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속 사랑
by. 펜촉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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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 좋아하는데."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 되었다. 박지민의 말에 난 그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턱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가리며 박지민을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한껏 커진 눈을 깜박이며 멍한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한 머릿속에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목석이 된 것 마냥 움직이지도 못했다. 저게 무슨 말이지? 날 좋아한다고? 왜? 설마 이것도 꿈인가? 이런 저런 생각에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던 우리는 툭하고 떨어진 박지민 후드집업에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야, 넌 남의 걸 그렇게 막..."
"아, 미, 미, 미... 미친 놈아!"
대뜸 자신에게 들려오는 욕에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박지민에 난 다시 입을 틀어막을 수 밖에 없었다. 미친. 미안하다고 하려 했는데... 중학교 때 이후로 박지민에게 절대로 욕을 하고 있지 않았던 나였기에, 박지민과 나 둘 다 놀란 듯 싶었다. 그대로 빠르게 후드집업을 들어 박지민에게 대충 던져준 나는 도망치 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에도 멈추지 않고 뛰어 반으로 들어갔다.
반으로 들어가자마자 종이 치는 바람에 다행히 박지민이 따라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침부터 자꾸 머릿속이 빙빙 돈다. 미칠 것 같다. 좋아한다니, 나를? 박지민의 고백에 그저 멍하니 앉아 허공을 응시하다 웬일로 조용한 우리 반에 두리번거리니 아무도 없었다. 잠깐, 지금... 등골에 소름이 쫙 끼치며 본능적으로 체육시간이란 걸 알아챈 나는 급하게 사물함을 열어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바지를 갈아입다 사물함에 정강이를 부딪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기도 하며,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아까 박지민의 고백에 멍한 정신으로 준비운동 겸 운동장을 뛰다 결국 넘어져 버렸다. 다행히 박지민은 전재산을 잃지 않게 되었다. 체육복 바지를 올려보니 아까 사물함에 부딪혀 멍든 정강이 위로 상처가 생겼다. 오늘은 정말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선생님께 다쳤다는 걸 알리고 보건실로 향했다. 보건쌤이 안 계시는 건지 문이 잠겨 있었다. 체육 하기도 싫고, 보건쌤이 금방 올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보건실 앞에 쭈구려 앉아 피가 송글송글 맺혀있는 상처에 바람을 후후 불고 있었다.
"누나, 여기서 뭐 해요?"
내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정국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정국이를 쳐다보니 그 동그란 눈으로 날 내려보다 내 앞에 쭈구려 앉았다. 고개를 갸우뚱 거리더니 곧 내 무릎에 난 상처를 보고 기겁하며 놀라는 정국이에 나까지 움찔하며 몸을 뒤로 뺐다. 누나, 넘어졌어요? 피나는데. 내 다리에 손은 직접 못 대고 안절부절 못하던 정국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열쇠를 꺼내 보건실을 열었다. 그걸 네가 왜 갖고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정국이를 보니 어깨를 으쓱이며 날 일으키곤 보건실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혔다.
"저 보건실 청소라서요."
"아... 근데 왜 이 시간에 나왔어? 수업 끝났어?"
"수업은 아직 한참 남았고요. 잠깐 화장실 가려고 나왔다가 누나 보이길래요."
대충 보건실 선반을 뒤적거리던 정국이 소독솜을 꺼내 내 앞에 쭈구려 앉아 상처 위를 살살 닦아내주었다. 심하게 안 까졌어도 상처 위로 보글보글 거품이 살짝 일어나며 따가운 통증이 느껴져 입을 꾹 다문 채로 움찔거렸다. 그런 날 힐끔 쳐다보던 정국이 코웃음을 치더니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살살 펴바르곤 뽀로로 밴드를 붙여주었다. 학교에 이런 것도 있네. 정국이 상처 위로 호오, 하고 바람을 불어주고선 몸을 일으켜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그거 아무나 붙여주는 거 아니에요."
"그럼?"
"그거 보건쌤이 예쁜 애들한테만 붙여주는 거거든요."
"누나 예쁘잖아요."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낯간지러운 말을 내뱉은 정국이에 지금 틴트도 안 바른 내 쌩얼이 예쁘다는 건가, 싶어 미간을 찌푸리며 정국이를 쳐다보았다. 내 표정에 큭큭 웃던 정국이 몸을 일으키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수업 안 가요? 정국이의 말에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20분 정도 남은 수업시간에 아차 싶어 몸을 일으켜 보건실을 나왔다. 날 뒤따라 나온 정국이 보건실 문을 잠구고 날 마주보았다.
"누나. 오늘도 박지민 형이랑 가요?"
"어? 아, 그, 어..."
"저랑 같이 가면 안 돼요?"
"아, 그럴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심정으론 박지민이랑 같이 하교를 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정국이랑 가기에도, 좀... 부담스러운데. 그렇다고 혼자 집에 가기엔 무섭다. 부담스러운 건, 내가 참으면 되지. 동그란 토끼 같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정국이의 눈빛에 눈치를 보며 고민을 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자. 내 대답에 환하게 웃은 정국이가 내 손을 덥썩 잡았다. 그 손길에 놀라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며 손을 확 빼버렸다. 순간 나도, 그리고 정국이도 서로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손을 뒤로 숨기며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스킨쉽 별로 안 좋아해서..."
"맞다, 깜박했어요. 사탕 주려고..."
"아, 사탕... 진짜 미안, 정국아. 당황했지..."
"괜찮아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사탕을 하나 꺼내 내게 내민 정국이에 미안한 만큼 환하게 웃으며 사탕을 받았다. 고마워, 잘 먹을게.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정국이 귀를 빨갛게 물들이더니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저랑 꼭 같이 가야 돼요. 이따가 끝나고 누나 반 앞으로 갈게요. 이따 봐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여는 정국이에 웃음이 나올 뻔한 걸 꾹 눌러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가라는 듯 정국이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정국이가 멀어질 때쯤 나도 몸을 돌려 다시 운동장으로 향했다. 가만 보면, 연하 답게 귀여운 구석이 참 많다.
정국이는 작년까지 내가 차장으로 있었던 영상 동아리 부원이다. 남자라면 꼭 거리를 유지하는 나였기 때문에, 정국이도 한 땐 어렵고 불편하기만 했던 후배였지만 유독 날 잘 따르고 잘 도와줘서 그런지 그 누구보다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정국이는 나에게 친한 후배, 동생 그 이상은 아니었는데 정국이는 달랐다. 내가 아무리 맹하고 눈치가 없어도, 이 정도면 눈치 채지. 정국이 마음을 대충 눈치 챈 이후로는 정국이가 마냥 부담스럽기만 했는데,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 같았다. 그때처럼 그런 분위기만 안 생기도록 하면 되니까.
꾹 쥐고 있던 손을 펴 보니 그때 그 레몬사탕이었다.
-
체육시간 이후 남은 수업들과 쉬는 시간까지 박지민은 날 찾아오지 않았다. 오늘 같이 날 더 챙겨주는 날엔 매 시간 꼬박꼬박 찾아와 날 살펴보고 가던 녀석이었는데, 아까 내가 도망친 이후로는 머리카락 한 올 안 보인다. 내가 피해 다닐 필요는 없어진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피하는 것보단 그 녀석이 날 안 찾는 게 더 자연스러우니까.
종례가 끝난 후, 아까 정국이가 우리 반으로 온다고 했었기에 난 그냥 느긋하게 가방을 쌌다. 박지민네 반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건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정국이가 빨리 와 박지민이 오기 전에 학교를 빠져나가고 싶었다. 아무도 없이 텅 빈 교실에 홀로 앉아 주황색으로 점점 물들어가고 있는 창 밖을 쳐다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으니 좀 살 것 같은 느낌에, 가만히 창 밖만 바라보다 벌컥 열리는 문에 고개를 돌렸다.
"누나."
"김여주."
벌컥 열린 앞문과 뒷문엔 각각 박지민과 정국이가 서 있었다. 정국이를 힐끔 쳐다본 박지민이 저벅저벅 내게 다가오더니 너 나랑 할 얘기 있잖아, 라며 내 손을 붙잡고 그대로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박지민에게 이끌려가며 정국이에게 사죄할 수 밖에 없었다. 아까 나랑 같이 간다고 토끼 같은 얼굴로 좋아하던 정국이였기에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아까는 그렇게 안 찾아오더니, 하교 할 때 돼서야 같이 가자며 무작정 날 끌고가는 박지민이 괘씸하기만 했다. 아니, 뭐... 그렇다고 찾아와주길 바란 건 아니고. 긴 다리로 휘적휘적 운동장을 가르고 걸어가는 박지민에게 이끌려 비교적 짧은 다리로 힘겹게 따라가다 결국 박지민 손을 뿌리치고 옆에 섰다.
"야, 너랑 나랑 무슨 할 말이 있어? 나 정국이랑 가기로 했단 말이야."
"너 이제 남자랑 다녀도 괜찮아?"
"그, 그건 아닌데... 정국이는 괜찮아. 나랑 정국이랑 친한 거 알잖아."
"너 그때 김태형 그 개 같은 새끼랑도 친하다고 그랬어."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욕과 김태형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며 나를 쏘아붙이는 박지민에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나 왜 혼나는 기분이지? 항상 울기 직전, 화 내기 직전에 입술을 꾹 다무는 습관이 있는 나였기에 박지민이 그런 내 표정을 보고 아차 싶었는지 신경질적으로 자기 머리를 헝클였다. 여주야, 미안. 그리곤 늘 그렇듯 미루지 않고 빠르게 사과를 해왔다. 됐어. 그리고 난 늘 그렇듯 그 사과를 퉁명스럽게 받아주었다. 이렇게 서로에게 늘 그렇고 그런 존재로,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존재인데 내가 박지민에게 고백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절대 잃지 않고 싶은데.
"그래서 할 말이 뭔데. 난 너한테 할 말 없는데?"
"내가 너 좋아한다니까."
다시 미친 듯이 쿵쾅대는 심장에 숨을 흡 들이키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숨을 꽉 참아내며 박지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까와 달리 눈빛에 장난기가 잔뜩 담겨있었다. 가만히 박지민 눈을 쳐다보던 나는 몸을 돌려 먼저 걷기 시작했다. 날 좋아한다는 박지민의 말은 그냥 장난이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미친 듯이 쿵쾅대던 심장은 그냥 그대로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다행이었다. 다행이었어도, 난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차있었나 보다. 기분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같이 가자."
"따로 가자."
"같이 가."
"다섯 발자국 뒤로 가, 너."
낮아진 내 목소리에 날 따라오던 걸음 소리가 살짝 멀어졌다. 그대로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박지민은 아마 지금쯤 영문도 모른 채 내 눈치를 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나도 모르게 가라앉은 기분을 풀 생각이 없었다. 어쨌든 날 상대로 장난친 건 맞으니까. 그것도 자기를 짝사랑하는 나를. 집으로 가는 길에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심호흡처럼 한숨을 계속 뱉어냈다. 어느새 다가온 박지민이 내 입을 자기 손등으로 살짝 막았다. 한숨 그만 쉬라는 의미였다. 박지민 손을 밀어내며 힐끔 노려보니 주인한테 혼나 풀이 죽은 강아지 마냥 안 그래도 축 쳐진 눈꼬리를 더 늘어뜨리며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진짜 웃기다. 너도, 나도.
"왜 화났어?"
"안 났어."
"내가 전정국 그 녀석이랑 못 가게 해서 그래? 아니면 김태형 그 새끼 얘기 꺼내서?"
"둘 다 아니야. 화 안 났다니까?"
나도 모르게 틱틱 내뱉는 말투에 박지민이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더니 다시 내 뒤로 다섯 걸음 물러났다. 고개를 홱 돌리고 그대로 다시 걷기 시작해 집 앞에 다다랐다. 아파트 현관 앞에서 계단 아래에 있는 박지민을 바라보고 손을 까딱 흔들었다. 오늘도 땡큐. 그대로 몸을 돌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니 날 따라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뒤 돌아보니 여전히 내게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채로 날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지금은 아직 저녁이긴 하지만, 늦은 밤이면 엘리베이터 타는 것까지 봐주던 녀석이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런데 녀석도 엘리베이터에 오르더니 내 옆에 바짝 붙어 섰다.
"뭐야?"
"엘리베이터에서는 어쩔 수 없잖아."
"아니. 집 안 가냐고."
"지원이 여기서 내렸대."
지원이라는 말에 나는 언제 기분이 안 좋았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박지민을 쳐다보았다. 지원이는 박지민의 4살짜리 여동생이었다. 바쁜 이모와 이모부에 어린이집을 다니는 지원이는 가끔 우리 집에서 내려 엄마와 시간을 보내다 박지민이 데리고 가곤 했다. 박지민이 유독 나를 잘 챙겨주고 다정한 이유도 지원이가 한 몫 했다. 누구는 중2병이 와 반항할 시기에 동생을 맞이한 박지민은 그 누구보다 빨리 철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기를 좋아하는 나는 지원이가 아주 아가였을 때부터 박지민 집에서 거의 살다 싶이 놀러가 지원이를 봐주곤 했다. 지원이가 우리 집에 있다니. 오랜만에 우리 집에 왔다는 지원이에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헤실헤실 웃으며 층 바뀌는 표시만 보고 있었다.
"기분 풀렸어?"
오늘은 지원이랑 뭐 하고 놀까, 저번에 사둔 색칠공부나 꺼내줄까, 하며 행복한 상상에 빠져있던 내 얼굴 앞으로 박지민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기분 풀렸냐며 특유의 다정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박지민과, 엘리베이터라는 공간이 오늘의 꿈과 너무나도 비슷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로 피하려 했지만 이미 난 엘리베이터에 등이 닿아 있는 상태였다.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박지민이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에 묻은 먼지를 떼어주었다. 기분 풀렸네, 김여주. 그리곤 바보 같이 웃으며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 쓰다듬는 정도야 항상 받았던 건데, 오늘따라 가슴 한 켠이 더 간질간질하고 두근거렸다. 그대로 난 무언가에 홀린 듯 까치발을 들었다.
쪽.
살짝 맞닿았다 떨어진 입술은 꿈 속에서보다 훨씬 더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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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티 안 낸다면서 먼저 뽀뽀하는 바보 여주 (͡° ͜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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