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우울한 것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보는 데에 지장 없을 거예요. 이거 노래 제목 아니니 찾지 말으시길 !
내 19년 인생 중, 남자란 한 손으로도 족했다.
아빠, 할아버지, 사촌 오빠, 연예인 도경수.
심지어 맨 마지막 인물은 나에게 있어 2D로, 일방적인 나의 덕심에 불과했다.
여자 중학교를 졸업한 후 남녀 분반인 (그 지역에선 아예 여/남 고를 따로 분리시켜 부른다.) 고등학교를 재학 중이며 2학년 때 까지만 해도 목소리가 굵은 남정네만 보면 괜시리 땀이 날 만큼 남자란 나에게 인접하지 못한 존재였다. 모두들 그런다. 초등학생 때 친구는 남자가 아니냐? 그렇다. 나에게 있어 초등 시절이란 남들과는 조금 달랐다. 거주민들의 숫자를 모두 합쳐 보아도 100을 넘지 못하는 작은 섬에서 태어나 10년을 넘게 살아 왔다. 집에서 나와 열 걸음 걸으면 보이는 곳이 바다임은 내게 너무나도 당연하였고 학교를 마치곤 바닷가로 뛰어가는 것 또한 당연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숲(이라고도 칭하기 애매할 정도로 규모가 작다.) 속에서 뒹굴고 난 후 흙 투성이가 된 채 집에 들어왔을 때 아빠가 신기한 것을 보여준다며 무작정 때 묻은 내 손을 끌고 방에 앉혔다.
네모난 것을 요리 조리 만지다 여러 번 툭 툭 치니 거기 안에서 사람들이 나와 놀라 뒤집어졌던 기억이 난다. TV라는 개념이 일체 존재하지 않았으며 어린 마음에 벌벌 떨기까지 했다. 뭐, 어리다고 칭해봤자 고작 5년 전이니.
" 안녕하세요. 도 경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그렇게 나의 랜선 짝사랑이 시작 된 것이다.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꼈었다. 나보다 덩치도 작았으며 콧물이나 질질 흘리는 친구들과는 달랐다. '완벽' 그 자체의 첫 남자를 보고 두근거림을 느껴 1시간 가량 TV 앞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첫 사랑이었다면 첫 사랑이었다. 눈이 나빠 진다며 기겁을 하던 엄마와 달리 아빠는 그저 허허 웃으시며 '우리가 너무 이름이를 가둬 키운 거 같네.' 라며 나를 걱정하신 듯한 기억이 얼추 스쳐간다. 1시간이 지나고서 나오는 다른 인물에 실망하며 기다리면 또 경수 오빠를 볼 수 있겠지라는 마음에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 TV 를 지켰다고 한다.
어느 특정한 시간에 몇 번 채널에서 나의 경수 오빠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나는 이제 그의 존재와 활동 영역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한국은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넓었고 내가 생각보다 조금, 아니 많이, 아니 엄청나게 많이 문명에 도태되어 살아왔다고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팬심 하나로 보따리를 싸 늦은 저녁 부모님을 불러 모아 선전포고를 했더란다.
- 아버지, 어머니. 전 이 섬을 나가 서울에서 생활하겠습니다.
물론 처음엔 두 분 다 머리에 띠를 매곤 결사 반대하셨다. 거기가 어디라고 가니, 위험한 곳이야. 라며 눈물마저 글썽거리시던 엄마와 아무 말 없이 안된다는 말만 하시는 아빠를 설득하기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일 정도 물로 끼니를 떼우고 단식 투쟁을 하니 엄마 마저도 내 쪽에 손을 들게 된 것이다. 이제와서 알게 된 것이지만 아버지도 심히 걱정을 하였다고 한다. 너무 섬 안에서만 키워 바깥 세상에 대해 잘 알려주지도 않음에 대한 미안함이 크다고 마지막 나를 배웅 해 주던 날엔 처음으로 눈물 한 방울까지 흘리셨다. 지금은 내가 언제 그랬냐며 쑥스러운 듯 넘기시지만.
마침 서울에 주거하시는 미혼이시지만 아들 하나를 둔 이모 댁에서 시작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인터넷, 운동 기구, 인터폰, 거리. 옛 집에선 몇 걸음만 걸어도 금방 파도 소리가 들렸지만 이 곳은 자동차를 타고 몇 시간은 가야 들을 수 있댄다. 처음 한 달 가량은 울지 않고서는 잠에 드는 날이 없었다. 태어나고 한 번도 보지 못 한 이모와 사촌 오빠와 한 집 아래에서 어린 나이에 생활하는 것도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으며 똥 강아지라며 늘 내 엉덩이를 꼬집던 엄마도, 나만 보면 사내 대장부라며 놀리던 아빠도, 늘 콧물 흘리고 닦는 척 하며 들이마셨던 명식이도, 늘 내 과자를 뺏어가던 갈매기 강구도, 하다 못 해 지긋지긋하던 바퀴벌레 바돌이 바순이도 그리웠다. 사촌 오빠라고는 하지만 나이는 같은 사촌 오빠와 서로 낯을 가려 서먹 서먹해 눈만 마주쳐도 지레 겁을 먹어 피하기 바빴다. 내가 생각한 만큼 서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처음이자 충격적이었다.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게 뱉은 수 있는 말이라 한 들 그 때의 나를 떠오르면 괜시리 눈가가 촉촉해지기도 한다.
정말 그 때만 생각하면 ,....
" 니 뭐하노. 밥이나 퍼뜩 무라. 밥 묵는데 울고 지랄. "
" 아, 어. "
미친. 고였다고는 생각 했지만 진심으로 눈물이 흘렀을 줄이야. 지금은 편해도 너무 편해져버린 사촌 오빠 새끼가 분주히 입을 놀린다. 아침 일찍 일을 나간 이모는 쪽지에 사랑하는 내 아들램 우진, 귀염둥이 내 조카지만 딸 같은 이름이♡ 오늘 하루도 화이팅^^!!] 이라며 나와 저 새끼를 단 둘만의 공간으로 남겨두고 가 버린 것이다. 힘으로 덤볐다가는 뼈도 못 추스를게 뻔하니 소심하게 중지 손가락을 올리는 것에 마무리를 지었다. 약자의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저 사촌 오빠라는 새끼, 아니 박 우진도 보다 보면 평범하지는 않다. 물론 본 고향은 부산이라지만 서울에서 거의 자랐다는데 언어 구사력은 완벽한 경상도 사람이었다. 겨드랑이에 털 나고 부산에 가 본 적 있냐는 말에 없다며 당당하게 말 하면서도 사투리가 흘러 나온다니. 어쩌면 컨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은 든다. 조금은.
밥을 다 먹고 가방을 정리 해 버스 정률장으로 터덜터덜 걸어갈 때 즈음 문자가 늘 아침마다 받는 문자가 와 있었다.
- 학교에서 내 절때 아는 척 하지마라.
박 우진이었다. 버스로 통합을 하는 나와 달리 혈기 왕성한 박 우진은 등하교를 자전거로 했다. 여담이지만 집에서도 가만히 있는 꼴을 보지 못했다. 같은 집에 살며 같은 학교를 통학한다 한들 반은 아예 분리 돼 있고(건물 자체가 따로 있었다고 보면 된다.) 같이 있었던 적 조차 없으니 아무도 내가 박 우진과 혈육 관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ㅇㅇ. 절때 x 절대 o
몇 년 째 한결같은 문자와 오타에 한결같이 보내주곤 나름 평화롭게 등교를 하던 중 무언가 갑작스레 급하게 내 뇌리를 스쳐갔다. 뭐지. 뭘까. 분명히 쎄한 느낌이었는데. 뭔지는 몰라도 갑자기 불안해졌다. 왜지. 아침부터 멋진 척 하는 박 우진의 겨드랑이 털을 봐서일까? 아니면 오늘 깜빡하고 머리를 안 감아서 ? 아니면 ,... 생각은 꼬리에다 꼬리를 물고 이는 '새학기라서.'라는 의미로 수용하기로 하였다. 뭔가 잊은 거 같은데.
생각 해 보니 우리 학교는 등 하교 할 때 길 마저 나뉘어져 있다. 여자는 서 쪽, 남자는 동 쪽. 더 쉽게 말하자면 아예 버스 노선도 틀리다. 2년 동안 학교에서 마주친 남자라곤 고2, 지나치게 감성적이셨던 문학 선생님이 전부였다. 급식실 마저도,... 아, 같은 건물이었으나 다른 층이었다. 물론, 먹는 시간도 달랐다. 철저하게 분리 된 환경 속에서 마주칠 틈은 언제라도 있었겠지만 굳이 만들지는않았다. 남자라는 존재가 낯설기도 할 뿐더러 내 마음 속에선 오직 한 명, 나만의 슈퍼스타, 나만의 왕자님 도 경수 한 명만으로도 족했다.
그리고 난 내 눈을 의심했다.
섬에서 자라 섬에서 큰 덕분에 시력 2.0을 자랑하던 내 눈이 나빠졌음을 확실하곤 눈을 비볐다. 분명 밤 늦게까지 휴대폰을 들여다봐서 그런 것이다. 시력이 나빠진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 그렇지 않고서야 ,....
내 눈 앞에 이렇게 많은 교복을 입고 있는 남정네들이 즐비할리가 없었다. 그 속엔 딱 봐도 불량해 보이는 남정네들과 모범생들, 심지어 박우진도 있었다. 내가 착각하여 서문이 아닌 동문으로 들어온 것인가 하여 발을 돌려 보았으나 당당하게 써 놓인 [서문]이 내 발을 붙잡았다. 아,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봄 방학 도중 일어난 지진에 남자 건물 교실 중 여러 곳이 안전하다는 등급에 E를 받아 여자 건물과 합친다고. 하하, 그래서 불안했던 것이었다. 궁금증은 해결 됐지만 더 큰 막대한 두려움이 공존했다. 우리 학교만큼 보수 적인 곳이 절대로, 절대로 남녀 합반을 할 리 없으리라 믿고서는 말이다. 내 마지막 동앗줄 같은 것이다.
엿 같은 반배정은 왜 새 학기 당일 날 공지하는 지 모르겠다. 심지어 개별 공지다. 직접 교무실로 가 반을 듣고 그 반으로 찾아가는 학생도 귀찮고 선생도 귀찮은 그런. 교무실 앞엔 남자 여자 나뉘어 모두 줄을 서 있고 나도 그 줄에 합류했다. 내 바로 옆에 박우진이 있었으나 박우진의 당부대로 굳이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사실, 박우진 옆의 남정네들이 있어서도 그렇지만. 휴대폰 게임을 한 판 하자 곧장 내 차례로 다가왔다. 3학년 1반, 하필이면 부장 교실이다.
협소한 인간관계라도 친구는 있다. 몇 안 되는 친구지만 휴대폰에 경미, 소연이, 윤지한테 차례로 문자를 보내고선 제발 같은 반에 한 명이라도 있어라며 반에 가는 도중 두 손을 꽉 잡고 기도했다. 1반부터 5반까지는 여자반, 5반부터 10반까지는 남자 반이니 확률로 따지자면 5분의 1이다. 한 명은 붙겠지라는 마인드로 내 자신을 위로했지만, 신은 내게 좌절감을 주셨다. 띠링하고 세 명에서 동시에 답이 왔으며 그 답은 전부.
-헐, 진짜? 나 9반임. -소연
-아쉽다ㅠㅠㅠㅠㅠㅠ 나 7반인데 자주 놀러오삼 -윤지
-니 혼자 1반 수고링 난 소연이랑 같은 반 -경미
2차 혼란이 왔다. 내 상식 선 안이라면 5반 안이어야 했다. 그런데 왜 이들은 모두 뒷 반인 것인가. 경우의 수로는 3가지가 있다.
1. 남자 반이 1반부터 5반까지고 여자 반이 그 뒤다.
난 여잔데 1반이다. 심지어 내 앞 차례던 정말 안 친한 여자인 친구는 3반 이었으므로 아니다.
2. 홀수 반이 여자 반이다.
3. 남녀 합반이다.
3번만은 아니다.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그 바램은 깨져버렸다.
" ...... "
★☆ 박우진 ,.... 너가 왜,.... 거기서 나와 ? ☆★
3번이 맞았다. 내 일생 일대의 위기가 찾아오고야 말았다. 섬 소녀의 서울 상경만큼 심각하고 혼란스러운.
내 좁은 인간 관계를 증명 해 주듯 아무도 내 옆자리를 자처하지 않았다. 35명, 딱 한 자리가 비는데 그 자리가 바로 나. 성이름. 교탁 바로 앞의 내 자리였던 것이다. 심지어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애들 조차도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1교시는 늘 그렇듯 자기 소개로 시작했다. 담임은 칠판 위에 자신의 이름을 간지나게 한자로 써 내려 가더니 1번부터 나와 통성명을 하란다. 한 명 두 명 나와 자기소개를 하는데, 하는데, 하는 거 까지는 큰 문제가 없는데,... 맞다. 내 자리가 맨 앞, 그것도 교탁 바로 앞인지라 나오는 족족 나와 전부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여자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문자는 남정네들이었다. 몸에 털 나기 시작한 후로 내 또래 남자 (박우진은 제외한다.)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터라 눈이 마주치는 것 조차 부담스럽기 그지 없었다. 눈을 아예 피하기도 그렇고 또 눈을 맞추자니 민망하고.
" 성이름. "
" 아, 아 네! "
처음부터 이목을 끌어버렸다. 혼자 골똘히 생각에 빠지느라 미처 내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듣지 못하였고 담임이 여러 번 호명을 하고 난 후에야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다 스텝이 꼬여 넘어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더 민망한 건 아무도 웃지 않았다는 것이다. 차라리 웃고 화기애애하게 전개 되었다면 이야기가 또 다르겠지만,... 빵꾸 난 스타킹을 최대한 올리곤 쭈뼛주뼛 교탁 앞에 섰다.
" 아, 저는 일단 섬 출신이구요.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엑소의 ,... "
.
.
.
.
" 엄마, 그래서 점마 자기 소개하다가 땀 억수로 흘리다 갑자기 기절해가 다음 시간에 보건실에서 누워 있었다. "
그럼 니가 같이 놀아줘야지. 점마가 뭐고, 점마는. 이모가 들고 있던 숟가락으로 박우진의 이마를 툭 때리고선 내게 물었다.
우진이 말 진짜니?
네,.. 진짭니다. 그렇게 난 우리 반에서 1시간 가량 최고의 관심 대상이 된 것이다. 몇 년 동안 섬 출신 이야기를 숨겨 두다 뱉은 것과 자기소개 중 기절 해 버린 성이름 으로 아마 내가 없는 사이 꽤나 말이 오갔을 것이다. 아프다는 핑계로 그 뒤 수업 모두 보건실에서 뻐팅기려 했지만 쫓겨 나 8교시까지 꾸역꾸역 해 마치는 종이 울리자마자 택시까지 타고 집으로 왔다. 물론 쉬는 시간마다 윗 층에 있는 경미와 소연이, 윤지 반에 찾아 갔지만 그것도 한 두 시간하니 지쳐 못 할 짓이었다. 그렇게 모두 남녀 합반이라며 설레는 감정과 함께 학기를 시작할 때 나는 좌절감에 차라리 섬으로 돌아갈까 수 십번도 넘게 고민했다. 그러기엔 컴백할 때 마다 봐야 하는 경수 오빠의 미모를 놓치기엔 너무나도 경수 오빠는 멋졌다.
그 다음 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분주히 준비하고 이모가 준비해 준 아침을 먹고 교복을 입었지만 다른 날과 달랐다. 가기 싫어! 싫다고! 혼자 쇼파 위에서 몇 번 뒹굴다 학교 쯤이야 하루 쨀까 고민하다 수험생이라는 압박감에 조용히 신발을 신었다.
- 학교에서 절때 아는 척 ㄴㄴ 그리고 오늘은 땀 흘려가 보건실 가지마라ㅋㅋㅋㅋ
제길. 여김없이 아침마다 오는 박우진의 카톡, 늘 당부해도 고쳐지지 않는 절때, 평소와 달리 추가한 뒷말.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어 읽고 씹었다. 어제는 아프다는 핑계로 다음 시간 연달아 하는 자기 소개도 피하고 학기 첫 날이라 야자도 안 했다만 오늘은,... 휴우. 한숨부터가 흘러 나왔다. 고독한 아웃 싸이더-즉, 은따-의 길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고 제 자신을 위로 한 채 낯설기만 한 남정네들이 바글바글한 반으로 들어갔다. 거짓말처럼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으나 5초가 안되어 다시 자기들끼리 히히덕 거리기 바빴다. 내가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을 찾아가고 보건실에 있을 동안 자신들만의 무리를 형성하기라도 했나보다. 그렇게 혼자 독보적으로 튀는, 옆 자리가 빈 교탁 바로 앞 자리에 앉아 문제집을 펴 보았으나 집중이 될 리가 있나, 평소처럼 휴대폰을 꺼내 배경 속의 경수 오빠에게 마음 속으로 말을 거는 것이 내 외로움을 달래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 너 정말로 섬에서 태어났어? "
" 섬에 와이파이 터져? "
" 섬 남자 섹시해 ?
한 두 시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여자인 친구들이 한 두명 씩 내게 물음표를 달고 찾아왔다. 여자 한정 친화력 짱짱이었던 난 그제서야 배경화면의 경수 오빠와 하는 마음 속 대화를 잠시 접을 수 있었다. 먼저 다가가는 것은 어려웠지만 다가만 와 준다면 나머지는 자신 있었다. 그렇게 또 새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황아영, 김수정, 민서현. 그 중 수정이는 특출나게 예뻤다. 같은 반이 된 것은 처음이지만 다른 반이었던 나 조차도 알 정도로 예쁜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 아름다움은 내 옆에 있으면 더욱 부각됐다. 젠장. 성격조차 수정이는 전형적인 공주였고 서현과 아영은 나름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 저기,... 나 사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
이제 같이 화장실까지 갈 정도로 단시간 안에 친해지게 된 아영이가 수줍게 볼을 물들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흥미로운 주제라 다들 토끼눈이 되어 뭐냐며 물어보자 그 입에서 나온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니까,
..
그러니까 ,....
...
그러니까,...
..........
박우진을 ?
이유는 심지어 더 지랄틱했다. 다정하고 멋지고 시크하고 사투리가 귀엽다... 란다. 내 상식으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다정하다. = 5년을 같이 살며 다정하다고 느낀 적은 맹세코 경수 오빠를 걸고 단 한 번도 없었다.
멋지다. = 설명 할 가치를 못 느끼겠다. 매일 아침 떡진 머리를 내게 내밀며 냄새 맡아 보라 권유하는 새끼가 멋있다니.
시크하다. = 집에서 자기가 사 놓은 푸딩 하나 먹었다고 일주일동안 삐져 나만 보면 씩씩 거리던 놈이다. 공포 영화보다가 운 놈.
사투리가 귀엽다. = 박우진이 3살 때 부터 서울에서 자랐다. 사투리라는 컨셉에 속은 것을 알려주면 아영이가 받을 충격은 얼만큼 클 것인가.
대충 상상해보니 차라리 박우진 말 대로 서로 모른 척을 하자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도 내 미래를 위한 옳은 길임을 깨닫는 데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저 모르는 척 응원을 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박우진과 나의 관계를 알게 되는 날에는 난 아영이와 박우진의 연결 고리가 돼야 했으며 만약에 둘이 사귀다 헤어지기라도 하면 내 입장이 난처 해 질 것은 불보듯 뻔했기에 박수까지 쳐 주며 잘 어울린다며 아양도 떨어댔다.
" 어, 저기 ..... "
멀리서 어떤 키 큰 남자가 반에 들어가려던 내 마이를 꼬옥 잡고는 편지 하나와 츄파츕스 한 통을 내게 건네준다.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굳어 아무 말도 못 하는 나를 보자 뒷머리를 긁적거리다 가버린다. 그 와중에도 내 두뇌는 풀 가동되고 있었다. 나에게도 그 남자친구라는 것이 생기는 걸까? 이렇게 남자 공포증을 극복 할 수 있는 것일까?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처음 받아보는 고백에 비죽비죽 웃음이 흘러나오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 반, 혼란스러운 마음 반으로 편지를 뜯으려고 하자.
-멀리서 보아도 누구보다 빛나는 수정이에게.
- 2반, 선호가.
요동치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역시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고맙다고라고 했으면 큰일날 뻔 했다. 그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버린 내 성격에 감사해야 했다. 문과 반이라 그런지 참 필력도 대단하다. 아침부터 누가봐도 나 고백 받았어요. 보여주듯 츄바츕스 통과 편지를 들고 나타난 나는 또 1반의 관심 대상이 되었지만 금방 수정에게 넘겨줌으로써 상황을 모면했고 처음에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친구들의 눈도 수용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ㅄ 설렜냐?
박우진이었다. 아직도 웃음기로 번져 있는 얼굴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놈의 겨드랑이 털을 모조리 뽑아다 입에 쑤셔 박고 싶었지만 읽고 씹음으로 내 선 안에서의 최대의 복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 너 거기, 맨 뒷 자리에 염색한 친구. 끝나고 교무실로 따라와라. 넌 입술 좀 지우고. 야 너 귀걸이 안 빼? 학기 초부터 아주 그냥 막 나가네. "
담임 담당 과목이 생명인데 학기가 시작하고 단 한 번도 수업을 한 적이 없이 잔소리-학급 공지-훈화-잔소리만 무한 반복이 된 것 같다. 어느 정도 저 루트를 다 해 갈 즈음
" 오늘 자리 바꾼다. 랜덤으로 할래, 번호 순으로 할래? 반장도 뽑을 거다. "
다수결의 원칙으로 자리 뽑기는 랜덤으로 되었고 난 이제 친구도 생겼겠다 혼자 앉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내적 댄스를 추며 번호를 뽑았다. 19번을 뽑고 자리에 앉아 희망에 가득 찬 마음으로 새 짝, 20번을 기다렸다. 하나 둘 반으로 들어오는 친구들에 두근 두근. 이렇게 설렌 적은 내가 TV 속 경수 오빠를 처음 영접하고 나서 실제로 경수 오빠의 손을 잡아 본 후 느끼는 처음의 떨림이었다. 한 자리, 두 자리 자리가 채워질 동안 내 옆 자리만은 휑했다. 뭐지, 나 35번도 아니라 분명히 짝이 있을건데. 정말 몇 자리 밖에 안 남아있을 때였나.
.... 세상에.
사고 회로가 정지 됐다. 잘생겨도 너무 잘생겼다. 일단 얼굴은 존나 작았다. 비속어가 나올 만큼 작았다. 코도 작고 눈은 예쁘고, 미친. 하느님이 경수 오빠 외에도 외모에 이런 미친 공을 들인 사람이 있었다니. 난 왜 이 존잘남을 이제서야 본 것인가 자책했다. -저가 남자를 피하고 다녔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겨드랑이는 벌써 땀으로 축축해졌다. 아마 마이가 아니었다면 난 상당한 수치플을 당할지도 모른다. 수전증을 앓고 있는 것도 아닌데 손이 덜덜 떨려 가방 지퍼를 버벅거리며 열었다. 처음으로 2D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 느끼는 설렘이었다.
-
안녕하세요!
제 목표는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설레고 현실적인 학원물입니다.
뭐 섬 출신이랑 등장인물 외모부터 비현실 적이지만 ^^
등장 인물은 제목에 써 뒀듯 딥과 윙입니다!
오타, 맞춤법 등 피드백 적극 수용해요.
오늘부터 같이 달려 봅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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