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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페이스북에서 발렌타인데이가 다가온다고 떠들어대길래 한 번도 신경 안 쓰던 발렌타인데이였는데 왜 유난히 올해 14일은 신경 쓰이는 건지.
14일 아침 일찍부터 초콜릿과 쿠키를 만들 장을 보면서도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집에 돌아와 도구를 꺼내고 초콜릿을 중탕하고 생크림을 넣어 휘휘 저으면서도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틀에 넣은 초콜릿을 냉장고에 넣어 굳히는 동안 쿠키반죽을 하면서도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루한이 형이 좋아하는 견과류 쿠키도 다 만들고, 냉장고에서 꺼낸 초콜릿을 잘라 코코아가루와 녹차가루로 입혀 파베 초콜릿을 완성하고 포장지에 예쁘게 싸면서도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쿠키와 초콜릿 완성품을 앞에 두고 앉아 내가 왜 이 짓을 한 건지.

일단 일은 저질렀고 모든 게 준비되었다. 루한이 형한텐 줘야 한다. 반드시. 
그런데... 뭐라고 하면서 건네줘야 하는 거야...
형 이거 형을 위해 만들..
형 오늘 발렌타인데이라서 준비 했...
이렇게 말하면 안 봐도 뻔하잖아! 니가 왜!!! 남자 새끼인 니가 왜 나한테 주냐고!!
사실 제가 형을...

그 시간 이후, 김민석이 아슬아슬하게 유지해왔던 관계 게임 셋. 게임 오버. 1년간의 짝사랑 종료. 

하지만 이미 만든 초콜릿인데.. 주긴 줘야겠지! 핑계는 많으니까. 어 루한이 형은 솔로니까 내가 불쌍해서 솜씨 발휘해봤음! 헤헤. 이렇게 넘기면 되겠지. 좋아. 마음을 다 잡고 폰을 켰다. 현재시각은 6시 하고 조금 넘은 시간. 일단 부딪히고 보자는 마음으로 형에게 톡 하나를 보냈다. 



[형, 아직 회사에요?]



1분 후, 아직도 1은 사라지지 않는다.
3분 후, 아직도 1은 사라지지 않는다.
10분 후, 아직도... 아직도 1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야 민석아. 조바심 내면 안돼. 상대는 대기업의 부장이야.. 바쁘겠지 그럼 그럼..

그리고 나는, 2시간을 더 기다린 후 옷을 챙겨 입고 나와. 택시를 타고 루한의 집 앞으로 찾아갔다.
택시에서 내리자 오늘따라 유난히 더 추운 날씨에 몸이 파르르 떨렸다. 나름 따뜻하게 입고 나왔는데도 칼바람이 온몸을 죄여왔다. 으으. 겨울 싫다. 혹시나 형의 연락이 올까 봐 손에 꼭 쥐고 있던 폰을 들어 켜보았지만 카톡방엔 아직도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벌써 10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보이는 집도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리는 듯 컴컴하고 조용했다. 잠깐 집으로 돌아갈까 하고 마음이 들었지만 이건 줘야 하니까. 그러니까... 기다리자! 내가 아는 루한이 형은 외박 안 해!


현재 시각 11시. 대문 앞에 자리를 잡고 털썩 앉아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었다. 혹시 오늘 늦는 게.. 어... 고백을 받았다거나.. 그래서 데이트한다고 늦는 건 아닐까 하고 불현듯 떠오르는 불안한 상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낫다. 그러면 안되는데.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벅벅 닦아냈다. 나도 아침부터 준비했는데..아니 며칠 전부터 계획했는데. 내 망상이 뇌에선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버렸는지 마음이 아릿아릿해져 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닦아내면 흐르고 닦아내면 흐르는 눈물에 그냥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왜 서럽지. 왜 이렇게 서러운 거야. 목 놓아 울고 싶다.

1년 전, 루한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이 났다. 제대하자마자 루한 형의 회사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꽤 유명한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나는, 아침마다 아메리카노와 블루베리 베이글을 포장해 가는 루한을 보고 정확히 말하자면 반했다. 사랑으로 반한 건 아니고, 사람 대 사람으로 부러워서 반했다랄까. 첫째로 저 대기업에 다닌다라는 것에 부러웠고, 둘째로는 잘생긴 외모에 부러웠다. 셋째로는 항상 친절하고 상냥한 태도. 항상 먼저 나에게 밝게 웃어주었다.
아르바이트를 한 달 동안 계속하게 되자 사장님은 나에게 김민석이 새겨진 이름표를 건네 주셨다. 민석이가 일을 야무지게 잘해서 주는거야. 오래 일할 사람만 준다는 그 이름표를 한 달 만에 단 나는 뿌듯했었다. 그걸 또 알아 본 형이 나에게 이름표 달았네, 축하한다며 토닥여주었다.
'이제야 알았네 네 이름. 김민석. 예쁘다.' 블루베리 베이글을 들고 웃는 그에게 그때 반했다. 사랑으로. 남자 대 남자로. 알바를 그만두고 복학을 준비하면서 자주 못볼 것 같았기 때문에 그만두기 하루 전날 용기 내어 형의 번호를 먼저 따 내었다. 형은 거리낌 없이 번호를 찍어 주었고, 형이 먼저 밥이나 술을 사준다며 나를 종종 불러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혼자 보기 민망하다며 같이 보러 가기도 하고, 미술전이나 음악회 같은 곳도 함께 하고. 티비에서 맛집을 발견하면 같이 먹으러 가기도 하면서 우정을 쌓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엔 사랑의 감정이 더 커져만 갔다. 이러면 안되는걸 알면서도. 내 감정은 진짜 사랑이 맞는 건가 헷갈리는 그런 아슬아슬한 관계가 지속되면서 조바심이 났다. 형은 왜 여자친구 안 사귀어? 아직 관심이 없어서? 나의 질문에 항상 그저 웃기만 했던 형. 나에겐 주변 여자 이야기나 연애 얘기는 한 번도 해주지 않았던 형. 형의 취향, 식성은 다 알고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모르고 있으니.. 
그랬던 거 같다. 형이 말해주지 않는 그것이, 내가 모르는 그것에 언젠가 나의 곁을 훌쩍 떠날 수도 있다는 형이 불안했고, 붙잡고 싶었다. 그래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나 형 좋아해요.라고 커밍아웃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성애는 아직 인식이.. 그렇게 되면 친구라는 관계도 끊어질까 봐, 그렇게 되면 내가 정말 살 수 없을까 봐. 그래서 숨겼다. 꽁꽁 숨겼다.
어차피 안될 거 알잖아. 한숨을 쉬었다. 



"민석이?"



형이다. 형 목소리다. 고개를 빼꼼하고 들자 형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달려왔다. 



"흐이익! 차가운것 좀 봐! 얼마나 이러고 있던거야!"



나의 손을 잡은 형의 손이 난로처럼 따뜻했다. 입을 꾹 닫고 시선을 내리자, 형이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나에게 둘러주었다. 형 냄새다.



"일단 들어가자. 민석아. 네 몸 너무 차가워. 큰일 나겠어!"



황급히 대문을 연 형이 내 꽁꽁 언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쇼파에 앉은 나에게 형은 여러개의 두터운 담요를 덮어주고, 따뜻한 허브티를 건넸다. 고마워요 형. 그새 감기에 걸리려는 건지 갈라지는 목소리에 놀랐다. 형도 마찬가지였다.



"몇 시간이나 밖에 있었던 거야! 근처 카페라도 가 잇지!"
"잠깐 형 보고 가려고 했는데..."
"폰은! 폰으로 연락은 왜 안 했어!"
"나 카톡 했는데.."



언성이 높아지는 형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작아졌다. 카톡했다는 나의 말에 형이 자신의 폰을 보더니 아, 하고 짧은 탄식을 했다. 나 데이터 안 켜 놨었네. 미안해.. 그래도 그렇지,



"답이 안 오면 전화라도 하지!"
"바쁠까 봐..."
"바빠도 민석 네 전화는 받을 시간 있어."
"죄송해ㅇ.."



나의 말 끝이 흐려지자 형은 후 하고 한숨을 쉬고 되레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언성 높여서 미안해 민석아. 아니에요 형, 내가 형 신경 쓰이게 했는데.. 애꿎은 머그잔만 만지작거렸다.



"오늘 미팅이 좀 늦게 마쳐서. 다른 지역까지 다녀오느라 늦었어."
"아.."
"많이 기다렸어?"
"아니요! 조금!"



나의 말이 거짓말이란 것은 형은 알고 있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무슨 일 있어? 집 앞까지 찾아오고."



아! 초콜릿! 번뜩하고 생각나, 시간을 보니 다행이다. 아직 11시 50분. 백팩에서 초콜릿과 쿠키를 포장한 봉투를 꺼냈다. 10분 남겨주고 주네요. 오늘 발렌타인데이잖아~ 그래서 만들었어요. 이거 주려고. 봉투를 건네자 두 손 가득 받아 든 형이 놀란 눈으로 나와 봉투를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민석이가 만든 거?"
"네!"
"와... 날 위해서?"
"그럼 그럼~"
"그래서 손이며 발이며 얼굴이며 얼어서 시 퍼레질 때까지 기다렸어?"
"뭐..."
"와."



내 옆에 앉은 형이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었다. 포장지도 예뻐. 망가뜨리면 안돼. 살살 움직이는 형의 손에 웃음이 나왔다. 초콜릿이 담긴 병의 뚜껑을 열어, 작은 조각 하나를 꺼내어 입속으로 넣었다. 맛있다! 형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누가 만든 건데~ 헤헤. 괜히 쑥스러워 허벅지를 살살 긁었다. 한 조각 더 베어 문 형의 입이 오물오물거렸다. 아 이런 기분이구나.
형을 빤히 쳐다보자 내 시선을 느꼈는지 형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뜨끔하고 갑자기 죄지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에 황급히 시선을 옮길 때 형이 두 손으로 내 볼을 감싸 입술을 맞닿았다. 말랑하고 뜨거운 감촉에 온몸에서 갑자기 열이 올라왔다. 쵹ㅡ 하고 떨어지는 입술에 살며시 눈을 뜨자 바로 눈앞에 형의 얼굴이 있었다. 



"사실, 형이 민석이 많이 좋아하고 있었어."
"..."
"1년쯤 됐나? 회사 근처 베이커리에 유니폼 입고 있던 널 보고. 아마 첫눈에 반했을걸."
"..."
"넌 어떻게 생각할지모르고.. 계속 같이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싶고. 그래서 형이 꽁꽁 숨겼거든."
"..."
"널 잃을까 봐. 무서워서."
"..."
"민석이가 형한테 준 초콜릿의 의미."
"..."
"그냥 우정이야? 아니면.."



입을 달싹이며 뒷말을 꺼내지 못하는 형의 모습에 형의 입술에 쪽 하고 뽀뽀했다.



"사랑이에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와 형의 입술이 맞닿았다. 뜨거운 숨이 뒤엉키고 형의 어깨 위로 팔을 감았다. 형의 입에 남아 있는 쌉싸롬한 초콜릿이 내 입안에도 고루 섞였다. 







해피!발렌타인데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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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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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으ㅠㅠ알아가면서 퐁퐁 마음을 키워온 둘의 모습이 너무 예쁘네요ㅠㅠ작가님이 초코보다 더 단 루민을 선물로 주신건가봉가!!!♥♥잘받아갑니다 하뚜하뚜♥♥♥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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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어휴ㅠㅠㅠ 사랑스러운 커플이 탄생했네요 달콤한 커플 이야기 잘 보고갑니다!!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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