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정택운! 어제 잘 들어갔어? 왜 답장도 안해주냐? 어?"
또 시작이다. 택운은 '졸려서 일찍 잤어..' 라고 대꾸하며 학연을 살짝 밀어냈다. 그럴수록 학연은 힘을 더 줘서 택운을 꽉 안았지만. 택운은 그저 학연의 품에 폭 안겨서 가만히 학연의 말을 들어줄 뿐이었다. 간간히 학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택운은 마침 교실로 들어오는 원식과 눈이 마주쳤다. 아, 1교시 문학이었지.
"실장,"
"..."
반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택운을 품에 안고 왔다갔다 흔들던 학연도 그제야 멈추고 원식을 바라봤다.
"저희 실장 아직 안 뽑았는데요?"
"그래? 그럼 임시 실-"
"저요!"
원식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학연이 잽싸게 손을 들었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이 마치 저를 뽑아달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너가 임시 실장이야?"
"아뇨, 그냥 제가 하고 싶습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큰 목소리에 택운이 학연을 쳐다봤다. 묘한 웃음이 입가에 걸려있었다. 원식은 학연을 쳐다보다 옆에 있는 택운에게 시선을 살짝 옮기곤 따라서 살짝 웃었다.
"그건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고, 그 옆에-,"
모든 학우의 시선이 택운에게 향했다. 학연도 슬며시 손을 내리고 택운을 쳐다봤다. 택운은 원식을 한번 쳐다보고, 학연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원식을 쳐다봤다.
"...저요?"
"어. 이름이..?"
분명 어제 깜찍이라며 친히 선문자까지 날리고 집까지 같이 간 사람이 누군데. 제 신상까지 탈탈 털어놓고선 정작 이름은 모르시겠다? 택운은 살짝 눈썹을 찡그렸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고 정확하게 한 음절씩 발음했다.
"정.택.운.이요."
"-아, 24번. 넌 이제 문학부장이야"
밑도 끝도 없이 문학부장이라며 택운을 지목하고 원식은 곧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학연과 택운은 잠깐 동안 서로를 쳐다보다가 수업에 집중했다.
*
종이 침과 동시에 깔끔하게 수업을 끝낸 원식이 대충 자기 책을 정리하고 묵묵히 교실을 나가려다 말고,
"문학부장은 잠깐 교무실로 따라와"
저 한마디를 뱉고 교실을 나가버렸다. 마침 엎드리려던 택운이 원식과 눈을 마주쳐버린 상태여서, 피할 구석이 없었다. 학연은 짝꿍의 이런 상황을 아는 건지 열심히 자고 있을 뿐이었다. 택운은 학연이 야속해 머리를 살짝 쥐어박고 어기적대며 교무실로 향했다. 복도를 걸어가면서도 택운은 자기가 왜 교무실로 가야하는지 알지 못했다. 문학부장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닌데. 선생님한테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제 일 때문인가? 별 일 없었는데. 내가 너무 말이 많았나? 한참을 생각하던 택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아, 어제 인사를 안했구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택운이 원식에게 건넨 제대로 된 인사는 고작 안녕히 가세요, 이 한마디뿐이었다. 정작 감사하다고 말을 못했네. 그제야 불편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코너를 도는데 바로 코앞에서 원식이 택운을 반겼다.
"깜찍이, 진짜 왔네?"
"..."
"..."
"....아..어제는 감사했습니다"
정말, 정말 코앞에서 마주친 원식 때문에 택운은 놀라 한참을 머뭇거리다 꾸벅 인사를 했다. 원식은 택운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제 앞에 택운의 얼굴이 놓이자 귀여워, 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근데 저는 왜..."
택운의 말뜻엔 자기를 왜 불렀는지, 왜 문학부장을 시켰는지 까지가 포함되어있었다. 아, 더불어 본인의 이름은 깜찍이가 아니고 정택운이라는 뜻까지도.
"그냥, 보고 싶어서"
하나도 타당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택운이 아까 교실에서처럼 살짝 눈썹을 찡그리자 원식이 택운의 어깨에 팔을 휙- 두르고 계단을 내려갔다. 자세는 어깨동무가 맞긴 하지만 과하게 붙어있는 몸 때문에 택운은 그저 손을 공손히 모으고 원식에 의해 이끌렸다.
"근데 저-"
"선생님,"
"네?...아..네, 선생님"
"네~ 왜요, 학생?"
"혹시 제 이름..모르세요?"
"택운학생 이름을 내가 왜 몰라요?"
"근데 아깐 제 이름 모르셨잖아요"
원식을 쳐다보며 조곤조곤 말하는 택운의 숨결이 원식에게 살짝 닿았다. 음, 원식은 운을 띄우고 옅게 웃기만 했다. 어느새 교무실이 위치한 1층까지 내려왔다.
"내가 너 이름만 외웠다는 거 들키면 어떡하라고"
"네?"
"잘 가요, 우리 문학부장"
원식은 택운을 향해 씩 웃어 보이며 교무실로 쏙 들어갔다. 휑한 복도에 택운이 혼자 남았다. 아, 또 올라가야 되잖아. 귀찮아. 택운은 원식이 들어간 교무실 문을 살짝 째려보고 다시 교실로 향했다.
*
"어디 갔다 왔어?"
"교무실"
"왜?"
"문학쌤이 불러서"
"뭐래?"
그러게. 정작 원식에게 특별한 말을 들은 건 아니었다. 진짜 나 똥개훈련 시킨거야? 울컥, 차오르는 억울함에 택운은 입을 다물었다.
"응? 뭐라는데. 왜 불렀는데?"
"말 안할거야? 응? 그럴거예요, 택운이?"
지지 않는 학연이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택운이 자리에 앉자마자 계속 질문공세를 해대기 바빴다. 안 그래도 기분 안 좋은데 너까지 귀찮게 할래? 계속 이렇게 가만히만 있다간 하루 종일 물어볼 것 같았다.
"그냥. 나 문학부장 하는 거 괜찮냐고"
택운이 학연의 눈치를 살살 보며 말했다. 흠, 학연은 택운의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 못미더웠지만 못이기는 척 넘어가줬다.
* * *
택운이 문학부장이라는 명분으로 교무실 앞까지 간 그 날 이후로, 원식은 택운에게 이렇다 할 일을 시키진 않았다. 노동은 무슨, 오히려 문학부장을 향한 관심과 애착만 늘어갔다. 야자감독도 아니면서 매일 밤까지 남아서는 택운에게 초코에몽을 바치기 바빴다.
"제가 애도 아니고.."
"왜? 그거 짱 맛있는데. 카페인은 어린이한테 안좋아요~"
그래도 커피를 줄까 고민은 했나보다. 택운은 틱틱 대면서도 원식이 주는대로 곧잘 받아먹었다. 원식이 밤늦게까지 남아야할 만큼 일이 많은건진 모르겠지만 항상 택운을 옆자리에 태우고 퇴근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점점 싱그러워지는, 4월이 다가왔다. 교직원들 중 한 분의 부친상 때문에 거의 모든 교과 선생님들이 자리를 비워야했다. 마침 다음날이 토요일이기도 하니 단축수업이 행해지고 자율학습이 이루어졌는데 다들 집에 가기 바빴다.
[이따 8시쯤에 우리집으로 와]
원식의 문자였다. 내가 오라면 그냥 갈 것 같아? 딱히 친하지도 않지만 그간 초코에몽을 준 정 때문에 간다, 내가. 옆에서 학연이 신나게 가방을 싸며 '운아! 너도 피씨방 갈래?' 라며 묻는 게 들렸다. 지금이..다섯 시니까 중간에 빠져나오긴 힘들 것 같아 택운은 단칼에 거절했다.
"난 집갈래"
"아, 왜- 같이 가자, 응?"
"쉬고 싶어"
그래? 힝, 그럼 나 먼저 간다? 오고 싶으면 전화하고! 택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학연이 손을 흔들며 무리에 섞여 저만치 앞서갔다. 늘 원식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길이 익숙해져서 그런가 택운은 가는 길이 새삼 새로웠다. 묵묵히 걷고 있는데 진동이 또 느껴졌다.
[ebs챙겨와]
*
택운은 저녁을 먹고 부모님께는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며 대충 둘러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004호에 학교 선생이 살고 있다고 말하면 귀찮아질 것 같아 원식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한 손엔 책을 덜렁덜렁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
"..."
아직 안 들어왔나? 두어 번 눌렀지만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그냥 집에 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원식이 문을 벌컥 열었다. 방금 들어왔는지 술 냄새가 진했고 와이셔츠의 단추가 두개 풀려져있었다. 들어와, 원식의 말에 택운이 쭈뼛거리며 소파 끄트머리에 앉았다.
"편하게 앉아"
원식은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택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술 때문인지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택운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택운이 멍한 시선으로 집안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이 원식은 컵에 물을 따르고 거실로 향했다.
"전 왜 부르신거예요?"
"아. 너 저번 모의고사 등급 완전 똥이던데?"
5등급. 원식은 소파 맞은편 벽에 기대선 물을 마셨다.
"이번 달도 등급 똥일까 봐 걱정되서 불렀다, 왜"
"왜 남의 등급을 맘대로 보고 그래요?"
"내 학생인데 성적 보는 것도 안돼요?"
"전 싫어요. 아, 그리고 반말하든지 존대하든지 하나만 정하세요"
"나도 싫은데? 뭘 하든 내 맘"
그래도 5등급이면 나름 잘 봤다고 자부한 택운이었는데, 똥등급이라는 원식의 말에 빈정이 상했다. 그래서 말도 툭툭 내뱉었고 원식도 술기운 때문인지 지지 않으려했다. 흡사 유치한 초딩 싸움이었다.
"그래서, 책은 가져왔고?"
토라져서 고개를 옆으로 돌린 택운이 먼저 말을 할 것 같지 않아 원식이 먼저 말을 붙였다. 택운의 손에 들려있는 책 모서리를 다 보고 하는 말이었다. 택운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위에 책을 올려놓았다.
'EBS 수능특강 영어영역 영어'
택운이 꺼내든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원식이 '그걸 왜 가져와?' 하고 묻자 택운이 원식을 빤히 쳐다봤다. 국어랑 영어랑은 색부터 달랐다. 택운은 책과 원식을 번갈아보더니 그제야 안듯이 작게 아-, 탄성을 뱉고 '내 맘' 이라 대꾸했다.
"어쨌든 궁금한거나 모르는거 있으면 나한테 와. 교무실이든 집이든"
"선생님이 과외하는 건 불법 아니예요?"
"그냥 질문에 대답만 해주는 거거든?"
원식이 느리게 말을 잇고 다시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오랜만에 상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술을 피하기란 쉽지 않았다. 벽에 몸을 기대고
서있음에도 그 자세가 위태로워보였다. 계속 머리를 흔드는 게 아무래도 제대로 취한 것 같았다. 한 2분정도 지났을까, 둘의 대화가 끊기자 택운은 집에 가기로 했다. 애꿎은 책만 노려보던 시선을 원식에게 옮기자 원식이 저를 보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원식이 택운의 얼굴을 하나 하나 뜯어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학생 어깨가 참 넓네요"
"?"
"나한테 어깨 좀 나눠줄래요?"
"제가 왜요?"
택운이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하지만 원식에게 택운의 대답은 필요 없었다.
"그럼 니 입술이라도 나눠주든가"
원식이 성큼성큼 발을 옮기자 컵에 든 물이 크게 일렁였다. 남은 한손으로 택운의 턱을 잡아 살짝 들곤 입을 맞췄다. 아무런 자극 없이 입술만 척 대고 있던 원식이 입을 떼며 가볍게 택운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서로의 입김이 닿을 거리에서 원식이 택운을 보고 멋있게, 씨익 웃었다.
"정택운 예쁘다......학생, 나랑 연애할래요?"
당황해서 뭐라 말도 못하는 택운의 위로 원식이 그대로 엎어졌다. 컵은 바닥에 떨어지고, 원식은 택운의 품에 안기듯 쓰러졌다. 택운이 제 품에 안긴 원식을 흔들어 깨워보지만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많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일단 제 위에 있는 원식의 무게가 신경쓰였다. 택운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원식을 그대로 소파에 눕혔다. 아직 아홉시도 안됐는데..알아서 일어나겠지. 택운은 떨어진 컵을 주워들고 다시 물을 따라 탁자 위에 두었다.
"..안녕히 계세요"
택운은 올 때와 같이, 한 손에 책을 덜렁덜렁 들고 집으로 향했다.
또 시작이다. 택운은 '졸려서 일찍 잤어..' 라고 대꾸하며 학연을 살짝 밀어냈다. 그럴수록 학연은 힘을 더 줘서 택운을 꽉 안았지만. 택운은 그저 학연의 품에 폭 안겨서 가만히 학연의 말을 들어줄 뿐이었다. 간간히 학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택운은 마침 교실로 들어오는 원식과 눈이 마주쳤다. 아, 1교시 문학이었지.
"실장,"
"..."
반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택운을 품에 안고 왔다갔다 흔들던 학연도 그제야 멈추고 원식을 바라봤다.
"저희 실장 아직 안 뽑았는데요?"
"그래? 그럼 임시 실-"
"저요!"
원식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학연이 잽싸게 손을 들었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이 마치 저를 뽑아달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너가 임시 실장이야?"
"아뇨, 그냥 제가 하고 싶습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큰 목소리에 택운이 학연을 쳐다봤다. 묘한 웃음이 입가에 걸려있었다. 원식은 학연을 쳐다보다 옆에 있는 택운에게 시선을 살짝 옮기곤 따라서 살짝 웃었다.
"그건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고, 그 옆에-,"
모든 학우의 시선이 택운에게 향했다. 학연도 슬며시 손을 내리고 택운을 쳐다봤다. 택운은 원식을 한번 쳐다보고, 학연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원식을 쳐다봤다.
"...저요?"
"어. 이름이..?"
분명 어제 깜찍이라며 친히 선문자까지 날리고 집까지 같이 간 사람이 누군데. 제 신상까지 탈탈 털어놓고선 정작 이름은 모르시겠다? 택운은 살짝 눈썹을 찡그렸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고 정확하게 한 음절씩 발음했다.
"정.택.운.이요."
"-아, 24번. 넌 이제 문학부장이야"
밑도 끝도 없이 문학부장이라며 택운을 지목하고 원식은 곧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학연과 택운은 잠깐 동안 서로를 쳐다보다가 수업에 집중했다.
*
종이 침과 동시에 깔끔하게 수업을 끝낸 원식이 대충 자기 책을 정리하고 묵묵히 교실을 나가려다 말고,
"문학부장은 잠깐 교무실로 따라와"
저 한마디를 뱉고 교실을 나가버렸다. 마침 엎드리려던 택운이 원식과 눈을 마주쳐버린 상태여서, 피할 구석이 없었다. 학연은 짝꿍의 이런 상황을 아는 건지 열심히 자고 있을 뿐이었다. 택운은 학연이 야속해 머리를 살짝 쥐어박고 어기적대며 교무실로 향했다. 복도를 걸어가면서도 택운은 자기가 왜 교무실로 가야하는지 알지 못했다. 문학부장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닌데. 선생님한테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제 일 때문인가? 별 일 없었는데. 내가 너무 말이 많았나? 한참을 생각하던 택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아, 어제 인사를 안했구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택운이 원식에게 건넨 제대로 된 인사는 고작 안녕히 가세요, 이 한마디뿐이었다. 정작 감사하다고 말을 못했네. 그제야 불편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코너를 도는데 바로 코앞에서 원식이 택운을 반겼다.
"깜찍이, 진짜 왔네?"
"..."
"..."
"....아..어제는 감사했습니다"
정말, 정말 코앞에서 마주친 원식 때문에 택운은 놀라 한참을 머뭇거리다 꾸벅 인사를 했다. 원식은 택운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제 앞에 택운의 얼굴이 놓이자 귀여워, 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근데 저는 왜..."
택운의 말뜻엔 자기를 왜 불렀는지, 왜 문학부장을 시켰는지 까지가 포함되어있었다. 아, 더불어 본인의 이름은 깜찍이가 아니고 정택운이라는 뜻까지도.
"그냥, 보고 싶어서"
하나도 타당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택운이 아까 교실에서처럼 살짝 눈썹을 찡그리자 원식이 택운의 어깨에 팔을 휙- 두르고 계단을 내려갔다. 자세는 어깨동무가 맞긴 하지만 과하게 붙어있는 몸 때문에 택운은 그저 손을 공손히 모으고 원식에 의해 이끌렸다.
"근데 저-"
"선생님,"
"네?...아..네, 선생님"
"네~ 왜요, 학생?"
"혹시 제 이름..모르세요?"
"택운학생 이름을 내가 왜 몰라요?"
"근데 아깐 제 이름 모르셨잖아요"
원식을 쳐다보며 조곤조곤 말하는 택운의 숨결이 원식에게 살짝 닿았다. 음, 원식은 운을 띄우고 옅게 웃기만 했다. 어느새 교무실이 위치한 1층까지 내려왔다.
"내가 너 이름만 외웠다는 거 들키면 어떡하라고"
"네?"
"잘 가요, 우리 문학부장"
원식은 택운을 향해 씩 웃어 보이며 교무실로 쏙 들어갔다. 휑한 복도에 택운이 혼자 남았다. 아, 또 올라가야 되잖아. 귀찮아. 택운은 원식이 들어간 교무실 문을 살짝 째려보고 다시 교실로 향했다.
*
"어디 갔다 왔어?"
"교무실"
"왜?"
"문학쌤이 불러서"
"뭐래?"
그러게. 정작 원식에게 특별한 말을 들은 건 아니었다. 진짜 나 똥개훈련 시킨거야? 울컥, 차오르는 억울함에 택운은 입을 다물었다.
"응? 뭐라는데. 왜 불렀는데?"
"말 안할거야? 응? 그럴거예요, 택운이?"
지지 않는 학연이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택운이 자리에 앉자마자 계속 질문공세를 해대기 바빴다. 안 그래도 기분 안 좋은데 너까지 귀찮게 할래? 계속 이렇게 가만히만 있다간 하루 종일 물어볼 것 같았다.
"그냥. 나 문학부장 하는 거 괜찮냐고"
택운이 학연의 눈치를 살살 보며 말했다. 흠, 학연은 택운의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 못미더웠지만 못이기는 척 넘어가줬다.
* * *
택운이 문학부장이라는 명분으로 교무실 앞까지 간 그 날 이후로, 원식은 택운에게 이렇다 할 일을 시키진 않았다. 노동은 무슨, 오히려 문학부장을 향한 관심과 애착만 늘어갔다. 야자감독도 아니면서 매일 밤까지 남아서는 택운에게 초코에몽을 바치기 바빴다.
"제가 애도 아니고.."
"왜? 그거 짱 맛있는데. 카페인은 어린이한테 안좋아요~"
그래도 커피를 줄까 고민은 했나보다. 택운은 틱틱 대면서도 원식이 주는대로 곧잘 받아먹었다. 원식이 밤늦게까지 남아야할 만큼 일이 많은건진 모르겠지만 항상 택운을 옆자리에 태우고 퇴근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점점 싱그러워지는, 4월이 다가왔다. 교직원들 중 한 분의 부친상 때문에 거의 모든 교과 선생님들이 자리를 비워야했다. 마침 다음날이 토요일이기도 하니 단축수업이 행해지고 자율학습이 이루어졌는데 다들 집에 가기 바빴다.
[이따 8시쯤에 우리집으로 와]
원식의 문자였다. 내가 오라면 그냥 갈 것 같아? 딱히 친하지도 않지만 그간 초코에몽을 준 정 때문에 간다, 내가. 옆에서 학연이 신나게 가방을 싸며 '운아! 너도 피씨방 갈래?' 라며 묻는 게 들렸다. 지금이..다섯 시니까 중간에 빠져나오긴 힘들 것 같아 택운은 단칼에 거절했다.
"난 집갈래"
"아, 왜- 같이 가자, 응?"
"쉬고 싶어"
그래? 힝, 그럼 나 먼저 간다? 오고 싶으면 전화하고! 택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학연이 손을 흔들며 무리에 섞여 저만치 앞서갔다. 늘 원식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길이 익숙해져서 그런가 택운은 가는 길이 새삼 새로웠다. 묵묵히 걷고 있는데 진동이 또 느껴졌다.
[ebs챙겨와]
*
택운은 저녁을 먹고 부모님께는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며 대충 둘러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004호에 학교 선생이 살고 있다고 말하면 귀찮아질 것 같아 원식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한 손엔 책을 덜렁덜렁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
"..."
아직 안 들어왔나? 두어 번 눌렀지만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그냥 집에 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원식이 문을 벌컥 열었다. 방금 들어왔는지 술 냄새가 진했고 와이셔츠의 단추가 두개 풀려져있었다. 들어와, 원식의 말에 택운이 쭈뼛거리며 소파 끄트머리에 앉았다.
"편하게 앉아"
원식은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택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술 때문인지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택운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택운이 멍한 시선으로 집안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이 원식은 컵에 물을 따르고 거실로 향했다.
"전 왜 부르신거예요?"
"아. 너 저번 모의고사 등급 완전 똥이던데?"
5등급. 원식은 소파 맞은편 벽에 기대선 물을 마셨다.
"이번 달도 등급 똥일까 봐 걱정되서 불렀다, 왜"
"왜 남의 등급을 맘대로 보고 그래요?"
"내 학생인데 성적 보는 것도 안돼요?"
"전 싫어요. 아, 그리고 반말하든지 존대하든지 하나만 정하세요"
"나도 싫은데? 뭘 하든 내 맘"
그래도 5등급이면 나름 잘 봤다고 자부한 택운이었는데, 똥등급이라는 원식의 말에 빈정이 상했다. 그래서 말도 툭툭 내뱉었고 원식도 술기운 때문인지 지지 않으려했다. 흡사 유치한 초딩 싸움이었다.
"그래서, 책은 가져왔고?"
토라져서 고개를 옆으로 돌린 택운이 먼저 말을 할 것 같지 않아 원식이 먼저 말을 붙였다. 택운의 손에 들려있는 책 모서리를 다 보고 하는 말이었다. 택운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위에 책을 올려놓았다.
'EBS 수능특강 영어영역 영어'
택운이 꺼내든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원식이 '그걸 왜 가져와?' 하고 묻자 택운이 원식을 빤히 쳐다봤다. 국어랑 영어랑은 색부터 달랐다. 택운은 책과 원식을 번갈아보더니 그제야 안듯이 작게 아-, 탄성을 뱉고 '내 맘' 이라 대꾸했다.
"어쨌든 궁금한거나 모르는거 있으면 나한테 와. 교무실이든 집이든"
"선생님이 과외하는 건 불법 아니예요?"
"그냥 질문에 대답만 해주는 거거든?"
원식이 느리게 말을 잇고 다시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오랜만에 상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술을 피하기란 쉽지 않았다. 벽에 몸을 기대고
서있음에도 그 자세가 위태로워보였다. 계속 머리를 흔드는 게 아무래도 제대로 취한 것 같았다. 한 2분정도 지났을까, 둘의 대화가 끊기자 택운은 집에 가기로 했다. 애꿎은 책만 노려보던 시선을 원식에게 옮기자 원식이 저를 보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원식이 택운의 얼굴을 하나 하나 뜯어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학생 어깨가 참 넓네요"
"?"
"나한테 어깨 좀 나눠줄래요?"
"제가 왜요?"
택운이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하지만 원식에게 택운의 대답은 필요 없었다.
"그럼 니 입술이라도 나눠주든가"
원식이 성큼성큼 발을 옮기자 컵에 든 물이 크게 일렁였다. 남은 한손으로 택운의 턱을 잡아 살짝 들곤 입을 맞췄다. 아무런 자극 없이 입술만 척 대고 있던 원식이 입을 떼며 가볍게 택운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서로의 입김이 닿을 거리에서 원식이 택운을 보고 멋있게, 씨익 웃었다.
"정택운 예쁘다......학생, 나랑 연애할래요?"
당황해서 뭐라 말도 못하는 택운의 위로 원식이 그대로 엎어졌다. 컵은 바닥에 떨어지고, 원식은 택운의 품에 안기듯 쓰러졌다. 택운이 제 품에 안긴 원식을 흔들어 깨워보지만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많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일단 제 위에 있는 원식의 무게가 신경쓰였다. 택운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원식을 그대로 소파에 눕혔다. 아직 아홉시도 안됐는데..알아서 일어나겠지. 택운은 떨어진 컵을 주워들고 다시 물을 따라 탁자 위에 두었다.
"..안녕히 계세요"
택운은 올 때와 같이, 한 손에 책을 덜렁덜렁 들고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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