩어집니다. 진짜... 최악이에요. 표정이 안 좋을 다니엘 생각에 고개도 들지 못하겠습니다. 그저 제 시야에 보이는 다니엘 신발만 뚫어지게 볼 뿐이죠. 가만있던 다니엘의 신발이 갑자기 움직입니다. 앞코를 살짝 들고 왼쪽, 오른쪽으로 부드럽게 움직이는 다니엘의 신발에 의아해서 고개를 들고 다니엘을 보았습니다. 곧 싱긋 웃고 있는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죠. 눈도 마주친 김에 사과를 해야겠습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사과를 했죠. 근데 다니엘이 동시에 저를 부르는 겁니다.
"미안."
"누나."
먼저 말하라고 했죠. 다니엘은 말 대신 갑자기 고개를 드느라 흐트러진 제 머리를 정리해줬습니다. 이게 뭐라고.... 심장이 반응하는지... 익숙한 듯 낯선 그의 호의에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 같아 고개를 다시 숙였습니다. 애써 정리해준 머리가 앞으로 쏠리며 제 얼굴을 가려주었죠. 다니엘이 다시 머리를 정리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상체를 숙여 저와 눈을 마주쳤죠. 뭔가... 뭔가 대단히 창피한 것 같은데, 지금...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니엘이 툴툴 거리며 말했습니다.
"케이크나 생일 노래는 안 바라니까, 누나 얼굴 좀 보여줘. 생일 핑계로 누나 얼굴 보러 온 거란 말이야."
"마, 맘껏 봐!"
머리가 창피하다고 해서 입이 제멋대로 지껄일 필요는 없는데... 제 신체들은 합이 정말 안 맞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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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이 집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다행히도 더는 놀리지 않더라고요. 다니엘과 헤어지고 집에 들어온지도 한참이나 지났는데 심장이 요동치는 것 같습니다. 계속 머릿속에 다니엘이 둥둥 떠다니고 전에 있던 일까지 겹쳐지는데... 막 없던 벚꽃잎도 휘날리는 것 같고... 아... 다니엘이랑 벚꽃놀이가고 싶다. 어머 세상에. 의식의 흐름이... 온전치 못하네요. 발 닦고 잠이나 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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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에 작은 빵집에 들렸습니다. 문이 열려있어서 다행이네요. 다니엘 생일이니까... 작은 조각 케이크라도... 아니, 왜 다니엘이란 이름 세 글자에 심장이 요동치고 난리죠?! 아... 심장 아파. 분명 어제 잠들기 직전까지만 해도 술 때문에 심장이 비이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 했는데 개뿔. 술 때문에 그런 건 아니라는 확신이 서네요. 케이크가 진열되어 있는 곳 앞에 서서 천천히 보았습니다. 단 거 자주 먹으니까 초코케이크로 하면 되겠죠? 초코케이크로 주문을 하고 포장된 조각케이크를 들고 나왔습니다. 분명 날이 추운데, 마음은... 따뜻한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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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하자마자 다니엘 연구실을 찾아갔습니다. 앞에 서서 이렇게 망설이긴 처음이네요. 맨날 일적으로만 들락거리던 곳이라 사적으로 간다는 게 이렇게 민망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똑똑- 용기를 내서 문을 두들겼습니다. 들어오란 다니엘의 목소리에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갔죠. 막 연구원 가운을 입은 다니엘이 눈에 띄게 놀라며 물었습니다.
"엥? 무슨 일이십니까?"
"아... 그게... 이, 이거 먹어."
후다닥 들어가서 책상 위에 조각케이크를 두고 나왔습니다. 문을 닫고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심장을 다독였죠. 그러나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에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단지 놀라서예요!
"깜짝이야."
더 놀랍게도 다니엘이 양옆을 살피더니 제 손목을 살짝 잡고는 그대로 끌었습니다. 얼결에 다니엘 연구실에 다시 들어왔네요...? 문을 닫은 다니엘이 박수까지 치며 소리 내서 웃습니다. 왜 또 부끄러움은 제 몫이죠...?
"웃어라, 웃어... 나 갈 거야..."
"아니 뭔 고맙다는 인사도 안 듣고 그냥 가. 고마워, 누나."
"...생일, 축하하고."
"최고의 생일 선물이네."
웃는 게 저렇게 멋질 수가 있네요. 뭐, 고개만 대충 끄덕이고 다니엘을 지나쳐 나왔습니다. 아... 큰일이네요. 비즈니스는 사적으로 처리하면 안되는데, 자꾸 사적으로 만나고 싶어지면 어쩌죠...
***
이게 뭐냐고요? 하루 지난 다니엘의 생일 기념이죠 뭐!
사실 어제 썼는데 제가 깜빡 잠드는 바람에...
헤헤헤헿ㅅ
아니 근데 요즘 우리 강단이 막 남자다워서 어쩌죠?
분명 멍뭉미 가득한데 그 안에서의 단단함이 느껴지는 강단이는 사랑입니다ㅠㅠㅠㅠㅠ
자랑스러운 우리 강단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