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차리자 변백현, 네가 언제부터 이런 사람이었어. 아무리 여자같이 생겼다고 -물론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여자 대하듯 하는 도경수가 또 마음에 들지 않아, 어깨에 걸쳐진 도경수의 팔을 옆으로 치웠다. 아무런 반항 없이 내려가는 팔을 옆에 두고 저 멀리 사라져가는 도경수 친구의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는데, 왠지 모를 부담스러운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도경수가 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가 와서. 일부러 데려온 건 아냐."
"아.. 친구도 같이 내려와서 사는 거야?"
"아니, 쟤는 그냥 잠깐 왔어. 오늘 밤에 다시 올라가."
다시 올라가같은 소리 하고 있네, 서울 가는 마지막 기차는 벌써 떠난지 두 시간도 넘었을 텐데. 택시도 안 다니는 시골 바닥에서 뭐, 걸어가기라도 할 거야? 따박따박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 나온 건 또 으응, 그렇구나. 왠지 모르게 주눅든 목소리. 정신 차리라니까? 왜 도경수 앞에만 서면 자꾸 의기소침해지는지 모르겠다. 이 새끼 혹시 옛날에 나 때리고 뭐 그랬던 거 아냐? 괴롭혔나? 일진이라던지, 뭐 그런 거?
"백현아."
"..으악!"
한참을 대답이 없던 내가 걱정 됐는지, 툭툭 쳐오는 도경수의 손길에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미안, 네가 혹시 아주 오랜 옛날 어쩌면 초등학생이었을지도 모르던 시절에 날 괴롭히던 일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지금 날 때리는 줄 알고 놀랐어. 라고 하면 도경수가 믿어줄까. 팔을 슥슥 쓰다듬으며 어색하게 흐르는 정적을 깨려 헛기침을 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어 또 한번 자책을 하던 와중에, 한 번 더 도경수가 입을 열었다.
"백현아."
"응."
"너는 내가 누구같아?"
"..스토커."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대답하니 도경수는 뭐가 또 그리 즐거운지 큰 소리로 웃어댔다. 일진이라고 안 하길 잘 했네, 스토커라고 한 게 그렇게 웃겨? 괜스레 민망한 마음에 웃어대는 도경수의 허벅지를 쿡쿡 찌르니 그제서야 도경수가 웃음을 멈추고 다시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보면 스토커일 수도 있겠다."
"..."
"답답할 거 알아, 나도 너한테 알려주고 싶은게 더 많은데,"
"..."
"아직은 그럴 수가 없어."
솔직히 말하면 궁금했다. 알고 싶고, 더 들려달라고 조르기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색할 수 없었고, 재촉할 수 없었다. 내가 점점 내 의지를 잃어가고 있을 때, 그제서야 어긋난 듯 딱딱 들어맞는 도경수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 앞에서 자꾸만 기웃거리는 모기를 짝, 소리를 내며 잡으니, 손에서 검붉은 피가 묻어나왔다. 괜히 화풀이라도 하는 듯 손에 묻은 피를 정자 바닥에 거칠게 닦아냈다. 대답이 없는 내가 걱정되는지 도경수가 자꾸만 내 표정을 살피려 하는 걸 보고, 더 투정부리듯 표정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푹 숙였다. 뭐가 그렇게 속상하니 백현아, 혼자 뭐 하는 거니 지금.
"그래도 이거 하나는 말해줄 수 있겠다."
"뭐."
"어떻게 들릴진 모르겠는데."
"..."
"너는 내 평생이었어, 백현아."
..어떻게 들리냐고? 별로 좋게 들리진 않는다, 경수야. 네가 평생이란 말을 길 가는 아무나 붙잡고 툭툭 내뱉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는데, 그렇다면 난 지금 이게, 네가 옛날 언젠가 날 지켜봤다거나, 날 그리워했다거나, 아니면 날 좋아했다거나. 그런 말로 들리거든. 그리고 저번에도 분명히 말했던 거 같은데, 나 좆 달렸거든, 가슴도 없고 목젖도 튀어나왔거든. 옆집 오빠 생각에 새벽잠을 설치는 소녀마냥 도경수 생각으로 온 종일 보냈으면서, 나 스스로조차도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정작 자꾸만 계속되는 도경수의 여자 취급에는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물론 도경수 입으로 이게 여자 취급이라고 한 적은 없고, 다 나의 지레짐작일 뿐이지만.
"그리고 나는 네 과거, 넌 기억 못하는 것 같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해."
소름 돋아서 못 들어주겠네, 우리가 무슨 저 옛날 남일초등학교 2학년 4반 단짝커플 출신이니? 난 그런 미친 과거 가진 적 없거든. 무슨 이유 때문에 네가 나를 그렇게 평생동안 그리워했고 보고싶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말대로 난 네가 기억 안 나. 그러니까 거기까지 해, 천천히 하자며. 근데 너 너무 앞서나갔어. 이제는 도경수 옆에서 도경수 몰래 도경수를 씹는 게 습관이 된 것 같다. 나름대로 기분이 나빠진 난 또 다시 정자에서 뛰어 내려가선 도경수에게 등을 보이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반응이 싸늘하니 당황스럽겠지, 근데 너만 당황한 건 아냐. 내가 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네 앞에만 서면 이상해진다니까.
"..미안, 말이 좀 이상했나."
"미안할 건 없고, 나 가봐도 될까."
"..어, 내일 보자."
"안 올 거야."
사실 난 내가 내일 또 올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내일도 오고, 모레도 오고, 매일 매일 도경수에게 등을 보이며 걷겠지. 그리고 내일도 모레도, 난 오지 않을 거라고 할 지도 몰라. 도경수야, 넌 아직 나한테 그런 사람이거든.

인스티즈앱
AAA 지금까지 뜬 여배우들 기사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