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디] Blind 上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9/3/4/9347de2dd5ea8475665315eba50ff37b.jpg)
Blind
1. Cecil
현재 ▶▶
4평 남짓의 좁은 거실. Cecil은 소파에 앉아 늘 보던 DVD를 틀어놓고 호두알을 씹어 먹으면서 영활 보고 있어. 매일 같이 그 영화만 보아왔던 탓에 이제 그는 주인공의 다음 대사를 함께 읊어낼 수 있을 정도였지. 소파 앞에 놓인 너저분한 간이 테이블 위에는 영수증 따위의 종잇조각과 1달러짜리 지폐 한 장, 뭉뚱 구겨진 담뱃갑 같은 것들이 나뒹굴고 있는데, 그 사이로는 커핏물 일렁이는 이 나간 커피 잔이 하나, 식은 홍차가 반쯤 채워진 유리컵이 하나. 이렇게 두 개의 잔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고, 호두알이 든 작은 플라스틱 통과 빈 액자가 탁상 언저리를 차지하고 있어.
영상은 영상대로 TV 스크린만 골몰히 쳐다보던 세실은, 호두를 채 씹다 말고 허벅지에 놓아두었던 뿔테 안경을 썼어. (그는 말이야, 실은 안경이 없으면 도무지 사물을 분간할 수가 없단다. 온 세상이 그저 흐뭉한 빛 멍울처럼 보일 정도로 시력이 매우 나쁘거든.) 그러고는 보다 선명해진 시선으로 플라스틱 통 안을 들여다보는데, 거기엔 호두가 겨우 두 알이 남아 있었어.
이때 마냥 멍하던 그의 눈이 요상해지는 게 아니겠니. 눈매가 아래로 추욱 쳐지는 게 꼭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어. 그렇지만 너는 이것에 대해 굳이 심려할 필요는 없단다. 원래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기면 항상 눈물이라도 머금을 듯한 눈이 되곤 했으니까. 물기 없이 부르튼 자신의 입술을 짓씹으며 한참이나 눈알을 굴리던 세실은, 잠시 후 남은 호두 한 알을 마저 입에 넣고, 다른 하나는 이 나간 커피 잔 속에 퐁당 떨구어 버려. 그러자 입도 안 댄 다 식은 커핏물이 크게 출렁이며 몸부림하는데, 그걸 숨 죽여 지켜보던 그가 불현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거야. 코트를 걸쳐 입고, 부싯한 머리 모양새도 다듬는 걸 보니 어디 나갈 채비라도 하려는 모양인가 봐. 그러면서도 세실의 불투명한 시선은 줄곧 커피 잔에 꽂혀있었어.
「내가 이걸 어떻게 버릴 수 있겠니.」
그는 소파 위에 내동댕이쳐져 있던 가죽 지갑을 챙겨 들고 내용물을 확인했어. 그러나 기껏 뒤져 보아도 오천 원짜리 지폐 석 장과 백 원짜리 동전 두 푼이 당장 털어 놓인 돈의 전부였지. 이를 어쩌나, 세실의 야윈 한숨이 담배 연기처럼 매워졌어. 실은 얼마 전, 그가 미국 행 비행기 표를 사기 위해 가지고 있던 돈 모두를 탈탈 털었던 참이었었거든.
묵직하게 쳐진 손길로 빈 지갑을 마저 닫으려던 찰나였단다. 별안간 손짓을 멈춰 세운 세실이 문득 지폐 주머니 속으로 시선을 두는 게 아니겠니. 거기 소빈한 종잇돈 사이에는, 지금보다 조금 어린 세실과 어느 사내가 함께 찍은 사진이 책갈피용 네잎클로버처럼 곱게 끼워져 있었는데, 조심스레 꺼내 본 사진의 귀퉁이에는 금방이라도 향긋한 냄새가 우러날 것처럼 짙은 커피 얼룩이 물들려 있었어. 세실은 물기 서린 눈을 하고서 그 얼룩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어루만졌지. 두터운 안경알 아래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만 보아도, 자국 위를 미련처럼 지분대는 손짓만 보아도, 그가 남몰래 정분 깊은 사연을 품고 있단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어.
그러던 잠시 후에는 야무지게 다물려 있던 세실의 입술에 작은 경련이 일더니, 결국에는 정말로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버렸어. 새액 새액. 뱉어지는 날숨 역시 거칠어지고 그의 마른 가슴팍은 급하게 오르내렸지.
세실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기에 나 역시 조금 걱정이 되려던 차였단다. 그렇지만 그는 금방 몸을 추스르고, 사진을 다시 지갑 속에 넣어 두었어. 마침내 두 입이 맞물린 가죽 지갑은 세실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구.
아차, 이대로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챙겨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면, 세실은 곧장 거실 수납장을 열어젖힌 다음 두툼한 약 봉투를 꺼내 품에 숨겼어. 거기엔 2주 분의 가루약과 아기주먹만한 안약이 들어 있었는데, 그것들은 세실에게 있어 산소만큼이나 중요한 것들이었지. 앞전에도 말했듯 그의 눈 상태는 정말로 최악이었는데, 시력에 진전을 보이기 위해서는 이것들이 꼭 필요했거든.
마침내서야 준비를 끝낸 세실은 운동화를 구겨 신었고 결국은 급한 걸음으로 현관을 벗어나 버렸어. 지겹도록 보았어도 지겹잖게 좋아했던 영화의 클라이맥스 신도 뒤로 물린 채로 허겁지겁.
영화의 영상 위로 덧입혀진 바이올린 소리가 긴박해진 그때에, 덩그러니 홀로 남은 TV 속엔 벙어리가 된 여가수가 뻐끔뻐끔 노래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어. 아주 서글프게도,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말이야.
◀◀ 과거
부엌 찬장에서 익숙한 손길로 유리컵과 커피 잔을 꺼내든 경수는 각각의 잔에 갓 끓인 물을 반쯤 담아냈다. 이어 유리컵에는 제 몫의 홍차 티를, 다른 커피 잔에는 종인 몫의 인스턴트커피를 조금 우려낸 뒤 소반 위에 보기 좋게 날랐다.
경수는 잔을 쏟지 않게끔 조심스레 소반을 들고 거실로 발 머리를 돌렸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그의 걸음은 차분히 느렸으나 공기 더미를 밟는 듯 가벼웠다. 소파에 앉은 종인의 모습이 시야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입가에는 기분 좋은 호선이 머물렀다.
종인은 플라스틱 통에 담긴 호두알을 집어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경수는 발끝으로 발 구름을 하며 부러 기척을 냈다. 커피 내왔어. 그러나 무슨 용심인 건지 종인은 화면에 둔 시선을 거둘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자리에 멀뚱히 선 경수가 한 번 더 말소리를 냈다. 부루퉁한 음성으로, “김종인, 커피.”
“……….”
“야.”
“쉬잇.”
그러자 종인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제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는 것으로 대꾸 아닌 대꾸를 해왔다. 중요한 장면이니까 잠시만 쉿, 커피는 두고 이리 와서 앉아. 제 옆 자리를 톡톡 치는 종인의 손길이 투박했다. 제자리에 우두커니 붙박혀 있던 경수는 자기 몫의 홍차 잔만 내어들고, 그의 손이 더듬어 간 곳을 묵묵히 차고앉았다. 들고 온 커피 소반은 맞은 편 테이블 위에 둔 채였다. TV에선 후두암에 걸린 여가수가 성대 제거 수술을 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뇌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종인이 경수의 볼만큼이나 토실토실한 호두알을 한 입에 물더니 느리게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의 두 어금니가 한 번, 두 번, 맞부딪혀 알맹이를 부술 때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은 절정으로 치달아 올랐다. 지루함에 하품만 토해내는 경수와는 달리,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영화에 몰입한 종인만이 장면의 결과를 기다리며 눈매를 가늘게 했다.
두 개의 잔 위로 번져 오르는 물김이 조금씩 힘을 잃어갔다. 경수는 맞은 편 소반을 훑어보았다간, 이내 종인에게로 퉁명스럽게 말문을 던졌다.
“커피 안 마실 거야?”
그러자 종인이 대답했다.
“마실 거야.”
들고 있던 유리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경수가 느리게 대꾸했다.
“마시기도 전에 다 식겠다.”
한참을 침묵하던 종인이 경수의 달짝한 채근에 그제야 커피 잔을 집어 들고 식은 커피를 홀짝였다. 목 넘김이 미적지근했다.
“종인아.”
“왜.”
“나 심심해.”
경수가 칭얼거리는 곧장 종인은 턱짓으로 TV를 가리켰다. 이거 같이 보면 되지. 건조한 언성으로 맞받아친다. 종인의 말풍선에 마침표가 도루 붙었을 때, 경수는 어지간히 심통이 난 얼굴을 했다. ‘You are too much…….’ 영문의 혼잣말이 경수의 도톰한 입술에서부터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홍차 향기 머금긴 그 조그만 읊조림을, 그러나 종인은 채 듣지 못했다.
스크린 속 여가수가 제 목을 감싸며 울부짖어댔다. 고뇌에 찬 울음. 영화에 몰입한 종인은 호두알이 담긴 플라스틱 통만 미련스레 지분거렸다. 그는 제 곁의 경수를 돌볼 여념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참다 참다 못하겠던 경수가 끝내는 리모컨을 들고야 말았다. 빨간 전원 버튼에 검지 살이 닿자 스크린은 퓨즈 나가는 소리와 함께 눈을 감아 버렸다. 맥없이 풀어진 종인의 시선이 그제야 경수를 향한다. 무엇이 불만인지 제 앞 리모컨을 든 사내의 안색은 새초롬했다. 표정이 왜 그래. 굳어만 있던 종인이 끝내 말소리를 낸다.
잔뜩 토라진 경수가 볼멘소리로 맞대꾸해왔다.
“결말이야 뻔한 영화 그만 좀 들여다 봐. 저 여자 성대 수술 안 하는 거 너도 알잖아.”
아마도 영화 속 여가수를 일컫는 모양이었다. 잠시간의 침묵 뒤에 종인이 동문했다.
“삐졌어?”
그랬더니 경수가 서답하기를,
“쟤 죽어도 무대 위에서 죽겠다고 끝까지 수술 안 하잖아.”
“…삐졌네.”
“나랑 같이 다 봐놓고선 웬 청승이야. 그리고 나 안 삐졌어.”
‘우리끼리 있는 동안은 나한테 더 집중해달란 말이야…….’ 경수의 입술은 굳게 다물린 채로 그 이상의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동그랗게 젖은 눈이 꼭 종인을 향해 그리 당부하고 있는 듯했다. 경수가 심통이 난 저의를 충분히 이해한 종인이 기지개를 켜더니 어쩔 수 없다는 양 미소로 화답해왔다.
“알았어. 이리 와, Cecil.”
소파 등받이에 드러눕다싶이 했던 상체를 도로 세운 종인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달콤한 목소리로 경수의 또 다른 이름을 속삭이며, 허공을 웃돌던 그의 하얀 손목을 훔쳐 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요지부동일 듯하던 조그만 몸뚱어리는 귀엽게도 종인의 손길에 따라 순순히 이끌려 와주었다. 그는 이내 제 앞에 마주 선 경수를 맞은편의 다리 낮은 테이블 위로 천천히 앉혀내며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렇게, 경수가 유리면에 엉덩이를 붙이던 그제야 두 사람의 시선이 올곧게 맞닿는 것이었다.
얼마간의 눈 맞춤 이후, 침묵을 고르던 경수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전보다는 앙금이 좀 풀어진 투로 칭얼거리기를,
“세실이라 부르지 말래도 자꾸.”
그러자 종인이 말했다.
“경수보단 그 이름이 입에 더 감겨.”
경수가 미심쩍다는 양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추궁하듯 물었다.
“형이라 부르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 말에 종인이 볼우물을 만들며 마지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실은,
“반반.”
“여긴 한국이니까 한국 이름 불러, 형 붙이고.”
“싫어. 경수야, 하고 이름만 부를 거야.”
경수가 밉지 않은 눈으로 종인을 흘기며 말했다.
“너 고작해야 스물이야. 어린놈이 자꾸 까불어.”
“맞다, 참. 그쪽 스물 셋이었지.”
성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어린 얼굴에 섬세하고 조근한 천성을 가진 탓인지, 경수가 저보다 연상임을 알면서도 여직 실감이 나질 않는 거였다. 종인은 곧장 장난스레 대꾸하며 경수의 동그란 코 망울을 검지로 두드려댔다. 톡톡. 코끝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종인의 온기가 간지러워서 경수는 저도 모르게 아기 고양이처럼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그 모습을 본 종인이 해사하게 웃으니까 이내는 그의 목 뒤로 팔을 두르더니 이렇게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푸념하는 것이다. 커플 딱지만 없었어봐. 너 나한테 예의 차렸어야 했어.
경수가 종인을 제 품에 안다시피 끌어당긴 탓에, 두 사람의 얼굴은 서로의 숨결이 입술 면에 바로 닿을 만큼이나 가까워졌다. 종인 더러 은근한 서운함을 표하던 그는 곧 푸스스 바람 새는 웃음을 터뜨리며 뒷목덜미에 감은 제 손을 올려 보냈다. 단단한 뒷목에서부터, 부드러운 머리칼, 동그란 언덕을 지나, 옹골진 뒤통수까지 천천히.
“뭐 네가 순 막무가내긴 해도 밉지는 않아.”
“물론. 그게 내 매력이거든.”
차분한 경수의 손길에 집중하던 종인이 제 맞은 편 둥근 콧등 위로 콧날을 스치며 이마를 마주 댔다. 장난스러운 미소가 만면에 가득하던 아까와는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차츰 농익어가는 분위기에 낯을 조금 붉힌 경수가 느리게 몸을 뒤로 누웠다. 볼 살을 부드럽게 가르며 호선을 그리던 그의 입매는 다시금 제자리를 찾은 채였다. 종인 역시 그 따라 상체를 앞으로 밀어 보내며 조심스레 들숨을 삼켰다.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도톰한 입술들이 한곳으로 마주 닿은 순간, 인중 사이로 공유하던 두 호흡은 하나가 되고, 경수는 종인의 넓은 품에 감싸였다.
경수의 입술 너머는 웅덩이처럼 깊고 축축했다. 특히나 종인의 혀끝을 감미롭게 자극해오는 홍차 향은 저를 받아내는 경수만큼이나 예뻤더랬다. 초가 흐를수록 그의 입속을 헤집는 종인의 혀 질이 보다 농밀하고 뜨거워졌다. 무르익은 입속 탐닉에 두 숨결은 불규칙적으로 밭아왔다.
그러던 그때, 반쯤 누운 자세가 불편했던지 경수가 몸을 조금 뒤척거리다간 소반에 두었던 종인의 커피를 그만 엎지른 것이었다. 놀란 두 사람은 얼른 입술을 떼어내고 몸을 일으켰지만, 여과 없이 쏟아진 검은 물은 경수의 바지춤을 적신 것도 모자라 테이블의 액자 속까지 파고 들어가 버렸다. 뒤늦게서야 종인은 액자를 집어 들었고, 경수는 제 젖은 바짓단도 아랑곳 않고 엉망이 된 테이블부터 황급히 수습하기 시작했다.
액자에 끼워져 있던 사진을 꺼낸 종인이 혀를 끌끌 찼다.
“이거 얼룩지겠다.”
종인의 검지와 엄지 사이에 내걸린 그것은 다름 아닌 두 사람이 처음 불꽃놀이를 보러 갔을 때 함께 찍었던 사진이었다. 사진의 귀퉁이는 이미 푹 젖어서 검은 물이 벤 상태였다.
한편 아쉬운 낯짝의 종인과는 달리 경수는 여전히도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맞춤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인지 티슈를 뭉쳐 쥔 경수의 주먹이 미미하게 떨려들었다. 대충 테이블을 닦아낸 그는 이어 종인의 커피 잔을 챙겨냈다.
경수가 작게 입을 열었다.
“이참에 버려야겠네.”
“뭘 버려?”
“커피 잔. 이 나갔잖아, 두 군데나.”
여기랑 여기. 경수가 커피 잔의 모서리와 밑 둥을 가리키며 제 눈썹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햇볕이 적당히 스미는 곳에 사진을 둔 종인이 액자를 마저 닦으며 대답했다.
“그냥 둬. 버리지 마.”
“왜?”
“나 커피 그 잔으로만 마셔.”
“멀쩡한 거 써. 괜히 입술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형.”
“왜.”
“그거 정말 무슨 잔인지 모르겠어?”
어느 정도 물기 걷힌 액자를 내려놓은 종인이 경수를 돌아보았다. 마주 보이는 낯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
“응, 시애틀에서 나 커피숍 아르바이트 했을 때.”
“나 거기 갈 때마다 형 항상 그 잔으로만 커피 내어줬던 거 알아?”
종인의 음성 끝에 의문 부호가 붙던 순간, 경수는 벙 찐 얼굴을 했다. 뭐?
“오죽했으면 내가 ‘아, 매장에 있는 컵들이 모두 이가 나갔나보다’ 생각까지 했었다니까.”
“정말 내가 그랬어?”
“정말 형이 그랬어.”
“흠이 났던 지도 몰랐지 나는.”
“하여간 둔하다니까.”
“네 눈썰미가 귀신같아서 그래.”
“그럼 반반으로 치자.”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그를 밉잖게 흘기던 경수가 문득 놀란 낯을 했다. 그러더니 전보다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설마 너 이거 그 커피숍에서 가져온 거란 말이야?”
그러자 종인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양 멀쑥하게 대답해왔다.
“응.”
“그냥 가져왔어?”
“거기 점원이 막 버리려던 거 얼른 받아왔지.”
“그걸 왜 받아와. 어쩐지 어느 날부터 없던 잔이 찬장 위에 놓여있더라.”
못 말린다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쉰 경수가 부엌을 향해 발 머리를 돌렸다. 저벅저벅, 맨 발바닥 아래 지르밟히는 먼지가 간지럽다. 아담한 경수의 뒤태를 쳐다보던 종인은 다시금 소파에 주저앉더니 조심스럽게 말문을 덧붙여왔다. 특유의 느린 어투엔 진지함이 사뭇 베여있었다.
“생판 남이었던 우릴 이어준 잔이야.”
“…….”
“그것 아니었으면 난 형한테 말을 붙이지도 않았을 거고 거들떠도 안 봤을 거야.”
식탁 위로 소반을 둔 경수가 볼품없이 이가 나간 커피 잔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을 다듬었다. 이것 아니었으면 우리는 이렇게 한 배를 타는 일도 없었을 테다. 뒤늦게서야 알아차린 사물과 연줄의 은밀한 관계성에 불현 듯 그는 기분이 오묘해져왔다. 출처 모를 문장 하나가 머릿속을 하얗게 맴돌기 시작했다. 「운명이란, 우연이라는 실로 촘촘하게 잘 짜여 진 카펫 같은 것.」너무도 사소해서 간과하고 있던 무엇들이 실은 그 어떠한 인연들과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는 게, 결국은 경수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제껏 무심하게 스쳐 보냈던 우연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저를 휘치는 느낌이었다. 경수는 천천히 숨을 여며 쉬었다.
다시금 호두알을 집어먹던 종인이 까끌한 목소리로 언성을 꺼내왔다.
“적어도 나한텐 의미 있는 물건이니까 버리지 마.”
“…….”
“알았지.”
내가 이걸 어떻게 버릴 수 있겠니.
저의 확답을 바라며 힘 있게 뱉어진 두 문장은 벙 쪄있던 경수를 깨우치게 했다. 단호함에서 묻어나는 의외로운 섬세함. 역시 종인다운 것이었다. 한 일 자로 입을 다문 경수는 대꾸 대신 젖은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종인은 제가 먹다 남긴 홍차를 천천히 들이키며, 그 또한 촉촉한 눈으로 경수를 보고 있었다.
▶▶
바람결에 벌끔거리던 현관문을 닫아낸 세실은 곧장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들었어. 손에 들린 누런 구리 열쇠엔 그 흔한 고리 장식도 없고 묵은 때만 비적비적 묻어있었는데, 열쇠의 홈이 문고리 사이로 끼워 맞춰지기 전까지는 단순한 쇠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겉이 아주 녹이 슬어있었어. 집안에서 흘러나던 영화 소리가 굳게 잠긴 철문에 부딪혀 완전히 차단되자 세실은 입구 옆에 놓인 화분께로 손을 뻗었어. 매번 외출할 때마다 그래왔던 것처럼 물받이 아래에 열쇠를 놓아두기 위해서였지.
화분에는 튤립 한 송이가 꽃잎을 쪼그라뜨린 채 검게 말라있었는데, 이때 세실의 검지 곁으로 그 잎사귀가 잠깐 스쳤단다. 그러자 느리게 허리를 굽히던 그는 순간 몸을 세웠어. 갓 구워낸 싸구려 어포처럼 버석거리던 잎의 감촉이 세실의 손가락을 따갑게 감쌌거든. (희한하지, 그의 손끝엔 핏방울은커녕 옅은 상처도 없었는데 본인은 꼭 대바늘에라도 찔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대.) 욱진하게 열이 오르는 검지를 엄지 살로 눌러내며 묘한 기분을 달랜 세실은 마저 화분을 들어 올렸어.
건조하게 말라버린 흙덩이가 물받이의 숨구멍 사이로 투두둑 떨어져 내리고 화분 아래 숨어있던 밑바닥이 드러났어. 이때 눈길이 가는 것이 있다면, 흙으로 더러워진 바닥 면 가운데에 어느 한 부분만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더라는 거야. 꼭 찬장에 보관해두었던 묵은 와인을 꺼냈을 때, 그 와인이 놓여있던 자리만 말끔한 것처럼 말이야. 세실은 익숙한 손길로 들고 있던 열쇠를 그 부분에 놔두었어. 바닥에 낙인처럼 새겨져있던 깨끗한 흔적은 열쇠의 모양과 완전히 맞아떨어졌지.
화분을 다시 제자리에 둔 그는 전보단 덜 급한 걸음으로 대문을 빠져나왔어. 그러고는 홍갈색 담벼락이 길게 늘어선 길목을 따라 발길을 옮겼단다. 시멘트 바닥에 웅덩이처럼 고인 햇살을 지르밟으면서, 유쾌하지 못한 안단티노 템포로 터벅터벅. 그때 세실의 옹골진 무릎 위로 이따금씩 보이는 운동화 코가 유달리 많이 닳아있었어. 바닥에 까이고 쓸려 거칠어진 뒤꿈치만큼이나 지저분하게.
어느덧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길목까지 나온 그는 제가 서있는 도로 왼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단다. 아마도, 달려올 택시를 잡기 위해서였지. 잠깐 발을 멈춘 동안에도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엄지를 물었어. 지나쳐가는 소형차들의 꽁무니에서 도무지 시선을 떼지 못했지. 그러기를 한 오 분쯤 지났을까, 마침내 택시가 모습을 드러냈어.
하지만 세실은 무슨 영문인지 그 택시를 잡지 않았어. 아니, 잡지 못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네. 요란스럽게 클랙슨을 울리며 지나가는 흰색 승용차엔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은 그는, 다만 울 것 같은 얼굴로 안경을 내벗었어. 그런 뒤 눈살을 긁어내다시피 거칠게 보비작거렸지. ‘얼른, 얼른…….’ 같은 단어만 애달프게 내리 되뇌면서. 하지만 그렇게 눈물이 터지도록 부벼대던 것도 별 소용이 없었나봐. 세실은 잠깐 주저하더니 끝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안약을 꺼내들었어. [이틀에 한 번꼴로 잠들기 전 주입할 것.] 겉봉에 쓰인 글씨는 엄지로 가린 채 말이야.
오른쪽은 한 방울, 왼쪽은 두 방울. 양 눈자위로 번갈아 약을 넣은 그가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였어. 그러자 약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데 세실은 이를 옷소매로 얼른 닦아냈지. 가느다란 손목이 쓸고 지나간 얼굴에는 절망 어린 표정이 자리하고 있었어.
「병원은 다녀왔어?」
약을 넣은 지도 오늘만 벌써 세 번째. 둥근 플라스틱 통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은 세실이 파르르 한숨을 내쉬었어. 이제는 약이 없으면 안 될 정도로 눈이 많이 나빠져 버렸단 사실을 비로소야 절감해버린 거야. 차츰 시간이 지나고 희뿌옇던 전경들이 눈자위가 쓰릴 정도로 선명하게 박혀오자, 그의 미간 살은 더욱 구겨져버렸어.
때마침 또 다른 택시 한 대가 세실에게로 달려왔어. 운전석의 붉은 전광판을 확인한 그는 아주 천천히 팔을 들어보였지. 진즉에 불러 세울 줄 알았다는 양 택시는 보도 가에 유유히 멈춰 섰어. ‘빈차’. 전광판에 쓰여 있던 글씨는 어느덧 검게 사라진 채였어.
“K대 캠퍼스 앞으로 가주세요.”
기사에게 행선지를 전하는 세실의 언성이 무언가에 억눌린 것처럼 낮게 가라앉아있었어. 이는 전에도 한 번 들어본 목소리라 잘 아는데, 이럴 때의 세실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그가 지금 목 끝까지 차오른 울음을 무던히도 삼키고 있다는 얘기거든. 자존심이 세서 눈물은 죽어도 보이려 하지 않는 세실이 언제 아이처럼 울음보를 터뜨릴지 몰라.
택시가 움직이고 차창 너머의 풍경들이 뒤편으로 사라지기 시작했어. 문턱에 팔을 괸 세실은 천천히 눈을 감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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