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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민] rainbow sherbet #3
w. 조이
쇼파 밖으로 삐져나온 발이 교차된 채 까딱이고 있었다. 그 아래 부드러운 갈색의 가죽이 움직임을 따라 조금씩 주름의 모양을 달리 했다. 음 음- 콧노래 소리가 간간히 들리고 동시에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뭐 하세요?”
“보면 모르냐.”
쳇. 매니저가 입술을 쭉 앞으로 내밀었다. 루한은 지금 쇼파 팔걸이에 머리를 뉘이고 천장을 향해 기다랗게 누워있는 상태였다. 그는 한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계속 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지는 탱자탱자 놀면서. 매니저는 제 앞에 있는 것을 탁 하고 닫았다.
그는 지금 귀차니즘의 대명사, 루한이 내린 특명을 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이 정도는 니가 하면 안 되냐! 이게 니꺼지 내거냐고! 그 특명은 바로 이달 말에 출시될 루한의 화보집에 총 300개의 싸인을 해 넣는 것이었다. 매니저는 루한의 머리꼭지를 한 번 째리며 덮은 것을 오른쪽 더미에 올려놓았다. 표지 위에는 눈을 감은 살포시 내려감은 루한이 햇살을 받은 채 포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잘 생기면 다냐. 매니저는 화보집 표지를 가득 채운 그의 얼굴을 흘겨보다가 왼손을 다리 아래로 뻗었다. 아직도 발밑에는 총 256권의 화보집이 가지런히 쌓인 채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흐음. 아직도 안 보네.”
그러거나 말거나 루한은 여전히 폰만 쥔 채 쇼파 위를 뒹굴거렸다. 몸을 옆으로 돌려 눕자 질이 반질하게 든 물소가죽이 아래로 쑥 꺼졌다가 다시 위로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린 그는 다시 손가락으로 화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설마.”
매니저가 미간을 찌푸리며 루한을 쳐다봤다.
“또 여자 생겼어요?!”
그는 이내 펜을 멈추며 신물이 난다는 표정으로 크게 소리쳤다. 며칠 전 여기자 사건이 오늘 아침에서야 겨우 잠잠해진 참이었다. 내가 그거 수습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 아문가 아무난가 생전 처음 듣는 잡지사도 가고 팬카페에 글도 올리고 네티즌인 척 반박글도 쓰고 또 어디서 듣고 온 건지 집 앞에 찾아온 기자 나부랭이들도 다 쫓아내고! 그 동안 이렇게 뒹굴뒹굴 집에만 있었을 루한을 생각하니 화병이 나다 못해 안에서 천불이 날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루한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비껴났다.
“아닌데?”
어.. 진짜요? 그제야 그는 표정을 풀었다. 그래 그동안 집에만 있었는데 무슨..
“남잔데?”
“…….”
“…….”
“...네?!!”
남자라고, 인간 남자애. 루한은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세상에.. 세상에!! 매니저는 이제 펜을 집어 던져버리고 제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쥐었다. 아니 이제 하다하단 안돼서 남자까지.. 저 변태 뱀파이어가 이제는 남색까지 즐기는 모양이었다.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 전세기를 통틀어서 최고의 원나잇 횟수를 자랑할 것만 같던 바로 그 카사노바 루한이 말이다. 그와 계약한 이후 몇 달 동안 제가 보았던 여자만 해도 이미 열손가락을 넘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했다. 그런데 이게 이성 한정이 아니었다니..! 진심 남녀 안 가리고 즐기는 진정한 카사노바였다니! 그는 루한이 곧 몇 년 안에 전 세계 인간들과 그렇고 그런 짓을 하게 될 거라 했던 그 말이, 이제는 단지 농담에서 그칠 일이 아니게 됐다고 생각했다.
“거짓말이죠..”
“뭐래. 진짜야.”
그러나 루한은 단호했다.
“24살 애기래.”
으헝 게다가 나보다 어려..! 매니저는 울상을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 옆으로 누워 찍 눌린 볼이 남이었으면 못 생겨 보일 만도 했건만 루한은 어째 그런 얼굴까지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야이 신아! 얼굴만 잘 만들어놓음 뭐해! 그는 다시 신을 찾아 부르짖었다.
이 자식 감당 못할 거면 애초에 만들질 말라고! 너 혹시 얘 일부러 뱀파이어로 만든 거 아냐?! 니 옆에 두면 하늘나라 어떻게 될까봐? 매니저는 이제 반말을 하다못해 그 위에 욕까지 얹히고 있었다. 그는 혹시 신이 일부러 루한을 영원히 인간세계에 묶어 둔 것이 아니냐는 엉뚱한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얌마 그럼 나는. 나는 어떡하라고! 인간세계의 평화를 좀 지켜달라고!
차마 말은 못하는 매니저가 제 옆에서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말던, 루한은 여전히 제 폰을 붙잡고 다음에 보낼 메세지 내용을 쳐 내려가고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까지 내는데 매니저는 그런 루한의 머리통을 한번 뻥 발로 차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참. 저번에 내가 말한 건?”
그제야 루한은 폰을 얼굴 아래로 내렸다. 눈을 치켜 떠 머리맡에 앉아있는 매니저를 쳐다봤다. 뜨끔 놀란 매니저가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두 손을 아래로 내렸다. 까만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마구 뒤엉켜 있었다.
“음 뭐. 다 됐어요. 근데 대체 뭔 바람이 분 거예요?”
“흐음 글쎄.”
그것은 며칠 전 루한이 전화로 특별히 그에게 부탁한 거였다. 루한은 턱을 몇 번 문지르며 한쪽 입 꼬리를 스윽 잡아 당겼다. 그걸 본 매니저는 오소소 소름이 돋는 팔뚝을 느끼며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어째 저거 수상한데.. 아씨 괜히 해준 거 아냐? 뒤늦게 후회를 했지만 이미 일은 다 끝난 후였다. 그는 아랫입술을 한번 깨물었다.
루한은 즐거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동색 옥이 올려진 탁자 위에는 그가 놓아둔 커피가 차갑게 식은 채 놓여 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곡선 형태를 띤 손잡이에 제 검지손가락 하나를 걸어 그것을 들어올렸다. 기울여진 컵에서 블랙의 투명한 액체가 떨어질 듯 말 듯 곡예를 하며 찰랑였다.
쟤는 꼭 저러더라. 매니저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루한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루한은 여전히 싱긋 웃은 얼굴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는 익숙한 몸짓으로 그것을 천천히 싱크대 안으로 흘려보냈다. 아깝게 왜 저러는 거야 진짜 사이콘가. 매니저의 욕 아닌 욕에도 루한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확인한 폰 액정 위에는 아무 연락도 없었지만 뭐 그것도 상관없었다. 마저 다 따라낸 컵을 옆에 탁 세워 놓고 나온 그는 계단 위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아. 그러다 잠시 뒤돌아 여전히 멍하게 있는 매니저를 향해 말했다.
“나 나갈 거니까 그 때까지 다 해 놔.”
네? 언제 나가는데요? 한 시간 후~
“네?!”
아니 좀 신경을 쓰긴 한 건가. 아무튼 매니저는 급하게 아까 자신이 던져놓은 펜을 찾기 시작했다. 아 어디 간 거야! 이놈의 거실은 쓸데없이 넓어서. 하여튼 도움이 안 돼! 이놈의 집구석까지 꼭 저 썩을 놈의 뱀파이어와 닮았다며 그는 궁시렁궁시렁 욕을 해댔다. 아 찾았다. 여기 있었..! 아!! 씨익 웃던 그는 이내 머리 위로 쾅 부딪히는 돌덩이의 느낌에 눈물을 찔끔 내밀고 말았다. 탁자 밑에 웅크린 매니저는 그 뒤에도 한참동안이나 제 머리를 부여잡은 채 몸을 웅크린 채 있었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게 울컹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나.. 왜...
“쟤랑 계약한 거야!!!!!! 으엉..”
“삼십분~”
“…….”
뒤이어 위층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매니저는 울상을 지우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진짜 다음 달에는 꼭 월급 인상 시위를 벌일 거라 생각하며 말이다.
*
“후우..”
민석은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열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진짜 감기라도 걸렸나..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했다. 그 추운 날 길바닥 위에서 한참을 펑펑 울어댔으니. 한숨을 폭 내쉰 그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눈꺼풀 아래가 뜨끈뜨끈했지만 애써 눈앞의 종이를 시야에 담으려 했다.
‘뱀파이어를 사랑한 여인, 그리고 상처를 품은 채 영원을 살아가는 뱀파이어.’
그것은 며칠 전 친구가 건네준 한 장의 A4지였다. 그는 여주인공을 사랑한 친한 동생의 역할로 오디션을 보러 온 것이었다.
‘사랑.. 뱀파이어와의 사랑, 이라..’
민석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사랑이라니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5년 전 뱀파이어들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거부했다. 인간의 피를 먹지 않는다는 약속보다도 뱀파이어 특유의 본능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더 크게 그들에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그들은 뱀파이어에게 인간과 흡사한 권리를 주는 것은 자멸행위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수많은 과학자들, 철학자들, 역사가들, 그리고 정치가들이 그 의견에 힘을 실었다. 더불어 대기업 인물들도 같은 입장이었고 연예인이나 유명인사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론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전파에 실어 보냈다. 사람들은 그것에 동요되기 시작했다. 인터넷 상 여론에서도 대부분은 뱀파이어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심한 경우는 그들을 거부하겠다는 내용의 서명운동이 시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뱀파이어들은 그것을 단숨에 해결했다. 그리고 당당히 저의 권리를 받아내었다. 그 방법은 바로 사랑이었다.
저희는 인간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피를 먹고 사는 저들의 말을 어떻게 믿느냐고 하신다면 따로 증명해 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긴 세월을 사는 동안 인간보다 아름답고 매력 있는 생명체들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소수도 아니고 다수도 아닌 우리 모두가 입을 모아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원래 인간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당신들과 우리가 상당부분 닮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희와 당신들이 확실히 다르다는 것 또한 압니다. 우리보다 나약하지만 당신들은 하나하나 모두 저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곳에 남아있지만 당신들은 저 별들처럼 태어나고 또 죽습니다. 그렇기에 당신들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지도 모릅니다. 저희는 인간이라는 사랑스러운 존재를 잃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 속에서 그들과 함께 영원을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동안 당신들을 그저 뒤에서 어둠속에서 숨어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저희의 모습을 한번쯤 떠올려 주셨으면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슬픔을 억지로 억누르며 살아가는 삶을 끝내고 싶습니다.
이 말에 넘어간 것은 상당수의 여성들이었다. 실제로 뱀파이어들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 그들은 이미 뱀파이어와 인간 간의 사랑이라는 판타지 속을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여성들에게 한해진 것이 아니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뱀파이어와의 사랑이라는 것에 점점 매혹되기 시작했다. 슬픔과 오열 밖에 남지 않지만 그 순간 만은 반짝반짝 누구보다도 빛날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뱀파이어. 그들이 그렇게 설득 당하게 된 것은 뱀파이어들의 아름다운 외모와 매력적인 언어구사들도 크게 한 몫 했다. 진짜 사람보다 더 아름답고 더 인간적인 말을 하는 그들을 미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인간들이 잘못된 판단을 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뱀파이어들은 인간과의 서약을 제대로 맺은 다음 순차적으로 절차를 잘 밟아서 천천히 부드럽게 인간들과 화합해 가기 시작했다. 지금에야 생각해 보는 건데 뱀파이어들은 분명 인간들을 쉽게 제압할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쓰지 않고 말과 이해만으로 그것도 자신들에게 패널티를 적용하면서 인간들 틈에 뛰어든 그들은 어쩌면 정말로 인간의 따뜻한 품이 그리웠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뱀파이어들은 인간들 옆에 섰고 실제로 그들은 서로 사랑에 빠졌다. 판타지 소설 영화 속에나 있던 일들이 이제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단순한 허상도 상상도 아닌 바로 사실 그 자체였다. 이것은 문화산업적 측면에선 큰 힘으로 작용되었다. 영화와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것은 대부분 뱀파이어와 인간 간의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이미 그들이 사랑에 빠진지는 5년이 다되어 갔지만 그 인기는 아직도 사그라질 줄 몰랐다. 그것은 더 이상 판타지멜로가 아닌 그냥 멜로였다.
‘그거야 아주 이상적인 얘기고.’
민석은 잠시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가 다시 표정을 지웠다. 루한과의 일이 생각난 탓이었다. 자신을 붙잡던 차가운 손길이 아직도 팔 언저리에 남아있듯 생생했다.
어째서 그리도 뜨겁다고 생각한 거지. 민석은 자신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지막 손길은 분명 얼음장 같은 차가움이었는데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 봐도 제 목과 입술 위에 닿던 그 입술은 따뜻함을 넘어선 뜨거움이었다.
또 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런 그가 제 친구와 인터뷰를 해주었다는 것이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그는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제대로 된 만남도 아니었는데. 심지어 자신은 생전 처음 만난 상대방에게 일방적인 인사만 남긴 채 그곳을 뛰쳐나왔다. 소리치고 팔을 뿌리치고. 생각해보니 자신답지 않게 조금 흥분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잘못됐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누구라도 스폰서라느니 꽂아준다느니 그런 말을 들으면 저처럼 흥분을 넘어선 화를 속에 담고 말 것이었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는 동안 갑자기 코트 주머니 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그 안에서 폰을 꺼내든 민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대체 무슨 낯짝인거야.
그것은 루한에게서 온 메세지였다. 그저께부터 시작된 연락은 민석의 계속된 무시에도 끊일 줄을 모르고 있었다. 민석은 액정 위로 뜨는 작은 창을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채 다시 폰을 코트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내용도 그닥 궁금하지 않았다. 보나마나 또 저를 잔뜩 무시하는 말투인 게 뻔히 느껴졌다. 힘들이지 않아도 모른 걸 가질 수 있다니. 그런 인간이, 아니 그런 뱀파이어가 사과 따위를 할리도 없었다.
민석은 순간 놓쳐버린 종이를 다시 주워 올리며 머리를 짧게 흔들었다. 지금은 그럴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저와 함께 순서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이미 절반 이상 줄어버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이제 제 차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얼마 후 자신을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민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바닥 안에 가득 찬 땀을 바지 위로 몇 번 문질러 닦은 후 그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번 달만 네 번째 오디션이었다.
*
터덜터덜 거리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버스에서 내린 민석은 고개를 숙여 코까지 제 목도리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한숨을 쉬자 축축한 공기가 목도리 사이로 피어올랐다.
“망했다.”
보나마나 떨어지겠네. 민석이 피식 웃었다. 몇 번 깜박이는 눈은 건조하게 말라있을 뿐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다만 아까보다 열이 올라 눈꺼풀이 좀 더 뜨끈뜨끈해 져 있었다.
한창 집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놀리고 있는데 순간 아래에서 찹 거리는 소리가 났다. 바닥을 쳐다보니 신발 사이로 검은 물이 이리저리 질척이고 있었다. 낮 시간 때에 잠깐 내린 눈이 사람들에게 밟혀 벌써 다 녹아 흐른 모양이었다. 그가 발을 바닥에서 떼어내자 그 밑에서 뽀글거리는 거품이 일었다. 내일이면 또 얼겠지.. 민석은 제 발을 다시 앞으로 옮기며 생각했다. 오늘이야 눈이 온다고 따뜻했는지 몰라도 내일이면 다시 추워질 거고, 그러면 또 저것들 모두가 빙판길로 바뀌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전까진 아직 저것은 까만 물웅덩이에 불과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어느새 새까맣게 물든 하늘을 쳐다봤다. 새하얀 눈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오늘 낮의 진눈깨비는 그저 사람들 발에 치이고 밟히는 불청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웅덩이는 그들의 발을 더럽히고 빙판길은 탄탄대로 위의 성가신 장애물로 작용할 뿐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랑 비슷하다..”
민석이 피식 웃자 공중에 뿌연 입김이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졌다.
“술 마시고 싶은데.”
아파서 그럴 수도 없고. 민석은 제 이마를 한번 짚어보았다. 열이 더 심해졌다. 아무래도 절 따라주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차라리 집에 가서 얼른 씻고 그만 쉬어야겠다. 그는 한숨을 쉬며 발걸음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거의 집 앞에 도착해 온 민석이 갑자기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제 아파트로 가는 코너 앞 가로등에 누군가 기대 서있는 것이 보였다.
“…….”
주황불빛 아래에 조금은 뿌옇게 보이는 것은 루한이었다. 민석은 이제 제가 몸이 안 좋다 못해 정신까지 혼미해진 것 아닌가 하며 작게 실소를 뱉었다. 헛 게 보이나 싶어 계속 천천히 다가가는데 그것은 허상도 아픈 제가 만들어낸 헛것도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실재하는 루한이었다.
부드러운 얼굴선, 밤색 머리카락, 예쁜 모양의 입술, 풍성한 속눈썹까지. 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그 얼굴은 그날 처음 보았던 그때의 그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루한이 왜 우리집에.. 라고 생각했던 그는 순간 떠오르는 그날의 일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심한 말을 해놓고 무슨 낯짝으로 절 찾아온 건지. 민석은 그가 지금 양심이 있는 자라면 하지 못할 일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 안 보고 싶었어?”
모른 척 그냥 지나가려는 민석을 루한의 목소리가 잡아 세웠다. 민석은 그 자리에 서서 작게 헛웃음만 지었다.
“왜 웃어. 뭐 좋은 일 있어?”
난 없는데. 루한은 제 등을 가로등 기둥에서 떼며 민석을 쳐다봤다. 그리고 성큼성큼 그를 향해 걸어갔다.
다가올수록 선명해지는 루한의 얼굴은 왜인지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였다. 이유도 모른 채 그 미간은 깊게 패여 있었고 눈썹 또한 큰 경사를 이루며 세워졌다. 어두운 곳에서조차 빛나는 두눈 또한 날카롭게 상대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저번에 잠시 보았던 그 일그러진 것과는 차원이 다른 표정에 민석은 저도 모르게 약간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루한의 속도가 더 빨랐다. 팔이 쑥 잡아 당겨지는 느낌과 함께 민석은 제 눈을 꾹 하고 감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몸이 꽉 조여지는 느낌에 그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바로 앞에 다가온 몸이 보였고 동시에 제 허리춤에 감겨있는 팔을 발견했다.
“왜..!”
두 손으로 그 가슴팍을 밀어내려는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운 것이 민석의 이마를 감쌌다.
“너 아파?!”
“…….”
놀라 고개를 드니 루한이 저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 댔다. 민석은 숨도 쉬지 못하고 그런 루한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유리알처럼 반질한 눈동자가 크게 뜨여 저를 온통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안색을 살피는 듯 바쁘게 움직이는 눈동자에 민석은 어쩐지 그런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프지 너?”
“아, 아니에요..”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나와 민석은 일부러 큼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몸이 아프다보니 기능 또한 이상해진 것 같았다.
“아니기는.”
루한은 민석의 새빨개진 귀 끝을 제 입술로 앙 물었다. 열로 붉게 물든 귓가가 금방 루한의 입속에서 제 모양을 달리했다.
“맞는데?”
“앗! 하지 마세요.”
민석이 어깨가 움츠리며 상체를 뒤로 빼자 루한은 그런 그의 허리를 더 꽉 붙들어 매고 한쪽 손으론 턱 선을 감싸 고개를 고정시켰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민석이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인간인 저가 뱀파이어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더불어 자신은 지금 온통 열이 올라 제 몸마저 제대로 가누기 힘든 시점이었다. 귓바퀴를 쓰다듬던 혀가 귓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시계방향으로 뱅글 그 주위를 핥아내더니 다시 밖으로 빠져나왔다. 마지막으로 살짝 귓등을 깨물어 낸 루한이 제 입속에서 민석의 것를 꺼내었다. 타액으로 축축해진 귀 위에는 약하게 잇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아픈 것 맞,”
“대체 왜 그래요 진짜!”
민석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잠시 떨렸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설마 그 짧은 찰나에 두근거리기라도 했다는 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는 두 팔로 힘껏 앞을 밀어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루한의 몸은 생각보다 쉽게 떨어져 나갔다. 왜 자꾸 이래요. 민석은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목울대가 따가워서 그는 어렵게 겨우 침을 삼켰다. 연락은 왜 자꾸 하세요. 정말 난.
“그쪽 같은 거 꼴도 보기 싫은데!”
“씨발.”
루한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순간 고개를 든 민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등 뒤로 가득 소름이 끼쳤다. 뜨거운 이마를 더 이상 느낄 수도 없을 만큼 눈앞의 냉기는 그만큼 빠르게 민석을 잠식했다. 그것은 며칠 전 루한의 집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위압감이었다.
민석이 둥그래진 눈으로 루한을 쳐다보자 그는 다시 작게 욕을 지껄였다. 고개를 몇 번 흔들더니 땅을 쳐다보고 하늘을 한번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민석을 보는 얼굴에는 아까완 다르게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눈을 꿈벅이던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표정을 푼 루한이 머리를 잠시 긁적였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그러고는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사이 민석은 놀란 가슴을 조금 진정시킬 수 있었다. 여전히 목 뒷덜미가 약간 서늘했으나 아까에 비하면 많이 누그러진 것이었다. 몇 분 동안이나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잠시 눈치를 보던 민석이 작게 숨을 내쉬곤 먼저 입을 열었다. 제 아무리 무서운 뱀파이어라도 방금까지 엄청난 위협감을 느꼈던 맹수가 앞에 있더라도. 이번에야말로 그 말은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그러진 음성이 정적 아래로 스며들었다.
“그쪽이 절 얼마나 쉽게 보고 있는 진 모르겠는데.”
“...”
“전 그렇게 쉬운 사람도 아니구요. 저 나름대로 아둥바둥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에요. 사람 무시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야 내가 언제,”
“그래도 참으려 했어요. 무시하고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는데. 그런데 왜 그쪽은 저한테..”
“..잠..”
자꾸만..
무언가 말을 하려던 루한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민석이 말을 잇지 못한 채 울음을 참으려는 듯 제 입술을 세게 깨물고 있었다. 잔뜩 인상을 쓴 얼굴표정에 빨갛게 충혈 된 눈마저 축축하게 젖어갔다. 아씨. 말하는데 왜 눈물이.. 민석은 코트 소매로 눈언저리를 문질러 닦았다. 까끌까끌한 재질에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제대로 말하고 싶은데..
그 모습을 본 루한은 결국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긴 했으나 그것마저도 잠시 묻어두었다. 지금 상황에선 그 어떤 말도 그에겐 좋게 들릴 것 같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연락 안 할게.
민석은 여전히 제 눈만 비벼대고 있었다. 계속해서 붉어지는 눈가를 보며 루한은 그 팔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두 손을 그의 코트 주머니 안에 넣어주었다.
차가운 손이 민석의 눈가를 스쳤다.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가 잠시 시원하게 식혀졌다. 그 손은 곧 민석의 이마를 지나 이내 앞머리를 몇 번 부볐다.
“갈게.”
그런데 연락. 확인은 해 봐. 하나도 안 읽었더라. 민석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루한이 그대로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민석은 그곳에 서서 잠시 코를 훌쩍였다. 또 추운 날 밖에서 울어버린 그였다. 대체 루한은 왜 저를 찾아온 걸까. 생각을 해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아까부터 무언가를 자꾸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루한의 마지막 잔상이었다. 어둠속으로 사라지던,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구두. 탄색의 옥스포드화는 그 가죽의 절단면이 짙은 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만약 제 생각이 맞다면 그것은 그 신발이 오늘의 눈을 맞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쩌면.. 이라고 순간 생각한 민석은 이내 제 머리를 한번 세게 털어냈다. 골이 울리는 느낌이 들면서 머리가 너무 아팠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그럴 리 없어. 가로등 아래 그가 서있던 자리 또한 다른 곳과 달리 보송하게 메말라 있었지만 민석은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주머니 속에서 꺼내든 두 손이 민석의 얼굴을 완전히 감쌌다. 손끝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나쁜 놈. 정말 알 수 없는 놈이라고 민석은 루한을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게 있었다. 그건 며칠 전 뜨거웠던 그의 입술이었다. 오늘도 그랬다. 제 손을, 눈가를, 이마를 스치던 손길은 분명 차가운 얼음장이었지만, 저를 걱정해주던 그 숨결만은 분명 인간과 같은 따뜻함이었다. 심지어 제 이마를 짚어오던 그 손길은 다정함마저 묻어나고 있었다.
어느새 손바닥을 따라 흘러내린 것이 검은 물웅덩이 위로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이었다.
*
“아파.”
천장을 바라보던 눈이 옆으로 돌아갔다. 민석은 고개를 힘없이 툭 옆으로 떨구었다. 베개는 대체 어디로 간 건지 대신 민석의 통통하고 발그스름한 볼이 한쪽만 이불과 얼굴 사이에 끼여 찍 눌러졌다. 벌써 몇 일째야. 뜨거운 숨이 잠시 이불을 적시고 다시 얼굴피부로 와서 닿았다. 민석은 커다란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가 다시 몸을 돌려 천장을 보았다.
옅은 아이보리색 벽지가 시야를 가득 메웠고 그 옆의 뿌연 원형 플라스틱 쟁반 안에 있는 밝은 전등이 눈앞을 어른거렸다.
“으 머리야..”
플라스틱 쟁반 가운데 모여 있는 몇 개의 회색 점을 헤아리던 순간 눈앞이 번쩍 청록색으로 변했다. 민석은 눈동자를 움직이며 고개를 반대방향으로 돌렸다. 이불에 폭 감싸인 몸이 꿈틀거리며 다시 자리를 잡았다.
삼일밤낮을 고열에 시달리던 민석은 오늘도 침대 속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사실 아침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게 눈을 뜨자마자 확인한 폰 화면에선 이미 시각이 열한시가 넘어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집에만 계속 있었더니 그새 게을러졌나. 민석은 다시 제 품에서 폰을 꺼내 화면을 켜보았다.
- 몸은 좀 괜찮아?
친구가 보낸 메세지가 상단 위에 떴다. 그는 짧게 답을 했다. 응 이제 괜찮아!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아직도 목이 조금 따끔거렸고 약간의 미열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이만하면 주위 사람을 굳이 걱정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메세지를 보낸 민석은 다시 화면을 끄려고 했다. 그러나 잠시 그 손가락이 우뚝 멈춰 섰다. 친구와의 대화 몇칸 아래에는 더이상 아무런 말이 오지 않는 방이 있었다. 민석은 그것을 엄지로 살짝 눌렀다. 그것은 루한과의 것이었다. 유독 한마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 미안했어.
과연 그가 보낸 것이 맞을까 민석은 의문을 품었다. 루한이 확인해 보라고 했던 연락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처음은 나랑 만나자니까 라고 시작되었고 중간으로 갈수록 그것은 짜증이 담긴 명령 비스무리 한 거였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가니 끝에는 짧은 사과의 말과 이제는 먼저 연락하지 않겠다는 말만 남아있었다. 마지막 연락은 그와 집 앞에서 실랑이를 벌였던 날밤에 보낸 것이었다. 민석은 그날 높은 고열에 시달리느라 제때 확인을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시간적으로 봤을 때 이 ‘미안했어.’라는 메세지는 그날 그를 만나기 전에 보내진 것이었다. 어쩐지 민석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를 무시하고 있다느니 꼴도 보기 싫다느니. 그의 말은 듣지 않은 채 제 할 말만 잔뜩 내뱉고 있었다.
“나 원래 그런 애 아닌데.”
민석은 평소 제 성격으로 보았을 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는 남의 얘기를 들으면 들었지 자신의 생각은 입 밖에 잘 꺼내지 않는 성향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매번 루한의 앞에서는 제 할 말만 하고 돌아서는지. 익숙치 않은 상황에 민석은 어색하고 얼떨떨한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루한은 정말로 더 이상의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만약 왔어도 보지 못했을 거지만, 루한의 메세지를 확인한 것도 사실 지난 저녁 늦게서야였다, 민석은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동안 큰 폭풍이 자신의 앞을 휘몰아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만약 그 폭풍이 여전히 자신을 쥐고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면 제 몸은 물론이고 가뜩이나 잔뜩 지쳐버린 정신까지 성치 못했을 거라 생각을 했다.
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또 머리 한쪽이 지끈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약이라도 먹을... 어?”
손안의 것이 길게 진동하고 있었다. 이불을 걷은 그는 폰 화면 위로 뜬 전화기 모양을 보며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아래의 발신 번호를 본 순간 민석이 눈을 커다랗게 키웠다. 안 그래도 큰 눈이 고양이처럼 동그랗게 동공을 드러냈다.
뭐지 무슨 일이지?! 그는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혹시라도 뭔 일이 있었나 싶어 괜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 안에서 몇 번이고 저를 재촉하듯 진동하는 것에 민석은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보세요?”
작게 갈라지는 목소리에 그는 목을 잠시 가다듬었다.
“네, 네.”
…….
민석은 가만히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어... 네에?!”
이내 그는 제 입을 가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거운 솜이불이 침대 아래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그걸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커다랗게 떠진 눈이 허공을 계속 바라보았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그는 전화기 너머 누군가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민석은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이상하리만큼 크게 들려오는 시계초침소리에 고개를 돌려 파란 테가 둘러진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민석은 그때부터 허겁지겁 무언가를 챙기기 시작했다. 급하게 움직이느라 몇 번이고 발을 휘청이며 비틀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저를 지끈거리며 괴롭혔던 두통이 이미 느껴지지 않은지 오래였다.
그러고보니 몸이 찝찝한 것도 같았다. 아마 며칠 동안이나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앓던 탓인 것 같았다. 민석은 옷을 챙겨들고 바로 욕실로 향했다. 그 발걸음엔 어쩐지 설렘이 가득 차 있었다.
*
민석은 눈을 반짝이며 앞을 보았다. 그저 아무 특징 없는 평범한 건물 복도였지만 그에게는 첫 데뷔무대를 펼치는 모델의 런웨이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잘 하자 잘 하자. 민석이 작게 중얼거렸다. 꿈에 그리던 순간이었다.
내가, 오디션에 합격하다니!
어제서야 급하게 온 통보였다.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는 이게 꿈인지 생신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믿을 수가 없었다. 거의 나르듯이 도착한 회사에선 저를 아는 사람들마다 환히 미소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드디어 해냈어..”
민석은 코끝이 달아올라 콧잔등을 작게 찡긋였다. 역시 포기하지 않으니 기회가 오는구나. 제자신이 장하게 느껴졌다. 웃음과 울음이 교차하는 기이한 순간이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살짝 밀치며 지나갔다.
“앗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럼. 상대방은 급한 일이 있는 듯 짧게 목례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아 내가 막고 있었네. 무안한 마음에 잠시 머리를 긁적인 민석이 이내 시각을 확인하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도 늦었잖아! 분명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나왔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오래 서있었나? 어디서 그렇게 시간을 지체한 건지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아 민석은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 이럴 시간도 없어. 그는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긴장을 하니 또 손바닥 위로 땀이 가득 차올랐다.
미끄러지는 손에 애써 힘을 줘 문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리며 방안의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둥그렇게 배열된 책상들이 방을 크게 메우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의 얼굴이 일제히 민석을 향해 돌아봤다. 급하게 연락을 받느라 사전미팅도 없이 첫 대본 리딩을 하게 된 까닭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민석은 힘차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괜찮다는 둥 늦지 않았다는 둥 사람들이 웃으며 그를 맞았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밝고 쾌활한 공기에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웃는 얼굴 사이에는 방금 전 복도에서 만났던 여자도 있었다. 아깐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이제 보니 여자는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신인 여배우였다. 귀여운 베이비 페이스의 얼굴이 민석을 보며 한번 가볍게 미소 지었다. 민석도 작게 목례를 했다. 이제야 정말 자신이 성인 연기자로서의 첫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쭉 한 번 주위를 돌아본 민석이 제 자리를 물어 찾아 않았다. 자리에 도착하자 자신 몫의 대본이 책상 위에 올려졌다.
‘산장에서의 그 남자’
가제의 고딕체 글씨가 하늘색 표지 가운데에 크게 적혀 있었다. 민석이 입 꼬리를 올리다 못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볼 윗부분이 위로 부풀어 올랐다. 눈을 한번 느리게 감았다 다시 떠도 눈앞의 하늘색 대본은 그대로 있었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들여 올렸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한가운데 바로 자신의 앞에 있는 신발이 무언가 박자를 타며 바닥을 두드려 대고 있었다. 민석은 그것까지도 거슬리기는 커녕 즐겁게 느껴졌다. 어느새 그것은 다리를 겹쳐 꼬며 한쪽발만 까딱이고 있었다.
그때 어떤 남자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말하는 투나 억양으로 봐서 감독인 분인가 싶었다. 민석은 고개를 완전히 들었다. 그리고 문 쪽으로 머리를 돌리려던 순간 그는 멈칫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책상을 지나 상체, 그리고 곧바로 그 위에 드러난 얼굴. 까딱이던 발이 어느새 멈추어 있었다.
긴 속눈썹이 그를 향해 한번 인사했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던 남자가 이내 얼굴 가득 환하게 웃음 지었다. 눈꼬리가 살풋 접히며 살짝 올라온 두 볼이 어쩐지 수줍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 주위 사람들 한정이었다. 순간 민석은 제 얼굴 위의 표정이 싹 식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남자는, 바로 루한이었다.
[루민] rainbow sherbet #3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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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이입니다
수정본인데 너무 늦게 왔네요ㅠㅠ
원본은 독자님들의 소중한 댓글이 있기에
차마 삭제할 수 없구요
대신 이렇게 새로 올리면서 포인트는 없습니다
상당부분 수정이 됐네요
추가된 장면도 있구요
키스씬은 빠졌습니다 흐름을 끊더라구요ㅠㅠ
댓글은 안달아 주셔도 됩니다!
그럼 4편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뵐게요~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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