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또라이
글 ; 노랑의자
"야 김짼.."
"왜."
"나 완전 의욕 상실이다."
김재환을 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불리던 별명이라던데, 어감이 귀여워서 나도 그렇게 부를래! 했더니 맘대로 하란다. 아무튼, 김짼에게 어제 황민현에게 대차게 거절당한 이야기를 하소연하듯 털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게, 뭔가 의아한 부분이 있나 보다.
"걔 원래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 못하는데.."
"..내가 진짜 싫은가봐.."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쟤 싫어하는 사람한테 관심 전혀 없음. 니 이름 안다며."
"응.."
속상한 마음에 오늘도 멋진 뒷모습을 보여주는 황민현을 보며 입을 삐죽댔다. 이쯤되면 내가 그 날에 내 이름을 잘못 들었나 싶다. 설마 내가 너무너무 듣고 싶어서 상상 속에서 들었던 건가. 환청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풀지 못하고 혼자 점점 표정이 심각해지자 핸드폰을 두드리던 김재환이 나를 툭 친다.
"야. 너 지금 얼굴 완전 망했어."
"넌 원래 망함."
"인정."
근본없는 드립에 결국 피식 웃음이 나왔다. 쓸데없이 수긍만 빨라가지고, 김짼도 은근 개그캐다. 별 것도 아닌데 웃는 나도 웃음장벽이 거의 지하 1층 급인 것 같다. 그러던 중, 언제 시간이 다 되었는지 1교시 과목인 국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서둘러 교과서를 꺼내고, 필기를 할 공책까지 꺼냈다.
"다들 숙제 해왔지? 수업 끝나고 걷는다."
국어 선생님의 말씀에, 옆에서 헐 미친. 이라는 작은 아우성이 들려온다. 그 소리의 근원은 김재환이었다. 가방을 열심히 뒤적거리는 게, 아무래도 숙제를 놓고 왔다 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벌써 판서를 시작하신 선생님을 따라 나도 얼른 필기하기 시작했다.
"야. 짝꿍.."
"나 바빠."
"아는데.. 숙제만 좀 보여주라.."
그럴 줄 알았다. 바쁘던 손을 잠깐 멈추고 내가 왜? 하는 표정으로 김재환을 바라보자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짓는게 꽤 볼만했다. 수업 중이라 소곤거리는 게 신경쓰여 공책을 살짝 찢어 글로 썼다. 세상에 공짜 없다. 내 쪽지를 본 김재환이 재빠르게 답을 써서 건넨다. 로아커 초코렛 어때.
"받고 우유."
"..오케 콜."
김재환은 독한 놈..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숙제를 넘겨주었다. 아싸, 개이득. 공짜 초콜릿과 우유에 절로 어깨춤을 추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았더니,
나와 눈이 마주친 황민현이 다시 슥 고개를 돌린다. 헐 뭐지. 내 목소리가 너무 컸나. 그와중에 또 겁나 잘생겨서 수업 중에 심쿵사 할 뻔 했다. 어떻게 뒷통수까지 동그랗고 예쁜지 모르겠다. 대체 부족한 게 뭐냐..
한동안 황민현의 완벽한 뒷태를 감상하다, 어느새 칠판을 꽉 채운 필기에 식겁하며 볼펜을 들었다. 아, 손 아프겠다...
#
국어시간이 끝나고, 김재환과 매점에 갔다가 교실로 향했다. 양 손에는 우유와 초코렛을 들고. 나는 정당한 대가를 받은 것일 뿐인데, 김재환은 그래도 못마땅한지 계속 툭툭 시비를 털어 댔다.
"먹고 살쪄라."
"아무리 쪄도 니 볼만큼은 안될 것 같아."
"누가보면 너는 볼살 하나도 없는 줄 알겠다."
"너에 비하면 기아지 기아."
"아오 성이름!"
김재환을 한껏 놀리고 교실로 얼른 도망치려 했는데, 어느새 내 옆에 바짝 와 있다. 중학교 때 축구부였다는 게 허언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아무튼 경보를 하듯 우리는 교실 앞문에 나란히 도착했다.
"좋은 말 할때 비켜라."
"어쭈. 명령하는거야?"
"너 내 숙제 베낀거 선생님께 말씀드리,"
"먼저 들어가십쇼 형님."
그래 그거지. 흡족한 표정으로 교실에 들어섰다. 들어가자마자 습관적으로 황민현 자리를 쳐다보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볼펜을 툭 떨어트린다. 갑자기 왜 저러지, 했는데 자신도 당황스러운 듯 허둥대며 볼펜을 줍는다. 뭔가 훔쳐보다 걸린 사람 같았는데.. 볼펜을 줍고 나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길래 나도 자리로 가서 앉았다. 슬쩍 황민현을 쳐다보니 귀가 빨개져 있었다. 응? 귀가 빨갛다?
"야야. 김짼."
"왜."
"너 부끄러우면 귀 빨개져?"
"당근이지. 남자들 거의 다 그럼."
그럼 황민현이 지금, 부끄러워 하고 있는 건가?
#
길고 긴 야자시간이 드디어 끝이 났다. 밤 열한 시. 말도 안 되는 시간이다. 작년이라면 벌써 씻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하며 낄낄대고 있을 시간인데. 몸도 머리도 지쳐 축 처진 상태로 느릿느릿 짐을 쌌다. 그러다 문득 황민현과 같이 갈 수 있을까 싶어 앞자리를 쳐다봤지만, 이미 빈 자리였다. 빠르기도 해라.. 아쉬운 마음에 입맛만 다셨다.
김재환도 먼저 가고, 빨리가서 뭐 좋을 거 있나 싶어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신발을 갈아신는데, 현관에 누군가가 서 있다. 좀 멀긴 한데 나의 레이더망이 저건 황민현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핸드폰 화면을 보는 가 싶더니, 이내 현관을 나선다. 나는 놓칠세라 얼른 뛰어나갔다.
"안녕!"
"..."
질러놓고 또 후회했다. 첫 인사가 안녕이라니. 방금까지 같은 반에 있었는데. 왜 난 항상 처음이 이 모양인거야.. 속으로 자책과 좌절을 하며 다시 정신을 부여잡았다. 학생도 별로 없겠다, 가는 길도 같겠다, 용기가 불쑥 솟았다.
"집에 같이..갈래?"
패기넘치게 집에 같이 가자! 라고 하려고 했으나, 어제의 그 칼같은 거부가 다시 떠올라 갈래? 하는 소심한 물음으로 바뀌어버렸다. 나를 한번 바라본 황민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싫다고는 안 했으니까 같이 가도 된다는 거겠지? 혼자 내린 결론이지만, 표정을 힐끗 살펴보니 나쁘지 않은 게 같이 걸어도 될 듯 했다.
"너가 이사와서 깜짝 놀랐다?"
"..."
"동네에 우리 학교 학생 진짜 없거든. 엄청 반가웠어."
밤이라 어딘가에서 자신감이 생겨났는지, 어색한 침묵이 싫었는지, 나는 이것저것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만 그랬을 지 모르지만, 의외로 어색하거나 불편한 기분은 아니었다. 게다가 매일 혼자 걷던 길을 함께 걸으니, 뭔가 든든했다.
"그리고 집 가는 길 밤에 되게 어둡거든. 이렇게 생겨가지고 겁은 많아서 엄청 서둘러서 갔었어."
"..."
"아, 너 김재환이랑 어릴 때부터 친했다며?"
"..어."
헐. 대답했다. 방금까진 잘생긴 벽과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는데, 드디어 들려온 대답에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 무겁던 가방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볍게 느껴졌고, 하루종일 공부하느라 지친 몸에도 다시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나도 중증이다 중증.
"김재환 엄청 이상한 드립 많이 치잖아. 완전 근본없이 웃기지 않아?"
"..."
"하긴, 너는 오랫동안 친구여서 별로 감흥도 없겠다. 난 얼마 안 되서 그런가, 진짜 웃기더라."
"... 안 추워?"
황민현과 나의 공통점은 김재환의 친구라는 점 밖에 없었기 때문에, 대화를 이어나가려 김재환 이야기를 막 했다. 조금 오버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조용히 듣기만 하던 황민현이 갑자기 춥지 않냐고 물어왔다. 처음 듣는 다정한 목소리에 심쿵한 마음을 잘 숨기지 못해 엄청 더듬댔다. 아,아, 응! 괜찮아. 하고. 잠깐 민망하다가도, 나를 걱정해준건가 하는 생각에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댔다. 얼굴 빨개진 것 같은데. 티 나려나?
몇 마디 말도 하지 못했는데, 벌써 아파트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있길 바랬건만, 하늘도 무심하셔라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1이라는 숫자를 선명하게 띄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나란히 서있는 황민현을 힐끔힐끔 훔쳐보다 아까 김재환이 해준 말이 떠올라 그대로 입 밖에 내버렸다.
"김재환이 너 초등학교 때부터 인기 많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당연히 그랬겠지,라고 생각했.."
"..."
세상에. 나 지금 뭐라고 말한거지. 정말 필터링 없이 나온 순수 그 자체의 내 생각이다. 이정도면 거의 간접고백 수준 아닌가? 나만큼 황민현도 당황한 듯 싶었다. 말을 멈춘 나와 마주친 눈이 지진난 듯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 진짜 망했다.
"..."
"..갈게."
입도 다물지 못하고 굳어버린 나를 잠깐 바라보던 황민현은, 갈게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나 이제 황민현 어떻게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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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노랑의자입니다 ♡
저번화에 민현이의 싫어 한마디에 다들 상처를 많이 받으신 것 같..
죄송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상처받지말아요
그리고 재환이도 반응이 좋네요?!
민현이 부분을 더 열심히 쓰는데..ㅋㅋㅋㅋㅋ 하긴 짼이면...말 다했죠
저번 화에도 댓글 달아주시고, 추천 눌러주시고, 신알신 해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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