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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의 시절 의자에 앉아 방관했던 허수아비 임금, 황민현의 그림자, 뼈가 없는 무골의 임금이라. 그것은 모두 지금의 왕인 어렸을 적 지훈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몸이 약해 책 하나 들 때도 기울어졌던 몸이었기에 지훈은 들려오는 억울한 조롱에 은근히 가슴을 쥐었다.
타 신관에게 정사를 의탁할 수 밖에 없었던 탓이었을까, 어린 지훈은 늘 구석진 곳에서 누워 골방지기가 되어 더욱 허약해졌다.
다행히 커 갈 수록 사람을 꿰는 음색과 그리고 심성을 꿰뚫는 서릿발 같은 말솜씨가 강해지는데 그 탓일까, 나라가 빈약해진 틈을 타 한자리 꿰차고자 했던 탐관오리들도 그의 날카로운 심문에 그 염소같은 등을 기울이며 벌벌거렸다. 덕택에 지훈이 누각에 산책이라도 나올라 치면 다들 그림자 조차 밟지 못하고 멀찍이 보행했다.
"그래도 우리 전하는 챔으로 어지신 분이제."
누군가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자신 몸이 반쪽으로 할반 될 것을 두려워한 탓일까. 백성들은 지훈을 커갈수록 어린 나이에 고만하면 선정 하였다 평가했다. 나라의 제세안민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뒤집어 파보면 황민현의 탓이오, 하는 사람은 희한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그 사람의 지나치게 야무지고 이중적인 성정에 칼부림 날 것을 두려워한 당연한 결과였던 것인지.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지훈은 그 끈적한 음성으로 나직이 말한다. 그 기분좋은 나른함은 마치 지붕 위에 올라 간 무례함을 너그러이 용서해 줄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달콤함은 지레 겁 먹은 재환에게 소용이 없었던지 그는 꽤 오랫동안 지붕을 내려다봤다. 여기서 떨어지면 아무리 생각해도 다칠 것 같다. 그도 그렇듯이 모든 관리가 점으로 보일만큼 아득한 높이였으니. 아찔한 장면을 뒤로 날리려는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사이 지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관리에게 명령했다.
"저 아이가 무사히 내려 올 수 있도록 사다리를 내어주거라."
나를 용서해주려는 것인가. 저를 침입자 취급하지 않고 부드럽게 옭아매는 저의는 무엇인지 궁금함이 도진다. 그러나 워낙 사람을 잘 믿는 재환의 성격은 금방 의심의 실마리를 내려놓았다. 일단 내려가야 승부수를 띄울 수 있었기에. 망설이는 사이 관리 한 명이 사다리를 갖다준다. 16미터나 되는 사다리가 제 앞에 놓였다. 등반할 때는 몰랐는데 내리막을 보니 그 높이가 아찔하다. 재환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상태로 조심스럽게 사다리에 발을 뗐다. 한 계단 발을 디딜때마다 오래된 탓인지 삐걱거리는 소리가 귀에 나직이 울렸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저에게 쏠린다.
"됐다. 관리들은 모두 양쪽으로 물러서고 사다리를 도끼로 내려 찍거라!!"
"예? 저 아직 안내려갔는데요? 갑자기 이러시면...."
순간이었다. 그 차가운 음성에 즉시 응답한 관리들은 사다리를 마구 찍어대기 시작했다. 워낙 오래된 탓인지, 사다리는 바싹 저항하지 못하고 앞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쩌적- 하는 귀를 갉는 소리와 함께 땅이 가까워진다. 재환은 괴성을 지르며 코를 땅에 박았다.
"아아아아악!!! 아야!"
"하하하하하...."
왕은 그 모습을 보고 한바탕 높게 고소를 뿜었다. 군사들과 그 차갑다는 배진영마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그 웃음을 조그맣게 뒤따랐다. 참으로 악마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이중행동이었다. 지훈의 비단신이 흙을 긁는 소리를 내며 제 앞까지 다가왔다. 온 다리와 손발을 도사리며 벌벌 떨던 재환의 턱이 작은 손에 의해 휙 들려져 볼이 꾹 눌린다. 처음이었을 것이다. 사람을 워낙 잘 따랐던 재환은 난생 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그 화려하게 검은 눈, 뚜렷한 콧대에 염낭주머니 같은 입술과 더불어 어지러이 널린 용의 몸에 정신을 압도당하고 말았다. 퍼뜩 든 정신이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원망했다.
"누가 보냈느냐? 바른대로 말하거라."
"라...라..."
"라?"
고개를 갸웃대며 지훈이 되물었다. 똑바로 말해라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기 전에.
"라이관린."
라이관린이라. 그 한마디에 도성 안에 있는 수십명의 관리들이 모두 웅성거린다. 그 혼란스러움은 곧 물꼬를 틀고 지훈에게까지 당도한다. 그 이름은 지훈에겐 금기시 되는 이름인제, 미간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곧 그는 재환의 얼굴을 강하게 패대기치며 씩씩거렸다. 억!--순식간에 추락한 재환의 머리가 악성을 지르며 떨어졌다. 한 줄기 동정어린 탄식이 끼얹어지지만 지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몸이 경련한다. 이미 다쳐 망가져 버린 몸에서는 신음으로 원망할 기운조차 없었다. 파리하게 떨리던 손발이 차갑게 굳고, 치례를 모르는 입에서 침이 줄줄 새었다.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진즉 의식을 잃어갈때쯤 민현은 웅성거리는 무리를 헤쳐 나와 땅에 엎드렸다.
"신관 황민현. 폐하께 주청 드리나이다."
"이 자의 말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더 들을 것 없다. 옷도 몰래 빼내온 것이더구나. 침입자인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허나....!"
이대로 두면 영영 저 자를 세자로 앉힐 수 없다. 이미 신탁에서 저 자를 세자로 앉히라고 나온 즉시 그것은 사명이 되었다. 지금 못한다면 나라의 안위를 책임지지 못할 것, 무너져선 안된다. 민현은 입술을 물었다.
"반드시 저 자의 말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저 자의 말을 듣고 그름이 있다면 저의 목을 치셔도 좋습니다."
"...어차피 네가 할 말은 뻔하지 않느냐."
"제 명예와 직분을 내려놓고 간청 드리옵니다."
"....."
"전하."
"좋다. 이 놈의 정신이 든다면 네 놈과 함께 들어오거라. 얼마나 우스운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듣자꾸나."
지훈은 그 무거운 곤룡포를 끌고 뒤를 돌았다. 그 무거운 걸음에 얼마나 많은 짐이 있을지. 저 고고한 왕을 설득할 생각에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어쨌든 그나마 다행인 것이 아닌가. 답을 얻어낸 민현은 그대로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금 머리를 땅에 박았다. 뒷마무리는 언제나 그의 성은에 감사해야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신탁이 그렇게 말했나이다."
개미새끼 한 마리 없는 조용한 편전 안, 단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지훈은 짜증난다는 듯이 이마를 꾹 누르며 문질렀다. 왜 또 신탁은 이리 내 발목을 붙잡는단 말인가. 언제까지 나라의 권위가, 나의 권위는 그 놈의 허울좋은 신에게 붙잡혀 살아야 하는 것인지. 그 완벽하고 빈틈없는 신에게 자존심이 깎인지 어언 10년이 지났으면 이쯤되면 나를 가여이 여겨 내 말 한마디 들어줄 법 하지 않은가. 지훈이 다시 입을 연다.
"그 입을 다물라."
"천선녀가 그렇게 말하였사옵니다. 이 나라의 주인이...!"
"그 요망한 입을 닥치지 못하겠느냐!!!"
감히 내 앞에서 천선녀를 들먹여! 그는 사람이 점지한 운명이란 것에 치를 떠는 인간이었다. 지훈의 꽉 쥔 두 주먹이 무릎 위에서 사정없이 경련하고 있었다. 그 놈의 운명, 운명! 그 신이 정해준 운명때문에 얼마나 그른 선택을 했던지. 더 이상은 안된다. 지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짜 세자로 들인다면 분명히 타도 세력들에 의해 아이가 위험해질 것이다. 끊임없이 암살을 시도하겠지. 이것이 지훈이 주장하는 가짜세자를 반대하는 이유였다.
"어차피 3년이옵니다. 3년만 아이가 역할을 제대로 해준다면"
"우진 세자저하의 누명을 풀어 제대로 왕위를 승계할 수 있습니다."
"그 3년동안 생사를 위협받을 무고한 아이는 걱정되지 않고?"
"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네 개의 눈이 동시에 소리의 근원지로 돌아간다. 붕대를 다리에 감은 재환이 제 몸을 끌고 일어난다. 자신을 5일동안 광에 가두었던 남자와, 저의 몸을 망친 남자가 모두 저를 쳐다본다. 마치, 그 입을 잘못 놀렸다간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재환은 생각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이지. 평범하게 하성운보다 한 가지만 더 잘해서 무시받지 않고자 했던 삶인데. 그것이 그렇게 과한 욕심이었던 것일까. 부모님께 인정받아 사랑받고자 했던 요구가 지나쳐서 나에게 벌을 준 것일까. 형과 부모님을 걱정시킨 죄의 벌치곤 너무하잖아. 재환은 그대로 빨간 융단이 깔린 곳에 납작 몸을 엎드렸다. 사실 기운이 없어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 더 적당한 표현일터, 입을 떼자마자 재환은 저도 모르게 억울함을 담은 눈물을 주르르 토해냈다.
"저, 저는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
"저를 여기서 내보내 주십시오."
"제발, 진짜 제발요...."
눈에서 도르륵 흘러내린 눈물이 턱을 타고 군복을 적셨다. 입을 꾹 물었다. 정말, 정말 여기서 나가고 싶습니다. 아니 평생 하성운보다 무시받는 삶이어도 좋으니, 엄마의 따뜻한 품 속과 아빠의 품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재환은 간절히 소망했다. 끅, 끅- 잇새로 울음을 짧게 끊는 소리가 편전을 나직이 적시었다. 지훈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척박한 분위기를 적시는 강한 울음소리에 이번엔 지훈이 도리어 압도당한다. 어디에서 온 누구길래 이리 강하게 이끌린단 말인가... 정말 나라를 구할 영웅의 기운은 신이 점지한 것인가. 지훈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그럴리가 없어. 제 자존심이 재환에 대한 인정을 저지했다. 마음이 한 층 누그러진 지훈이 다시 한 번 민현에게 말했다.
"아이의 목숨이 불쌍하지 않은가. 평범하게 살도록 돈을 조금 내어보내주면 되지 않겠는가."
"그것은 아니되옵니다. 지금 저 썩은 관료들이 하루 빨리 세자를 앉히라고 난리를 피우지 않습니까."
"......"
"지금 가짜로 연극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전하를 뒤이을 왕이 저들 무리 차지가 될 것입니다."
"박씨 황실의 명맥은 이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지훈은 고민했다. 남을 희생시켜 제 이득을 취하는 것이 제 성정에 안맞는 일이지만, 지금껏 민현의 미래를 보는 눈이 틀린 적이 없어 더 고뇌할 수 밖에 없었다. 왜 하필 이 시기에 이계의 사람이 떨어진 것인가. 한 팔이 기울면, 모든 중심도 무너질 터 하루빨리 세자를 앉혀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지훈은 마침내 재환쪽으로 걸음을 옮겨 그를 몸소 일으키고 민현을 돌아보았다.
"이 자를 세자로 올리도록 공표하겠다"
"진영이에게는 내가 따로 말하겠다. 신경써서 아이가 기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거라."
"전하."
"대신, 이 아이가 힘들다 하면 언제든 이 궐 안에서 도망칠 수 있도록 사람을 붙여주거라."
"그것은...."
"여기가 내가 최대한으로 기회를 준 것이다. 물러가거라"
지훈은 다시 단좌 쪽으로 걸어가 사뿐이 허리를 눌렀다. 피곤하다는 듯이 얼굴을 눌러 마른세수를 수십 번 반복했다. 민현은 재환에게 팔을 걸어 그를 끌어올렸다. 울다 지쳐 시진한 재환이 눈을 가늘게 뜨며 알 수 없는 말을 조용히 중얼댔다. 그것은 마치 기운 빠진 참새가 죽기 직전 내지르는 비명 같았다. 안쓰러운 마음에 혀를 쯧쯧 찼다. 어린 것이 무슨 죄라고. 아이의 당연한 소원을 결국 나라의 안위라는 명목을 내세워 들어주지 못한 제 욕심이 못내 미안했다. 나도 참 천벌받을 왕이로군. 지훈이 아프게 웃었다.
"아참, 그나저나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가 달여준 탕약이 기력 보충하는 데는 좋더구나."
"...."
"솔직히 말하면 여전히 가끔 피는 토한다."
지훈이 쓰게 웃었다. 제 지병을 살뜰히 돌보는 황민현의 눈빛이 고맙기는 커녕 이제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제가 나을 거라고 확신하는 저 당당히 고하는 눈빛이 늘 부러웠다. 아마 저는 건강하니까 제가 나을 수 있을거라 긍정적인 답변을 하는 것이겠지. 건강한 신체에 여유로운 마음, 그것은 지훈이 늘 갖고자 동경했던 것이었다. 부럽구나 네놈이... 지훈의 몸에 피곤함이 깃든다. 그대로 세상에 찌든 미색의 눈꺼풀이 감기며 검은 휘장이 드리운다. 민현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재환을 들쳐업었다.
***
"드디어 눈 떴네. 형! 지성이 형! 이 사람 눈 떴어요!"
아 시발. 말할거면 좀 조용히 말하든가. 머리가 지끈 거려 아픈 상체를 겨우겨우 이불 안에서 끌어올렸다. 그러자, 백색의 비단옷을 입은 남자가 황급히 성운의 가슴을 두손으로 꾹 눌렀다.
"억!!"
"아, 미안해요. 난 일어나지 말라는 뜻에서...."
"아이씨, 왜 가슴 눌러요 그럼! 아 그냥 말로 하지!"
성운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와다다다 내뱉자, 머리를 길게 틀어 올려 묶은 소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의 이름은 대휘. 성운의 밑에서 장사를 배우며 승승장구 하고 있다. 그는 타고난 달변가의 솜씨로 물건을 재빠르게 팔아치우는 장사꾼이다. 또한 정세나 경제를 읽는 눈도 제법 좋아 지성이 귀애하기도 하는 아이였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 줄도 모르고 이게? 대휘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시골집에서나 나올법한 장지문을 소리가 나게 벌컥 열었다. 지성이 형님!!
"일어났다고?"
앵두나무 위의 봉황의 자수가 올려진 황색 화려한 중국식 의복을 꽤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 수려한 기백을 가진 남자가 문지방을 사뿐 넘어섰다. 이윽고 누리끼리한 방지에 엉덩이를 털썩 붙인 남자가 성운의 이마에 손을 갖다대었다. 열을 재려는 듯 했다.
"저 열 안나는데요."
"뭐래, 아깐 열 났었어."
다정스레 핀잔을 준 남자가 다시 여러색깔의 꽃이불을 성운의 목 부근까지 끌어올리며 말했다.
"먹을 것 좀 해드릴까? 뭐 좋아해?"
남자의 물음에 성운이 골똘히 생각하다 말했다.
"해물 봉골레 파스타와 퐁듀....?"
"뭐어어?"
"...농입니다. 주시는 대로 잘 먹겠습니다."
지성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문지방을 나섰다. 윤지성. 천선국의 거대 상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금오단(今午團)상인 중 한명이었다. 그들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 나라의 특산품을 싸게 매수하여 백성들에게 꽤 짭짤한 값을 팔아넘기는 것으로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그 중 지성은 금오단 상인 중 우두머리를 맡고 있는 자로써 그의 나이 20대 때 재력과 부귀로 유명세를 날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항간에 나라를 쓸 정도의 재력이었다했으니. 그는 사람을 긴장을 늦추고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일품이요, 물건을 사게 하는 그 유려한 말솜씨는 이품이라 했다. 그리하여 이보다 더 완벽한 장사꾼은 없다고 상인들 사이에 정평이 나 있었다. 지성은 만면에 웃음을 떨어뜨리며 안주상에 막걸리와 돼지 머리를 듬성듬성 썰어넣은 국밥을 가져왔다.
"드시게"
"신세를 져서 감사합니다. 먹어도 됩니까?"
"그러엄. 아 어서 먹어."
성운은 앞 뒤 체면을 차릴 틈도 없이 숟가락에 밥을 듬뿍 퍼서 입안으로 들이밀었다. 뱃속에 거지가 들린 듯 게걸스럽게도 들어간다. 재환과 다르게 평소에 인간에 대한 경계가 삼엄한 성운이였으나, 그 엄청난 공복에는 그도 어쩔 수 없었는지 남자의 신원을 캐는 것은 뒷전으로 미룬 듯 했다. 지성은 다시 물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하성...컥, 아니, 하성운입니다."
"난 지성이라고 하네. 아, 천천히 먹어. 술도 한 잔 드시게."
난 미자인데...성운은 앞으로 내밀어지는 그윽한 막걸리 향기에 자신도 모르게 잔을 받았다. 지성은 만족스레 그런 성운을 보다가 봇짐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성운이 차마 덜 삼킨 돼짓고기와 밥을 입에 넣고 말했다.
"어디로 가시는 겝니까?"
"우리는 궁으로 가는 길이네."
"저!!!"
성운이 다급히 외쳤다. 궁? 재환이가 있을지도 모르는 그 궁으로 이 사람들이 간다고? 갑자기 기운이 돋는다. 이 사람들이 도적떼이든, 자객이든, 그런 건 성운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궁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가서 재환이를 이끌고 원래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내 할 일은 이미 다했네."
지성은 갓을 쓰고 끈을 묶은 다음 성운의 앞에 돈다발이 두둑히 든 주머니를 내놓았다. 이걸 받고 그만 꺼지라는 뜻이다.
"눈을 떴으니 이만 나는 가보겠네. 초가집은 주인이 모호한 곳이니 다친 곳이 나을때까지 잠깐 머물렀다 가도 될 것이야."
"같이 가요."
"에잉, 이 자가 왜이리 고집을 부리는가."
"야, 우리 바쁜 몸이야!"
대휘가 성운을 보며 툴툴 거린다. 아마 방금 자신에게 짜증낸 복수라도 하듯이 혀를 쭉 내밀었다. 에이씨, 성운은 차마 성하지도 않은 몸으로 주섬주섬 교복 조끼에 몸을 끼웠다. 아는 사람도 없고, 궁 안의 동태도 모르는데 어떻게 혼자 다닐 수 있겠는가. 뻔뻔한 낯가죽이라 저에게 욕을 하여도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뭐든 따라가서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인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야 한다. 말의 안장을 손수건으로 손질하던 지성은 다리를 절뚝거리는 제 앞까지 걸어온 성운을 보고 독하다며 혀를 쯧쯧 찼다. 대단한 고집이로세.
"저를 궁으로 데려다 주십시오. 사례는 뭐든 하겠습니다. 저 청소도, 요리도 다 잘합니다."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근본도 모르는 놈을 내 어떻게 받겠느냔 말일세."
"저 장사도 잘합니다. 파시는 물건의 이득을 모두 드리겠습니다."
장사도 잘한단 감언에 말을 탄 지성의 혹한 고갯짓이 돌아간다. 내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성운은 커다란 검은색 백팩의 지퍼를 열고 페레로xx 초콜릿을 꺼냈다. 성운은 초콜릿을 매우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제가 우울할 때 위로제가 되주곤 했던 단것들을 잔뜩 챙겨왔다. 에라, 모르겠다. 성운은 이 작은 것들을 도박의 일환으로 사용하기로 결심한다. 성운의 눈이 번뜩인다. 그는 포장지를 쥐고 손바닥에 여러 별모양이나 동그란 초콜릿들을 흩뿌렸다. 이것들은 저희 나라에서 아주 값비싸게 호가되고 있습니다. 마른 침이 넘어간다. 제가 비열한 협잡꾼이란 생각에 양심은 찔리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지성의 눈이 돌아간다. 상인은 상인인지라 계리에 환장하여 특수한 물건을 매우 좋아할 수밖에. 지성은 말에서 내려 성운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인다. 그리곤 손바닥의 그것을 꼼꼼히 살폈다. 확실히 처음보는 향과 생김새였다. 뭐 그리고 일단 다른 나라에서 온 것이면 비싸게 팔릴 것이 아닌가. 돈을 벌 궁리에 행복의 회로가 빠르게 돌아간다.
"초콜릿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초콜릿은 사람의 기분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아휴..."
"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말솜씨가 좋아 사람을 속이기도 잘하고 사람을 혀로 홀리는 것도 잘하옵니다."
이렇게 말이죠.
성운은 뒷말을 삼켰다. 지성은 귀찮다는 듯이 말로 돌아가 제 뒤를 내주겠단 뜻이 말의 앞쪽으로 탔다. 성운은 허리를 꾸벅 숙이며 다시 가방 지퍼를 닫고 성치 않은 몸으로 달려갔다. 안장에 앉아 지성의 허리를 두 팔로 감아 안자, 모험의 개시를 알리는 채찍질이 한바탕 크게 벌어진다. 이랴! 말은 큰 허릿짓을 공중으로 쏘아붙인 뒤 마구 뒷발을 굴렸다. 두 개의 인마가 힘껏 공중으로 향해 달려갔다. 하지로 흐르는 시냇물과 조약돌, 사시사철 기립해 있는 대나무들이 절경인 산 속이었다. 이 곳이 원래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던가. 나뭇잎 사이로 따스한 햇발을 쪼이며 성운은 생각한다. 여유의 눈을 뜨고 보니까 참 아름다운 곳이었군. 그들은 원래 일행이었던 것처럼 한 몸이 되어 바람을 가르며 대나무 숲을 가로질렀다. 양옆으로 길을 벌린 대나무가 바람에 나부끼며 경례를 건네듯 앞으로 쏠렸다. 지성이 말의 볼기를 찰싹 때리자, 말은 더더욱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성운은 빠른 속력에 지성과 몸을 낮게 숙였다.
"거 좀 천천히 가십시오!"
"거 약골이로군 그래."
"궁으론 지금 가십니까?"
"아니, 자네 데리곤 안가네.
"예에에에에?"
성운은 깜짝 놀라 말에서 살짝 미끄러져 말의 몸통 옆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런 약속은 없었다니, 잘도 날 속였네 이 인간. 분노에 시린 이가 뿌득뿌득 갈린다. 지성은 깜짝 놀라 성운을 등허리를 팔로 감아 다시 말 안장 위로 들쳐 올렸다.
"거 자네, 좀 조심하게!
"이씨잉...."
"자네 몸이 성해지면, 값싸게 거래를 할것이네."
"아니, 전 궁만 데려다 주시면...."
"그럴 일 없다니까."
"아니, 얘기한 거랑 다르잖아요!! 이봐, 형씨!"
성운은 당황스러움에 본래 말투가 휙 튀어나온다. 지성은 못 들은 체 다시 고삐를 다부지게 쥐어 공중으로 한 번 흔들었다. 속력을 올릴것이네. 꽉 붙들게.
"야, 이샛갸아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