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저리, 열여덟.
D
"아니…… 공부 열심히 하라고……."
"엉, 그래…… 너도."
"설아야."
"……어?"
"진짜?"
"응, 너만 괜찮으면."
"너 설명 엄청 잘한다. 완전 머리에 쏙쏙 박히는데?"
"진짜? 다행이다!"
"야, 너 앞으로 나랑 같이 공부할래?"
"……어? 같이?"
"응. 싫으면 말고."
"아, 아니아니, 싫은 건 아닌데……"
"그럼 같이 공부 하는거다?"
"……응! 근데 어디서 공부해?"
"뭐…… 학교 끝나고 도서관 갈래?"
-
"진짜 미쳤다니까? 그러면서 막 웅! 구래! 이러는거야."
"아니 그래서 걔가 누구냐고……."
"그걸 니가 알아서 뭐하게? 탐내지 마라, 죽여버리기 전에."
아니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애 귀엽다고 찬양 해대는 걸 듣고 있어야 되냐? 밥 맛 떨어지게 진짜. 이동혁이 궁시렁댄다. 닥치고 밥이나 먹어라. 머지 않아 협박 섞인 내 말에 입을 꾹 다물었지만. 모처럼 이동혁과 함께 먹는 밥이라 그런지, 더 맛있기는 커녕 내가 한 눈 파는 사이 자꾸만 고기 반찬을 훔쳐 먹는 것 때문에 짜증나서 돌아가시기 일보 직전이다. 적당히 쳐먹으라고 돼지새끼야. 짜증이 잔뜩 담긴 내 말에도 불구하고 이동혁은 쉬지 않고 내 몫의 고기까지 다 입에 우겨넣더니, 그제야 만족스럽다는듯 미소를 지으며 음식을 씹는다. 저러니까 장염이 걸리지.
"그래서, 걔랑 오늘부터 같이 공부하기로 했다고?"
"그렇다니까? 진짜 미친거야 이건. 너 알지, 나 완전 소심한거. 내가 원래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런 말 잘 못하잖아. 근데 아까는 갑자기 용기가 나서 그냥 질러버렸다니까? 나 이제 매일 걔랑 학교 끝나고 도서관 가기로 했어…… 나 어떡하지? 걔가 눈치 챈 거 아닐까? 내가 자기 좋아하는거?"
"니가 소심하다는 말에서 이미 귀 닫았는데."
"진짜 깝치지 마라."
"아 뭐, 근데 걔도 너를 막 엄청 죽일듯이 싫어하는건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아 근데 요즘은 진짜 좀 달라."
"뭐가 다른데?"
"뭐야, 왜 웃냐."
"야, 그런 논리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 좋아한다고 해도 되겠다."
"아니 미친놈아, 이번엔 좀 느낌이 다르다니까?"
"그럼 사귀던가."
"에휴, 말을 말자."
"야, 무슨 짝사랑가지고 운명씩이나 말하냐?"
"이번엔 좀 다르다고…… 진짜 존나 좋단 말이야."
"나같으면 그냥 고백하겠다. 차이면 다른 애 만나면 되지.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는 말 모르냐?"
"병신이냐? 아직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무슨 고백이야. 그리고 차여도 못 잊을 것 같아……."
어이구, 열녀 납셨네. 이동혁의 장난 섞인 말에도 도무지 웃음이 나지 않았다. 그래 뭐, 내가 진짜 김정우를 가볍게 좋아했다면 진작 고백하고 까였을 수도 있겠지. 근데 나 좀 진지하게 좋아한단 말이야……. 나라고 뭐 그만두려고 해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김정우랑 말 한 마디도 안 해 본 날, 또 인터넷에서 짝사랑한테 차인 썰 본 날이랑, 김정우가 너무 잘생겨서 현타 온 날이랑…… 아무튼 엄청 많이 시도는 해봤다. 근데 자려고 누우면 김정우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서 아무리 자려고 해봐도 도무지 잠이 안 오고, 분명히 인사에 대꾸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등교해도 막상 김정우가 내게 손 흔들며 인사 해오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웃고 있는거다. 차라리 김정우가 나한테 못되게라도 굴면 짜증나서라도 싫어하려고 해볼텐데, 착해도 너무 착한 애라 도저히 싫어 할 수가 없다. 뭐가 이렇게 완벽하냐고. 아님 그냥 나 혼자 헷갈리는건가. 왜, 인터넷 보면 다들 그러던데. 자기한테 잘 해 주는 짝남한테 고백했는데, 사실은 그냥 모두한테 잘 해 주는 거였다고…… 난 그런 처지 되기 싫단 말이야. 아, 짜증나.
"안 먹을래."
"그래도 밥은 먹어라, 이따 배고프다고 짜증내지 말고."
"어쩔. 남이사."
"걱정을 해줘도 지랄이, 악!"
"어…… 미안. 설아야 밥 맛있게 먹어."
"어…… 응. 너도 맛있게 먹어."
"……뭐가?"
"맞네, 맞아."
"뭔 개소리야. 닥치고 일어나자."
"아니 일단 이 오빠의 얘기를 들어봐. 연애박사가 조언 좀 해줄테니까."
"아, 뭐래 진짜. 안 좋아하거든?"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혼자 지랄이야. 빼박이네."
"아니라고 병신아."
아니긴 무슨, 너 지금도 눈이 저쪽으로 돌아가는데. 이동혁의 말에 나도 모르게 김정우를 찾던 눈을 돌려 이동혁을 쳐다봤다. 이동혁은 뭐가 그리 웃긴 지 연신 대박, 대박, 을 외치며 웃어댄다. 아, 진짜 눈치는 드럽게 빨라요. 그래서 김정우는 어디 앉아있는거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워낙 많아 혼잡한 급식실인지라 쉽게 김정우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동혁에게로 눈을 돌리니, 아직도 풉풉, 거리며 웃음을 그치지 못한 이동혁이 입을 연다. 아, 근데 사실 예상했어.
"뭐래. 너 쟤 알아?"
"내가 쟤를 어떻게 아냐? 어제 봤지, 니 옆자리."
"난 또 뭐라고…… 근데 잘생기긴 하지 않았냐?"
어, 뭐 나쁘진 않은데. 잘 해봐. 남일이라는듯 어깨를 으쓱하며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이동혁이 얄미웠다. 누군 잘해보기 싫어서 이러고 있겠냐. 아무튼 지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기는. 이동혁을 한껏 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잔반을 버리러 가는 와중에도 괜히 목을 늘려 고개를 기웃대며 김정우를 찾아댔다. 아, 어디 있는거야 도대체. 이럴 때면 김정우가 차라리 눈에 확 띄는 빨간 머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니, 이동혁이 팔꿈치로 내 팔을 툭 치며 고갯짓을 한다. 저기 있네, 니 짝사랑. 놀리는 듯한 말투에 짜증을 낼 새도 없이 이동혁의 고갯짓을 따라 눈을 돌렸다. 드디어 찾았다. 김정우. 나를 등지고 있어 보이는 거라곤 뒷통수뿐이었지만, 아마도 김정우는 지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것 쯤은 알아 챌 수 있었다. 머리가 흔들릴때마다 갈색빛 머리카락도 따라 위아래로 흔들리거든. 근데 정우야, 니 맞은편에 앉은 애…… 어제 우리 밥 먹을 때 너한테 말 걸었던 그 남자애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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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다들 딴 길 새지 말고 집으로 가고. 집에서 복습 한 번씩 꼭 하고, 알겠지? 말을 마친 선생님이 내게 다가와 작게 속삭인다. 상담 있으니까 가방 챙겨서 교무실로 와라. 무슨 상담이지, 나 잘못 한 거 없는데…….새학기 상담을 아직 안 하긴 했는데, 그건가? 교실을 나서는 선생님의 뒷 모습을 보며 별 생각 없이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문득 김정우가 생각났다. 아 맞다, 도서관 가기로 했는데. 고개를 돌리니 김정우 역시 이런저런 교과서로 가득 채워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중이었다. 아씨, 첫날부터 미안해지게.
"야, 그…… 나 갑자기 상담 잡혔는데……."
"어…… 기다릴까?"
"아니 아니, 그냥 너 먼저 도서관 가 있어. 아니면 그냥 내일부터 할까?"
"오래 걸려?"
"잘 모르겠는데……. 쌤이 워낙 말이 많으시니까 아마 좀 걸리지 않을까? 오늘은 그냥 각자 하고 내일부터 같이 하자."
"아……."
내 말에 김정우가 제 양손으로 가방끈을 끌어당기며 입술을 비죽 내민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대답을 망설이는 김정우를 바라보다, 분명 늦게 오면 굼뜬다고 잔소리 하실 선생님이 생각나 서둘러 가방을 맸다. 알겠지? 나 간다, 너도 집 들어가. 조심히! 김정우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준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다시피 교무실에 도착했다. 선생님들은 다들 석식을 드시러 간 건지, 교무실에는 담임 선생님밖에 안 계셨다. 어, 왔어? 여기 앉아봐. 선생님의 말에 조심스레 가방을 내려놓곤 자리에 앉았다. 아, 제발 뭐든 좋으니까 안 좋은 얘기만 아니었으면. 딱히 찔리는 건 없지만.
"보자…… 목표 대학이 꽤 높네?"
"네? 아, 그냥 뭐……."
"이 대학을 목표로 하는 애들이 전교에 몇 명인줄 알아? 니가 그 중에서 몇 번째냐면……."
그럼 그렇지. 새학기가 되면 늘 하는 성적 상담이었다. 예상 하지 못 했던 건 아니지만 막상 내 목표와 현실의 차이를 직접 귀로 전해 들으니 기분이 좋지 못했다. 목표에 한참 미치지도 못 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번 시험에서 꽤 높은 성적을 받아야 안정적일거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네가 노력해야 선생님도 널 도와 줄 수 있는 거야. 선생님의 위로 아닌 위로에 연신 네, 네, 하며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원래 맞는 말일수록 듣기가 싫고, 기분 나쁘게 들리는 거라고 했다. 분명히 부모님이나 친구들보다는 현명하고 객관적인 조언을 해주시고 있고, 나 역시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노력해야지, 열심히 해야지. 하루에도 몇 번은 생각하는 말이지만 실천이 어려운거니까. 선생님은 한참동안을 내게 대학에 관한 얘기를 늘어놓으셨다. 힐끔 본 창문 밖은 주황빛이 차오르고 있었다. 여섯시쯤 됐겠거니, 했다.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네. 아, 기빨려. 얼른 집에 가서 쉬고싶다. 김정우 생각하면서.
"아무튼, 이번 년도가 가장 중요한거야. 알지?"
"네……."
"왜 이렇게 힘이 빠졌어. 올해 바짝 끌어올려보자, 알겠지?"
"네…… 열심히 할게요."
"그래. 그럼 얼른 가 봐. 금방 해 지겠다."
선생님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주워 맸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나서야 교무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교무실의 문이 닫히자 마자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우울해. 목표가 무리인걸까, 내가 그만큼 노력하지 않는 걸까. 어찌됐던 선택은 나의 몫이기에 그 누구도 탓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복도는 적막했고, 벽마다 붙어잇는 창문을 통해 주황빛이 바닥에 스며들었다. 내가 발 디디는 곳 모두가 노을 위였다. 아아, 빨리 집 가서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싶다. 그리고 이어폰으로 노래 들어야지. 소리도 엄청 키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발을 움직였다. 발에 채이는 돌멩이를 힘껏 발로 차기도 했다. 아, 집에 언제 걸어가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한숨을 크게 내쉬는데, 정문에 서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눈에 익었다. 어…… 저 가방…….
"……어?끝났어?"
"……뭐야, 너 집 안가고 여기서 뭐해?"
아 그게, 그냥…… 심심해서. 김정우가 노을 지는 하늘을 뒤로 하고 나를 쳐다보며 웃는다. 우울했던 마음이 눈녹듯 사라진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건, 너였다. 그냥 집 가려다가, 어차피 일찍 들어가면 할 것도 없고…… 너 기다렸다가 같이 도서관 가려고. 김정우가 가방끈을 부여잡으며 말한다. 약간 울컥 할 것 같기도 했고.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상담 한 내용이 슬퍼서? 노을이 예뻐서? 김정우가 나를 기다렸다는게 믿기지가 않아서…… 아니면 노을 앞에 서 있는 김정우가 너무 좋아서?
"음…… 근데, 너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인다."
"……아닌데."
"맞는데? 완전 울상인데…… 오늘은 그냥 집에 갈래?"
"몰라…… 마음대로 해. 빨리 집이나 들어가라고."
"어…… 데려다 줄까? 아, 아니 싫으면 말고!"
진짜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이러는 거냐고. 김정우의 이유 모를 친절에 왠지 심통이 나서, 대꾸조차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지가 뭔데 집에 데려다준대. 남자친구야 뭐야. 지금 지 잘났다고 저러는건가. 와, 설마 내가 자기 좋아하는거 눈치 채고 어장치는거 아니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김정우가 너무 미웠다. 걸음을 멈추곤 냅다 뒤를 돌아보니, 가방끈을 꼭 쥐고 내 뒤를 따라오던 김정우가 당황 한 듯 걸음을 멈추며 눈을 깜빡인다. 순수 한 척 하는 것 좀 봐.
"야, 너 진짜 개짜증난다. 왜 따라오는데!"
"어?따라가는거 아닌데……."
"웃기시네, 그럼 어디가는데?"
"우리집 가는건데……."
"……니네집이 어딘데?"
"시티아파트……."
나 김설아, 김정우를 알게 된 지 1년하고도 2개월만에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 김정우는 우리 아파트에 산다. 뭐 이런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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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담배피면 무슨 기분일까(자살각)."
"뭐!?(헉!)"
"인생이 힘들다……."
"그래도 담배는 안 돼…… 몸에 안 좋단 말이야(ㅠㅠ새우무룩)."
"아니 그걸 누가 모르냐고, 당연히 농담이지……(김정우 ㄱㅇㅇ)."
"농담도 무슨 그런 농담을…… 에바킹스킹스킹스다 진짜."
"그놈의 에바킹스 좀 집어쳐라(머 이렇게 기엽지;;)."
"에바킹스킹스킹스!(히히)"
"……병신이냐(ㅠㅠ귀여워 사랑해)."
"미안……(ㅠㅠ욕먹어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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