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w. 채셔
4
그렇게 화난 얼굴을 처음이었다. 발가벗겨진 연희를 한 번 본 정국은 이를 악물었다. 곧 내 손목이 으스러질 듯이 아파왔다. 연희는 고개를 숙이고 제 가슴을 가렸다. 눈물이 큰 눈에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하얀 몸 위로… 정국의 큰 가디건이 얹혀졌다. 괜찮아. 내게 경고하던 목소리와는 달리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다정하고 순한 톤이었다. …괜찮다는 말은 나에게 했어야 된다. 정국의 아내가 될 사람은 나였고, 나뿐이어야 했다. 괜찮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모두.
"저는… 괜찮아요."
"………."
"그러니까 화내지 않아도 돼요, 오빠."
"……뭐?"
"제가 아가씨 옷 함부로 입었어요…. 아가씨 옷인 줄도 모르고…."
연희는 되려 나를 동정하고 있었다. 연희는 절대적 선의 존재였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착한 사람. 그래서 정국이 나를 더 싫어하는 걸까. 정국은 나를 쳐다보더니 문을 가리켰다. 나가. 정국은 냉정한 말투로 명령하듯 말했다. 그러나 나갈 수가 없었다. 연희의 앞에서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이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비참해서였다. 나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가녀린 몸을 감싸고 있는 가디건을 쥐었다. 연희가 흠칫 놀라자 나는 그대로 끌어내렸다. 다시 눈이 부실 정도로 티 하나 없는 연희의 몸이 드러났다. 이내 힘 빠진 웃음소리를 내자 연희가 떨기 시작했다.
"내가 왜?"
"………뭐?"
"나 이 집 안주인이야. 아가씨잖아, 나."
허탈한 듯 웃다가 나는 불같이 연희의 뺨을 올려쳤다. 연희의 입술에서 피가 새어나오자, 정국의 입술에서 나즈막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만하라고 했지. 정국은 나른하게 말했지만 그 시선은 건조했다. 팔을 다시 들어올리자 연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빠르게 볼을 치려던 손이 이내 허공에서 멈췄다. …정국이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그 힘이 세서 연희의 뺨으로 더 갈 수가 없었다. 정국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 손목이 부서질 것 같았다. 입술을 물고 아픈 티조차 내지 않는 나를 보다 정국은 나를 끌고 침실로 들어섰다. 작작해. 잡혀있는 손목을 빼려 여러 번 비틀었지만, 그럴수록 정국은 더욱 세게 손목을 틀어쥐었다. 방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이내 제 열을 식히려는 듯 연신 한숨을 내뱉던 정국은 난장판이 되어 있는 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뭘 찾으려는 거야, 너."
"……말해주면 제대로 알려줄 의향은 있어?"
정국은 이를 한 번 앙다물었다가 천천히 서랍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정국에게서 마침내 풀려난 손목에는 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를 잡아먹을 듯 하던 눈빛이 이제는 오히려 차분해진 느낌이었다. 어느 쪽이든 정국의 분노가 느껴지는 건 당연했지만.
"뭐가 됐든 찾지 마."
정국은 차분히 앉아 물건을 정리하면서 내게 말했다. 나른하게 말했지만 그 얼굴에는 완고함이 잔뜩 서려 있었다. …태형이 보고 싶어, 한국 불러줘. 나는 손목을 어루만지며 작게 말했다. 내가 본대로 태형이 죽었다고 사실대로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면 용서해줄지도 몰라. 정국은 지민과 태형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발 진실대로 말해달라고 빌었지만, 그런 건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보육원에 있다고 했잖아."
정국은 정리를 마친 뒤 일어섰다. 태연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온 정국은 파스를 건넸다. 어느새 정국이 잡았던 곳이 퍼렇게 멍이 져 있었다. 멍보다 아픈 것은 따로 있었다. 그만 좀 해, 이제.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내게 던지는 정국의 말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선을 넘지 말라는 듯한 그 눈빛이 내 심장을 옥죄는 것 같았다. 방을 나가는 정국의 등을 보다 주저앉아버렸다. …태형이는 정말 죽은 걸까.
아가씨
속에 있는 응어리 같은 것들이 풀리지 않아서 손에 잡히는 것들을 모조리 던졌다. 유리잔이 깨지는 굉음이 방을 울렸다. 힘이 빠져서 가만히 앉아 지민에게 전화를 했다. 이번에도 무작정 집에 오라는 명령조의 말이었고, 지민은 몇 초간의 정적 후에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컵 조각들이 흩어진 곳을 피해 침대로 향했다. 태형이. 태형의 말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태형이는 아가씨가 너, 너무 좋아. 그렇게 대뜸 말해오는 태형을 안아주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되려 태형이 호되게 혼났었다. 태형은 어쩔 줄 모르고 바닥을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굴렀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태형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내 손목을 꽉 잡아서 가지 못했었다.
"아가씨, 저 왔어요."
밖에서 비밀번호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문을 조용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지민이었다. 지민은 침대에 멍하니 걸터 앉아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한숨을 쉬던 지민은 허리를 굽히고 나의 시선에 제 눈을 맞추었다. 지민의 눈길은 젖어 있었다. 나를 동정하는 것 같기도 했고, 상처를 입은 것 같기도 했다. 문득 본 바닥에 피가 뚝뚝 떨어져 있었다. 지민은 내 발을 잡아들고 피가 주욱 흐른 근원지를 찾아냈다. 제발 몸 좀 소중히 여겨요…. 피한다고 피했는데 유리 조각에 발을 다친 모양이었다. 지민은 아프게 말하며, 내 발을 유심히 쳐다보다 유리 조각을 빼냈다. 그제야 아픔이 느껴져서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불을 꽉 쥐었다. 곧 지민은 가방에서 반창고를 꺼내어 이리저리 붙여주었다. 저번에 붙여줬던 반창고와는 다른 모양이었다. …이상하다. 지민은 한 곳에서만 물건을 사는 편인데.
"지민아…."
"네, 아가씨."
"나 어때 보여?"
"…예뻐요. 늘… 예뻤어요."
지민은 반창고로 발을 감싸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나 심장이 너무 아파. 작게 말했지만 지민은 '네?'하고 되물어왔다. 차라리 듣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민에게 약한 모습 같은 건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지민과 태형에게는 괜히 그런 마음이 있었다. 특히 태형에게는…, 아버지의 학대를 멈추게 할만한 권력을 갖고 싶었다. 정국의 아내가 되어서 그룹의 안주인이 되면…. 나는 그 힘이 절실했다.
"지민아…."
"네, 아가씨…."
"…태형이, 죽었어?"
반창고를 세심하게 붙이던 지민의 손길이 뚝 멎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골똘히 생각하는 작은 머리를 바라보았다. 잠시동안의 정적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니면 보육원에 있어? 지민에게 다시 물었지만, 이번에는 지민이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지민이 반창고를 채 끊어내기도 전에 나는 지민의 뺨을 때렸다. 말해. 입술을 앙 다물고 지민을 노려보았다. 때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빨개진 지민의 뺨을 바라보다 다시 말하라고 화를 냈다. 유일하게 집안에서 믿어왔던 사람이었는데…. 한순간에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 죽었어?"
"괴한한테 당했어요. 미국에서."
지민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면 누가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숨을 빠르게 내몰아쉬다가 내 가슴을 퉁퉁 쳤다. 숨이 잘 쉬어지질 않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눌러 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온통 피가 몰리는 듯한 가슴을 계속 두드렸다.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지켜보던 지민은 이내 나를 꽉 안았다. 아가씨, 그만해요…. 아가씨……. 지민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지민을 밀쳐내려 했지만 지민은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계속 안아주었다. 태형이가 어떻게 죽어…. 태형이가… 어떻게 나를 떠나…….
아가씨
기력이 없었다. 울다 지쳐 다시 일어났을 때는 내 옆에 정국이 앉아 있었다. 귓가에 끊임없이 지민이 미안하다고 울먹이는 소리가 웅웅거렸다. 정국은 지민의 밴드가 붙어 있는 내 손을 바라보았다가 반창고로 덕지덕지 포장되어 있는 발로 시선을 옮겼다. 너도 참 지독하다. 정국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정국에게 말했다. 이상하게 자꾸 울고 싶었다. 지민처럼 정국이 나를 안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 집에 붙어있고 싶어?"
"……."
"그렇게 나랑 결혼하고 싶냐고."
매몰찬 말에 나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눈물을 닦을 힘조차 없었다. 정국은 손을 뻗어 흐르는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예상치 못한 손길이었다. 곧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연희가 죽이 담긴 그릇을 들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연희가 내미는 쟁반을 받아들고 정국은 나가 있으라고 살갑게 말했다. 나한테도 그렇게 다정하게 좀 말해봐…. 정국은 죽을 떠서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조용히 죽을 받아먹었다. 태형이 죽은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뭘 해야 하는 걸까.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까. 장례식도 치르지 않은 걸 보면 이건 알려져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다.
"이연희 내보내줘."
"……."
"내보내라구, 제발…."
정국의 이상한 케어를 받으면서 최대한 담담히 말했다. 숨이 제멋대로 쉬어지지 않아 입술이 떨렸다. 그러고보니 아까 파스를 보고 거들떠보지 않았었는데, 내 손목에 파스가 붙여져 있었다. …반창고도 정국이 붙여준 걸까. 그런 상상을 하다 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죽을 떠다주는 정국의 표정은 무심하다 못해 표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듯이.
"나는 당신이 미워…."
이 상황이 싫었다. 나는 진심을 원했다. …무엇이든 정상적인 형태의 사랑을 원했다. 기괴하게 비틀린 관계들을 생각하며 나는 끝끝내 울어버렸다.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정국은 죽을 떠먹여주던 숟가락을 놓고 가만히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내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정국은 그저 어딘가를 맞은 사람처럼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심한 표정도 아니었다. 그저 아주 견디기가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제발…."
"……."
"내 앞에서 울지 마…."
무언가 마음을 다 잡는 듯한 목소리로 정국은 힘겹게 말했다. 정국의 몸이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떨리고 있었다.
덧붙임
글이 많이 늦어졌죠. ㅠ_ㅠ 그래도 분량 낭낭하게 쓰려고 노력했는데 괜찮나요?
여주 너무 불쌍해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쓰는 저도 미안할 정도지만..
암호닉은 다음에 정리해서 올릴게요. 오늘도 출석 체크 땅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