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춰둘 내용을 녹빛으로 된 커튼을 젖혔다. 저 지평선 너머로 뜨기 시작한 해를 보며 경수는 미소지었다. 손에 들린 담배와 방 안의 남자를 훑은 경수의 눈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손에 붙은 담배는 아직까지도 타고 있었다. 경수는 미동없이 죽은 남자의 얼굴을 보며 말갛게 웃어보였다.
"미안." 끝이었다. 경수는 매끄럽게 제자리에서 돌아 바닥에 내던져진 외투를 주워들었다. 손에 들린 담배를 한번 깊게 들이 쉰 경수가 아무도 없는 허공으로 후, 하고 길게 뱉어냈다. 그 연기는 경수의 주위를 돌아 제법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집 안을 뒤져 하얀가루가 잔뜩 든 봉지를 꺼내 가방안에 챙긴 경수가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기 전 불이 붙은 담배를 그대로 집 안에 던진 후 천천히 손짓했다.
"안녕."
붉게 춤추듯 불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경수는 미소지었다. 저 남자도 이 집도 자신이 이곳에 왔다는 증거도 다 타들어갈테다. 마치 한 줌의 바람처럼 아무도 모르게. 그 날 그 때처럼.
은빛의 세단이 매끄럽게 고급스러운 바 안으로 들어섰다. 바 문패에 CLOSED라고 적혀있었지만 경수는 신경쓰지않고 바 안에 몸을 들였다. 접시를 닦고 있던 남자가 담배를 문 채 바 안으로 몸을 들이는 경수를 보며 웃어보였다. 의외로 성공했네? 남자의 말에 경수가 신랄하게 웃어보였다. 도발하지마, 병신새끼야.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경수의 말이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 남자는 어깨를 으쓱해보이곤 자리에 앉는 경수에게 잔을 내어줬다. 경수는 앞에 놓인 잔을 밀어내곤 자신이 들고 온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의구심이 드는 표정으로 가방을 훑어보던 남자가 손을 들어 지퍼를 열었다. 한가득 들어있는 하얀가루들, 남자는 조용히 가방을 아래로 밀어넣고는 안 쪽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꺼내왔다. 날카로운 짐승소리와 그르렁대는 소리. 경수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대충 짐작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남자는 어디서 구했을지 모를 늑대를 들고 와 경수의 앞에 내려놓았다. 쇠창살에 갇혀있는 아직 어린 늑대새끼였지만 제법 이빨이 크고 단단하며 몸집이 컸다. 경수를 노려보는 눈빛은 가히 경수를 찢어발기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어때? MADE GUY에게 주는 보스의 선물." "아직도 악취미는 여전하네."
경수의 표정에 짜증이 가득이었다. 분명히 들여오는 도중에 문제가 있었거나 루트가 잘못되었다는둥 문제가 있는 동물일게 뻔했다. 그 증거로, 경수는 자주 이런 선물을 받았다가 좋지않은 일에 휘말리곤 했다. 사실 마피아라는 직업이 사람의 정신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던가 좋은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경수는 왠만하면 좋은 쪽으로 일을 마무리 지으려는 편이었다. 어떠한 비극적인 결말도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경수는 자신에게 내미는 담배 한개피를 받아들곤 입에 문 후 불을 붙였다. 경수가 피는 모든 담배에는 소량의 마약이 들어있었다. 몸에 어떠한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 그럼에도 약간의 마약을 첨가하는 이유가 다 있었다. 약간의 마약은 나쁜 쪽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 사람을 변화시켰다. 예를 들어 일의 능률을 올린다던가. 물론 그러한 것도 불법이기는 했지만 이미 마피아에 발을 들인 이상 경수에게는 법인것이 법이 아닌것이었고, 법이 아닌것이 법이었다.
"보스가 기다린다고 하던데." "보스가? 의외네."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늑대는 들고 갈 생각이 없지만. 경수는 늑대새끼를 한 번 훑고는 부드럽게 유리로 된 문을 젖혔다. 뒤에서 쇠창살로 둘러진 늑대를 질질 끌고오는 소리가 들렸다. 경수는 인상을 찌푸리며 뒤돌았다. 결단코 저 물건을 가져 갈 생각이 없었다. 분명히 자신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이거 가져가. 보스가 직접 주신거니까 보스께 직접 가져가던지."
남자의 말에 경수가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는 보스가 준 물건을 가지고 있고 싶지 않았다. 그게 아주 잠깐이라도. 보스와 관련된 물건은 하나같이 자신에게 재앙을 가져다주곤 했으니까. 경수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늑대새끼를 차 뒷칸에 쑤셔넣은 후 운전대를 잡았다. 자신이 어디론가로 팔려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는지 연신 쇠철창에 몸을 부딪혀오며 으르렁댔다. 경수는 늑대가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허벅지에 숨겨두었던 총을 꺼내들어 늑대에게 겨눴다. 싸한 빛을 내는 권총이 자신에게 위협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으르렁대며 쇠창살에 연신 몸을 부딪히는 행동을 멈췄다. 대신, 몸 깊은곳에서 울리는 으르렁거림이 이제는 진짜로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으면 경수를 물어뜯을거라는 생각으로 바뀐 모양이었다.
"데저트이글. 뭔지 알아?"
경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손에서 총을 뱅글뱅글 돌리던 경수가 이내 권총을 제대로 붙잡고 늑대의 머리에 쏘는 시늉을 했다.
"네 대가리를 뚫을 무기야."
경수의 협박에도 늑대의 눈은 날카로웠다. 경수는 아무래도 좋다는듯 권총을 옆 좌석에 내려놓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차가 움직였다. 이따금씩 차가 움직일 때를 제외하고는 연속적인 소음만 차 안을 감쌌다. 경수는 가까이서 보이는 클럽 입구에 가까운 곳에 차를 대어놓고 주변에 서 있는 웨이터의 도움을 받아 룸으로 향했다. 가장 안 쪽에 있는 룸. 룸까지 소개를 받은 경수가 차키를 던져주며 뒷자석에 있는 늑대를 데려오라고 한 뒤 룸 문을 열어젖혔다. 룸 안은 이따금씩 웃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고요했다. 경수는 제일 가운데에 있는 남자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올려 웃었다.
"꽤 취미가 고약하던데, 보스." "일은 잘 처리했나?" "늑대까지 선물로 줄 줄은 몰랐어. 감사하지만 사양하려고 가져왔지." "흐응.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난 동물을 키우는 것엔 취미가 없거든." "그럴까." "…무슨소리야?" 룸 안을 휘어감은 잠시동안의 정적. 밖에서 힘겹게 끙끙대는 소리와 늑대의 울음소리에 경수의 몸이 멈칫했다. 아까는 저렇게 반항이 거세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남자가 룸 안으로 힘겹게 늑대를 들였다. 연신 쇠창살에 몸을 부딪히며 반항하던 늑대가 룸 안에 들어와 경수를 발견하자마자 조용해졌다. 그 괴리감에 경수가 얼굴을 돌린채로 자리에 굳었다. 한참동안 경수와 늑대를 번갈아 쳐다보던 남자가 박수를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저 늑대새끼가 뭔 줄 아나?" "…." "카이. 네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남자지." 경수의 이가 으득 갈렸다. 재미없는 일로 농담을 하는 것을 원체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에, 이런 농담도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경수는 씩 웃으며 옆으로 고개를 젖혀보였다. 카이는 이미 몇 년 전에 죽었다. 분명히. 그것은 경수 자신도 확인했고 저 앞에 있는 남자 뿐 아니라 주위 간부들도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었다. 경수의 행동에 흥미가 동했는지 술잔을 들었던 보스의 손이 테이블위로 내려졌다. "알고 있을텐데. 카이는 죽었어. 게다가 저건." "늑대지. 그거 아나? 우리는 사람의 유전자와 동물의 유전자가 섞여 우리를 최고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필요했어. 우리는 끊임없이 실험했고, 동물의 유전자와 섞여도 돌연변이를 일으키지 않을 이가 필요했지. 카이를 실험체로 쓸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가 죽은 후 우리는 그의 디엔에이에서 묘한 괴리감을 포착했어. 드디어 꿈이 이루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했지. 그래서 그의 시체를 가져다가 실험을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는 실험에 성공했어. 늑대의 육체와 인간의 정신이 결합된 Final Ordnance(최종병기)를 만들어 낸 것을." "닥쳐." "네가 쏜 사랑스러운 네 연인이 다시 돌아온 것을 본 기분이 어때?"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경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종인은 죽었다. 자신 때문에. 마지막 가는길에 묻기라도 잘 묻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들은 종인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실험을 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경수는 뒤돌아 허탈한 마음으로 늑대를 쳐다보았다. 늑대는 이 상황이 이해되기라도 하듯 자리에 곧게서서 경수와 주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짙은 황금빛의 눈동자. 그 눈동자가 종인과 너무나도 비슷하다고 느낀 순간 경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 - '보름달이 뜨는 날 자정.' 경수는 집 안에 덩그러이 놓인 쇠창살과 그 안의 늑대를 쳐다보았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라면 머지 않았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종인이 죽고 난 후, 경수는 메이드가이로서의 활약을 해 왔다. 단순한 메이드 가이가 아닌 원하는 목표에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면 어느 것이라도 마다치 않는 메이드가이. 그것에는 몸도 상관 없었고 사람이 죽는 것도 상관 없었다. 늑대의 몸을 쳐다보던 경수가 다리를 끌어안았다. '부탁이 아니야, 명령이지. 이미 카이는 너를 반려대상으로 보고 있는 모양이군. 어때? 최종병기의 사랑을 한꺼번에 받는 기분이?'
경수가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말도 안 돼.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건 마지막에 보았던 늑대의 눈동자. 주위에서 비웃음이 터졌지만 그런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종인이 살아있다면, 에 대한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번도 더 했던 경수였지만 이런식으로는 아니였다. 정말, 이런식으로 다시 만나길 바랬던 것은 아니었다. 경수는 조심스레 쇠창살의 문을 열었다. 을싸년스럽게 열리는 문소리에 몸을 말고있던 늑대가 몸을 일으켰다. 손을 내미는 경수의 손에 잠시동안 경계의 기색이 어린 표정으로 탐색하다 아무런 짓도 하지 않는 경수의 행동에 경계가 풀렸는지 조심스레 경수의 손으로 다가왔다. 경수가 손을 들어 늑대의 머리를 매만졌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울컥함을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 눈시울이 시큰시큰 뜨거워졌고, 지난날의 자신의 과오가 한꺼번에 되돌아오는 기분에 자책감이 느껴졌다. 어느새 얼굴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에 경계심이 완전히 풀린 늑대가 다가와 경수의 손을 두어번 핥았지만 경수의 눈에서 한 방울, 두방울씩 떨어지는 눈물은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경수는 웃어보였다. 그 어떤 때보다 밝고 환하게. 경수의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일을 마치고 저녁 늦게 들어와 씻은 후 잠을 청했다. 일상생활은 순조롭게 흘렀다. 아니, 순조롭게 이행하려 애를 썼을 뿐이었다. 어느새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다. 경수는 괜히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자리에 누웠다. 제발 아니길. 아니길 빌었다. 눈을 질끈 감고 그가 다시 살아돌아온게 아니길 빌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가 다시 살아돌아온다면 경수는 설 곳이 사라져버렸다.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세계가 모두 무너져 버릴 것이었다. 익숙하게 경수의 뒤를 따라와 방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누은 늑대의 모습이 오늘따라 눈에 밟혀서 경수는 조용히 방 한 구석에 누운 늑대를 불렀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늑대의 덩치는 전보다 한참 더 커져있었다. 경수는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그가 한 말은 전부 거짓이었다. 거짓이어야했다.
종인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임무는 그 어느때와 같이 순조로웠다. 종인이 마지막 방아쇠를 당긴 순간 그와 겹쳐 또 다른 총소리가 들렸다. 쏜것은 경수, 맞은것은 종인. 경수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종인의 뒷모습을 쳐다보자 종인은 천천히 뒤돌아 경수와 눈을 맞췄다. 웃는 모습그대로 종인의 입가가 움직였다. 무어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경수는 그런 것을 따질 여력이 없었다. 자리에 쓰러지는 종인을 둔 채 경수가 허겁지겁 공장을 달려나왔다. 머릿속에 맴돌았다. 김종인을 쏘면 네가 최고가 될 수 있어. 그렇게 속삭이던 보스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단지, 최고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모두가 그렇듯 그 방법이 정당하진 않았지만 나쁜 것도 아니다. 그렇게 자위했다. '거짓말.' 심연속에서 종인이 걸어나왔다. 어느새 공장 주변은 까맣게 변해있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게. 그럼에도 종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까닭은 진한 종인의 체취가 느껴졌다. 경수는 종인에게 멀어지려 뒷걸음질쳤다. 종인은 그런 경수를 깔보듯 내려다보며 표정없이 다가서 경수를 껴안았다. 경수의 움직임이 멈췄다. 종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고 느끼는 순간 종인이 중얼거렸다. '네가 죽인거야.'
경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몸은 식은땀 범벅이었다. 온 몸이 덜덜 떨려왔다. 잊었다고 생각한 악몽이 헛된 보스의 말로 다시 되살아난 모양이었다. 경수는 이불을 잡고 한참동안 움직일 줄 몰라하다 옷이라도 갈아입어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 걸음 걷지 못해 힘이 풀린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생각했다. 그런 일은 일어 날 수 없다고. 하지만 침대쪽으로 시선을 돌린 경수는 다시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종인아…?"
경수의 옆에 누워있던 것은, 분명히 김종인이 맞았다.
|